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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봄의 향연 - 폭풍의 언덕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 웹출고시간2019.03.07 17:42:54
  • 최종수정2019.03.21 10:51:54

폭풍의 언덕 - 기형도(奇亨度 1960~1989)

이튿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간유리 같은 밤을 지났다.

그날 우리들의 언덕에는 몇 백 개 칼자국을 그으며 미친 바람이 불었다. 구부러진 핀처럼 웃으며 누이는 긴 팽이 모자를 쓰고 언덕을 넘어갔다. 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걸까· 어머니 왜 나는 왼손잡이여요. 부엌은 거대한 한 개 스푼이다. 하루 종일 나는 문지방 위에 앉아서 지붕 위에서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 있는 유지 소리를 구깃구깃 삼켜넣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아야. 조용히 골동품 속으로 낙하하는 폭풍의 하오.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러닝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 가를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 보았다. 공중에서 휙휙 솟구치는 수천 개 주삿바늘, 그러고 나서 저녁 무렵 땅거미 한겹의 무게를 데리고 누이는 뽀쁠린 치마 가득 삘기의 푸른 즙액을 물들인 채 절룩거리며 돌아오는 것이다.

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암흑 속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집. 이 불끈거리는 예감은 무엇일까. 나는 헝겊 같은 배를 접으며 이 악물고 언덕에 섰다. 그리하여 풀더미의 칼집 속에 하체를 담그고 자정 가까이 걸어갔을 때 나는 성냥개비 같은 내 오른팔 끝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무서운 섬광을 보았다. 바람이여, 언덕 가득 이 수천 장 손수건을 찢어 날리는 광포한 바람이여, 이제야 나는 어디에서 네가 불어오는지 알 것 같으다. 오, 그리하여 수염투성이의 바람에 피투성이가 되어 내려오는 언덕에서 보았던 나의 어머니가 왜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는지를.

다음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오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무수한 변증의 비명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충북일보] 기형도의 시는 비극적 고해이자 황량한 추억의 흑백 사진이다. 시인 자신의 육체 깊은 곳에 자리한 아픈 기억과 상처를 검은 잉크로 찍어낸 어두운 판화다. 그의 시에는 절망과 쇠락의 검은 기운, 고독한 자의 우울한 내면,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자아의 소외감이 그림자처럼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위로는 책이었고 그는 독서를 통해 세계와 교감하고 호흡했다. 그의 시에 책과 관련된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인가"(시 「오래된 서적」).

죽음, 쇠락, 절망을 암시하는 검은 이미지들은 세계에 대한 시인의 부정인식의 표현이자 세계 속에서 자아가 느끼는 고통의 감정적 흉터들이다. 이 흉터들은 주로 유년의 가난한 집과 인근 공장지대를 통해 나타난다. 특히 아버지의 병세로 인해 가세가 기울어진 집안을 책임지며 힘겹게 살아가는 엄마와 누이의 모습은 애잔한 연민을 자아낸다. 가족에 대한 시인의 아픈 기억과 감정은 긴 분량의시 「위험한 가계(家系) 1969」에 농밀한 서정으로 아름답고 슬프게 그려져 있으며, 「폭풍의 언덕」에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기형도의 부친 기우민(奇宇敏)은 황해도가 고향이다. 한국전쟁 때 옹진군 연평도로 피난 와 교사직을 그만두고 연평도 면사무소에서 행정공무원으로 일한다. 1960년에 기형도는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나고, 1964년에 그의 가족은 경기도 시흥군의 소하리(경기도 광명시)로 이사한다. 당시 소하리는 산업화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모여 살던 농촌마을이었다. 그곳에서 기형도는 시흥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다. 그런데 1969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가계는 급격히 기울고, 엄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간다. 1975년엔 바로 위의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엄마와 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하러 나간 동안 어린 그는 빈 방에서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낸다. 그의 시에 빈집의 적막과 고독, 죽음에 대한 불안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유년의 이런 아픈 체험 때문일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엄마 걱정」 부분)

그의 많은 시들이 슬픈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사랑의 상실감, 자본주의 사회 속의 물화(物化)된 인간, 부조리한 현실의 폭력 등을 담아낸 시들도 있다. 이런 부류의 시에서도 시적 자아는 대부분 고독과 절망의 안개 속에 파묻혀 있다. 1970~80년대의 암울한 사회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가족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집과 세상은 비극의 무대였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에 내재된 도저한 비극성을 드러내는 그의 시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명명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런 시각에서 그의 시에 접근하더라도 고독과 유폐의 비애감 이면에 그리운 것들에 대한 순수한 열망, 따뜻함에 대한 시인의 뼈아픈 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30분, 기형도는 서울 종로의 파고다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사인(死因)은 뇌졸중. 그는 경기도 안성의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히고, 그해 5월에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1989)이 발간된다. 살아 있을 때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몇몇 눈 밝은 이의 관심을 받던 기형도의 시는 이 유고시집을 계기로 한국 시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 잡게 된다.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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