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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4.20 16:05:59
  • 최종수정2023.04.20 16:05:59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증평 율리 등잔길을 찾았다. 물가로 난 길을 따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 늦가을이다. 저만치에 몇 마리 오리들이 자유로이 물 위를 떠다닌다. 잎사귀를 땅으로 돌려보낸 나무들은 앙상하다. 산을 내려오는 바람도 드문드문 끊겼다 이어진다. 바람결이 많이 순해졌다.

물 위에 만들어진 테크길을 걷다가 이제 막 땅 위로 올라서는데, 옆으로 어떤 조형물이 눈길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한 구의 석불, 아니 돌부처가 덩그러니 서 있다. 거무튀튀한 돌부처는 키가 크고, 살집이 많은 모습이다. 맨발로 땅 위에 서 있는데, 도톰한 발등에 다섯 발가락이 또렷하다. 부처님이 걸친 옷은, 어깨에서부터 발끝까지 드리워져 있는데, 옆으로 그어진 옷 주름이 아래로 내려와서는 타원형을 그리고 있다. 가장 완연한 조각은 두 손이다. 왼손은 등을 보이며 땅을 향하여 늘어뜨렸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보이며 하늘을 향하고 있다. 머리에는 어떤 관(冠) 같은 것을 썼던 것처럼 보이는데, 조각이 어렴풋하다. 귀는 얼굴에 비례해 두껍고 길다.

한참 동안 돌부처를 바라본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얼굴 부위에 조각이 없다. 그냥 울퉁불퉁한 자연스런 돌이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떤 신비감마저 든다. 안내판 해설에는 이 불상은 관음보살이며, 고려 전기에 만들어지는 불상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석불이라는 것이다. 얼굴 모습이 없는 것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아 없어진 거란다. 나는 해설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 머리에 쓴 관도, 옷 주름도, 손과 발의 조각까지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은 모습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저 부처님 얼굴에서도 그윽한 눈과 오뚝한 콧등, 도톰한 입술이 어렴풋하나마 남아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있다. 용(龍)을 그릴 때, 눈동자에 점을 찍으면서 용 그림이 완성된다는 말이다. 이 불상을 조성하면서 마지막으로 부처님 얼굴에 눈, 코, 입을 새겼을 터인데, 흔적이 없다. 얼굴을 새기다가 그만둔 어떤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 아예 얼굴을 새기지 않은 것인가· 저 멀리 엄숙한 모습으로 이곳을 굽어보고 있는 좌구산은 사연을 알고 있으리라. 물치 폭포에서 발원하여 보강천으로 흘러가는 저 냇물은 그 인연을 알고 있으리라.

아마도… 지금은 물에 잠긴 저 아래 마을에 착한 사내가 살았을 것이다. 동네 앞에 있는 커다란 돌을 보고, 그 속에 웃고 있는 부처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스님도 아니요, 석수쟁이도 아니었다. 그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어지러웠고, 그가 사는 삶이 배고프고 고단하였다. 동네 어귀에 부처님을 조성하면, 부처님의 가호를 받는다, 그리 믿었을 게다. 사내는 큰 바윗돌을 다듬는다. 돌을 떼어내고, 자르고, 새겼다. 달이 가고, 철이 바뀌면서,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서서히 나타났다. 정(釘)이 목탁이었고, 바람 소리 새소리가 염불이 되었다. 이제 얼굴을 새겨야 하는 때다. 바로 그때. 그때에, 돌부처와 사내의 '현재'라는 시간이 정지된다. 순간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내 마음에, 의문과 추측이 난무한다. 갑자기 동네에 엠병이 돌아서 사내도 그렇고, 사람들이 깡그리 다 죽었나 보다. 아니, 오랑캐가 쳐들어와 사내가 전쟁터로 끌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였나 보다. 생각이 어지러워진다.

인류 최고의 그림이라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눈썹을 그리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미로의 비너스상은 두 팔이 없다. 불완전하지만, 관능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한다.

가만히 돌부처를 올려다본다. 새겼느니, 새기지 않았느니, 죽었느니 끌려갔느니 하는 미혹에 빠져서, 손에 못이 박히도록 부처를 새기던 어느 사내의 마음을 나는 읽지 못하고 있다. 뒤로 돌아가 돌부처의 뒷모습을 본다. 아무런 장식도 조각도 없다. 아늑하고 푸근한 느낌이 든다. 원래 저 돌부처는 십여 미터 저 아래 마을 미륵댕이에 서 있다가, 이곳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두 번 자리를 옮겨서 지금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그곳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만해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가 생각났다. 감히 흉내를 내보았다.

큰 귀로 듣고, 빈손을 보이시며, 맨발로 천년을 걸어오시는 당신은, 언제쯤 그 자비한 얼굴을 보이시렵니까?

최재우

-푸른솔문학 수필 등단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1회 충북대수필문학상 대상

-전국문화원연합회 향토사논문대회 대상

-중·고등학교 교장 정년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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