특히 강정의 초기 시는 록음악처럼 강렬한 에너지를 분출한다. 본능적으로 분출된 말들임에도 불구하고 정제된 관념과 철학적 사유가 스미어 있다. 이는 어지럽고 현란한 시의 외관과 달리 시의 내부에서 시인 스스로 말과 삶과 세계에 대해 염결하게 고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고투는 주로 삶과 사랑, 죽음과 연관된다. 강정의 시에서 매우 중요한 테마가 죽음이다. 그는 끈질기고 줄기차게 죽음에 집착하여 시의 화두로 삼아왔다. 자신의 핏줄 속에 숨은 바람을 뽑아 하늘로 되돌려 보내려는 듯 죽음을 보여주고, 주술에 걸린 자처럼 죽음을 살아내겠다고 고백한다. 그는 시를 '끝없이 변전하는, 죽은 자의 무덤의 단 한 차례의 묘비명'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는 삶 속에서 수시로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으로 인해 삶의 의미와 가치가 송두리째 지워지는 걸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천착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집착과 애착 때문인 것이다.
강정의 시에 나타나는 죽음은 나르시스의 낭만적 죽음이 아니라 육체의 실체적 죽음이다.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시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라는 극단적 대상을 택하는 것이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수천 번 죽음을 노래했건만/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게 이상하다"고 그는 고백한다. 이런 절망적 침잠은 초기 시부터 나타난다. 탐미적 언어로 죽음과 타락의 세계로 어둡게 침잠했던 첫 시집 『처형극장』(1996)을 시작으로,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존재의 탄생과 죽음의 풍경을 즉물적 언어로 형상화한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2005)을 거쳐, 적막한 카오스 언어로 인간과 삶의 슬픔을 사색한 시집 『활』(2011)을 지나, 최근에 상재한 시집 『그리고 나는 눈먼 자가 되었다』(2019)에 이르기까지 죽음은 반복적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최초의 책 - 강정(1971~ )
책갈피 속에서 동그란 점이 하나 떨어졌다
지난밤에 올려다본 달일 수도 있다
부식토 냄새가 난다
한 개 점을 오래 들여다본다는 건
세계로부터 자신을 덜어내
다른 땅을 핥겠다는 소망
머리를 박고 울면서
점 안으로 자라 들어가는 고통의 뿌리로부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무와 풀들의 수원(水源)을 찾는다
나는 머잖아 숲이 된다
나무들을 끌어안고
나무들의 무덤이 되어
다시 동그란 점이 된다
지구를 알약처럼 삼키고
손때 묻은 우주의 벌목 지대에서
천년을 잘못 읽히던 책 한 권,
비로소 제 뜻을 밝힌다
수의(壽衣) 벗듯 문자를 풀어헤쳐
돌의 이마 위에 투명하게 드러눕는다
나뭇잎 한 장이 전속력으로 한 생을 덮는다
나는 미래의 기억을 다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