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시의 중요 특징 중 하나는 시대와 역사, 사회와 여성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허무와 좌절로 몰락하지 않고 생의 활력을 만들어내는 반발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반성, 여성의 고통스런 삶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그녀에게 여성성의 문제는 절박하고도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 사회는 여성성 문제가 사회 전면으로 부각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이 독재시대의 미화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시인은 여러 사회활동을 통해 여성에 대한 억압구조가 민중에 대한 억압구조와 결코 다르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하여 여성의 문제를 당대의 문제, 인간의 문제로 확장하여 울림 깊은 시들을 낳는다. 그 결과 한국 현대시에서 여성주의 시의 영토는 한층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녀는 주로 여성의 인권과 가치, 남녀차별과 사회모순, 근현대가 여성에게 자행한 야만적 폭력, 아시아 국가들의 서구 식민지화 등을 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남성에 의해 식민지화된 여성성의 신화들을 과감하게 깨부수고, 남성 우월주의 지배문화 혹은 가부장제 부성문화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 한다. 역사 속에서 주종관계로 고착된 남녀차별을 없애고, 여성과 남성이 아름다운 동행 관계 생명의 관계로 나아가길 열망한다. 그녀가 삶과 몸과 시를 던져 아파한 당대의 현실과 동행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볼 일이다.
/함기석 시인
동행 - 고정희(高靜熙 1948~1991)
가리봉동의 밤거리를 걸으며
동행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음산한 어둠으로 가득한
구로동의 골목길을 더듬으며
저무는 우리 삶 어깨동무해 주는
동행의 기쁜 날 생각했습니다
가리봉동에 엎드려 웃는 여자들이
지폐를 헤아리는 남자들의 발아래서
여름날 수풀처럼 무성했다가
가을날 단풍처럼 무르익었다가
겨울날 눈발처럼 휘날렸다가
진구렁 가랑잎 되어 뒹구는 길 돌아오며
동행하는 무서움 생각했습니다
유방에 불을 켠 여자들이
동해안처럼 줄선 남자들의 발아래서
실크로드의 황혼이 되었다가
허구한 날 강태공의 월척이 되었다가
홍등가 이무기의 횟감이 되었다가
더는 내려갈 수 없는 곳, 거문도
거문도로 내려가는 길 돌아오며
동행하는 분노를 생각했습니다
오 거문도 해안에서 우는 여자들이
한반도의 썩은 물로 철썩이다가
한반도의 쓰레기로 솟구치다가
그러나, 그러나
세상의 더러움 다 걸러내고
푸른 해일 일으키며 달려오는 곳에서
깊은 바다 이끌며 돌아오는 포구에서
동행의 벅찬 힘 생각했습니다
동행의 소중함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