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곽중규(郭重奎 1891~1950)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1921년 9월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던 중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비서로 취임하였고 이어 비서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에서 활동하던 동생인 곽중선(郭重善, 1907~1935)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하이의 지리와 풍습을 알려주도록 하여 훙커우공원 의거를 지원하였다. ◇ 의병의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의 뜻을 키우다 곽중규는 1891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의병 출신인 아버지 곽준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곽헌(郭憲), 곽공원(郭公園) 등의 이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의병활동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한 부친 곽준희를 통해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자주 독립의 뜻을 키웠다. 부친 곽준희(곽경희)는 1870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1907년 일제가 강제로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켜 사실상 강탈하자 장운식(張雲植)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곽준희는
[충북일보] 조선시대 전국 각도에서는 식년시(式年試), 즉 3년마다 한번씩 문과 초시에 해당하는 향시(鄕試)를 치뤘다. 이때 과거 시험장의 감독관은 관찰사나 도병마사가 맡았다. 그러나 응시생이 많은 지역에는 서울에서 경시관(京試官)이 파견됐다. 조선 선조~인조 대의 인물로 김시양(金時讓·1581-1643)이 있다. 그의 호는 하담(荷潭)으로 비인현감을 지낸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그가 광해군 대에 충홍도 경시관이 돼 우리고장에 파견됐다. 당시 충청도는 어떤 역모사건이 있었는지 도명(道名 )이 '충홍도'로 개호돼 있었다. 그는 이때 향시의 제목으로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를 냈다. 이 표현은 맹자 '군시신여초개 신시군여구수(君視臣如草芥 〃)의 뒤 부분이다. 해석하면 '임금이 신하를 초개와 같이 보면, 신하도 임금을 원수같이 본다'는 뜻이 된다. 초개는 풀과 티끌이라는 의미로, 임금은 절대 권력을 지녔지만 신하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뒷부분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만을 취하면 국왕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응시생들의 항의가 빗발치는 등 시험장에서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충홍도의 경시
[충북일보] 속보= 청동주물로 제작된 유물은 부식에 의해 CT상 이중 단면이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경북대 남권희 교수가 최근 발표한 견해와 상반되는 것으로, 증도가자 진가품 논란의 또 다른 핵심적인 사항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남 교수는 지난 31일 충남 부여에서 열린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제 42회 추계국제학술회의에서 ①청동유물은 내부에서 부식되는 경향이 있다, ②CT상에 나타난 활자의 단면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표면과 내부의 밀도 차이에서 이중구조로 보일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또 ③CT 상에 나타난 활자의 이중구조를 해석할 때 결합에 의한 현상보다 부식의 성분 차이에 따른 현상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④부식된 표면에 땜질은 불가능하고 주석이나 납의 편석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충북일보는 남교수의 4개 주장을 금속공학 전문가인 충북대 기계공학부 조정호 교수에게 질의하였다. 조교수는 ①에 대해 "금속은 산소가 있어야 부식이 진행된다. 그러나 이는 금속 내부에 매우 큰 기공(氣孔)이 있는 경우를 전제로 하고 있다. 금속활자같이 작은 것에 기공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설사 존재한다고 해도 기공 속의 산소량만큼 부식이
[충북일보]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의 이성산성(已城山城)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굴산성(屈山城)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해졌다. 옥천군과 국강고고학연구소는 최근 발굴 성과를 발표, "이성산성의 서쪽 성벽 25m를 발굴 조사한 결과 성벽의 흙에서 섞여 나온 유물로 미뤄 5세기 신라 토성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성산성은 해발 115∼155m의 구릉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천1백40m이다. 이밖에 성벽의 너비는 하단부를 기준으로 최대 15.4m이고, 높이는 약 3.5m에 이르고 있다. 굴산성에 대한 역사시록은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8년조에는 "정월에 이찬 실죽을 배하여 장군으로 삼고, 일선 땅의 정부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굴산의 두 성을 고쳐 쌓았다(春正月 拜伊·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ㆍ屈山二城)"라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는 "기산현은 본시 굴현으로서, 경덕왕이 기산으로 개명했고 지금은 청산현이다"(耆山縣 本屈縣 景德王改名 今靑山縣)라고 기록했다. 두 문헌기록은 △신라가 소지마립간 때 굴산성을 개축하였고 △그 굴산성은 청산현에 위치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굴산성은 문헌
[충북일보] 정춘서(鄭春瑞, 1885~1911) 는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이 되어 고향인 청주를 근거로 경북 · 강원 · 충청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피체 이후에도 법정에서 자신의 의병활동을 제대로 평가해주기를 요구하였고, 일제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한 기상을 지키며 순절한 후기의병 정기를 보여준 인물이었다. ◇ 내수읍 신안리에서 출생한 의병 정춘서는 1885년 2월 2일 청주군 강내북일면 신안리(현재 청주시 내수읍 신안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자기에 관한 기록이나 문집, 편지 등을 남긴 것이 하나도 없어, 그에 대한 가문, 성장 과정, 이력 등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또한 "이번 벌초 행사는 민족 최대의 명절을 앞두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고취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청주보훈청 직원들은 정선생(정춘서) 묘소에 난 잡풀과 잡목을 깨끗하게 제거하고 제를 올렸다."라고 한 신문기사가 밝히는 것처럼,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기 때문에 가족 관계조차 알 수 없다. 그에 관한 것은 그의 재판기록이나 『관보』 등에 남
[충북일보] 최소 3곳의 단체나 인물이 등장하는 등 가짜로 예비 판정을 받은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증도가자 유입 경위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최근 "고인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증도가자 등 고려활자 7개에 대한 3차원(3D) 금속 컴퓨터단층촬영 결과 모두 인위적인 조작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밝힌 바 있다. 본보의 취재 결과, 증도가자를 포함한 청주고인쇄박물관의 가짜로 추정되는 고려금속활자 확보하는 과정에는 현재까지 최소 3곳의 단체나 인물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경북대 산학협력단은 지난 2010년 '조선왕실주조 금속활자복원사업'을 수행하였고, 이때 청주고인쇄박물관은 해당 사업에 보조사업자로 참여하였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이 과정에서 보조사업자 자격으로 경북대 산학협력단에 자료구입비와 인건비 등의 명목으로 총 4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하였다. 이 지원금은 포괄적 성격의 예산으로, 사용처와 구매 항목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이같은 사업 성격 속에서 책임연구원인 경북대 남권희 교수는 자기대학 산학협력단에 "연구에 필요하다"며 대구시내 모 문화재매매업소로부터 전통활자 구입 필요성을 제기하였고, 산학협력단을 이를 수용하였다.
조선시대 색(色)의 물질은 얻는 것은 국가대사의 하나였다. 건축물의 외관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의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재위 16년(1740)에 종묘의 신탑(神榻)을 모두 당주홍(唐朱紅)으로 고쳐 칠하라고 명하였다. 신탑은 위패를 올려놓는 상, 당주홍은 중국 당나라에서 수입한 붉은색 안료를 의미한다. 그러자 예조참판 이익정(李益炡)이 "각실의 신탑을 처음에는 번주홍(燔朱紅)으로 칠하였는데 수개(修改)할 때마다 당주홍으로 고쳤으므로 각실의 신탑은 그 색이 같지 않습니다"(영조실록 16년 4월 19일자)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영조는 "달라서는 안 되니, 모두 당주홍으로 고쳐 칠하고 이 뒤로는 정식(定式)으로 삼으라"(〃)라고 하명하였다. 위패를 모신 공간은 가장 신성한 제례의식 공간이고, 따라서 변색이 잦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조선시대 지방정부도 색물질을 얻는 것을 무척 중요시하였다. 조선시대 청주목 월경지의 하나로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구에 주안향(周岸鄕)이 위치했다. 마치 미국 본토와 알래스카와 같은 모습으로 주안향은 문의현을 뛰어넘은 곳에 위치하였다. 대전시 동구의 대청호 일대가 대체로 그 지역이다. 주안향은 구한말까지 그대로 존속됐고,
[충북일보] 지난 1998년 청주 명암동에서 출토된 '단산오옥명 고려 먹'(丹山烏玉銘 高麗 墨)이 보물 제 1889호로 지정되었다. 이 먹은 당시 청주시 동부우회도로 건설공사를 하던 과정 중 고려시대 목관묘에서 출토되었다. '단산오옥'은 '단산'과 '오옥'의 합성어다. 단산(丹山)은 단양의 옛 이름으로, 1018년(고려 현종 9)부터 단양군(丹陽郡)으로 승격되는 1318년(고려 충숙왕 5)까지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옥(烏玉)은 먹의 별칭인 오옥결(烏玉O)의 약칭이다. 따라서 단산오옥은 '단양 먹(丹陽 墨)'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발견 당시 이 먹은 무덤 주인의 머리맡 부근 철제가위 위에 반으로 조각난 채 놓여 있었고, 단산오(丹山烏) 아래 일(一)자만 보였다. 그럼에도 '一'을 '玉'자로 추정한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충주목 단양군 조는 단양의 토산을 설명하면서 '墨 最良 號爲丹山烏玉'라고 기술하였다. 의역하면 '단양의 먹, 최고 품질로 단산오옥으로 불려진다'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도 《세종실록》 지리지와 똑같은 문장으로 기술돼 있다. 고려시대 단양에서 최고 품질의
[충북일보] 일본 정창원에 보관돼 있는 '제2 신라문서'는 과연 8세기 무렵에 지금의 충북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에서 작성된 것일까. 일제 강점기인 지난 1933년 일본 황실의 유물 보관창고인 정창원에서 8세기 무렵의 '제1 신라문서'(일명 신라장적)가 발견돼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특히 이 문서는 작성 장소가 청주 일대 어디인 것으로 추정돼 지역적인 관심을 증폭시킨 바 있다. 같은 해 정창원 남쪽 창고에서 유기 그릇의 일종인 '좌파리가반'(佐波理加盤)을 정리하던 중 포개진 그릇 사이에서 꼬깃꼬깃 접혀진 통일신라시대 공문서 2장이 발견되었고, '제2 신라문서'로 명명됐다. 그러나 제2 신라문서는 분량이 2장으로 적고 해독이 안 되는 문자로도 기록돼 있어, 소수의 구결 연구가를 제외하면 역사 전공자들도 그 존재를 아직 잘 모르고 있다. 현재까지 제2 신라문서 앞면에는 지역 진상물인 공물(貢物), 뒷면에는 관리 급여인 녹봉(祿俸)에 대한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대략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통일신라 때의 이같은 공문서가 바다건너 일본에 전래된 경위는 열도로 운송할 좌파리가반을 포장하는 과정에서 제2 신라문서가 충격 완화제로 사용됐기 때문이었다. 현재 국내 학
헤이안 수립 이전의 교토를 지배한 호족은 하타(秦)씨였다. 하타씨 세력의 강대함은 교토시 중경구에 위치한 헤이안창생관(平安京創生館)에 그려져 있는 하치오카데라(蜂岡寺) 조감도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치오카데라는 헤이안 설립 이전의 사찰로 하타씨 가문의 우지데라(氏寺)로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이다. 헤이안창생관에 그려져 있는 하치오카데라의 조감도를 보면, 흡사 나라에 있는 호류지(法隆寺)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장대하다. 이 하치오카데라를 후에 장소를 조금 바꿔 건설한 것이 지금의 교류지(廣隆寺)이다. 이 거대한 사찰을 건립한 하타노 가와카쓰(秦河勝)를 비롯한 하타씨 일족들은 아라시야마(嵐山)일대의 가쓰라가와(桂川)에서 물을 끌어들여 하타씨의 대종가의 본거지인 우즈마사(太秦) 일대의 수전을 개발하였다. 신라에서 온 하타씨들은 우즈마사 일대에 논을 만들기 위해 가쓰라가와 상류에 제방을 쌓기 시작하였다. 하타씨에게 있어서 가쓰라가와 상류에 제방을 쌓고 댐을 만드는 기술은 고국에서 익히 해보았던 토목공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대 교토에 살았던 일본들에게 있어서는 한 번도 경험하거나 본적도 없었던 경이적인 기술이었다. 동아시아에서 강의 물줄기를 변경하는 대규
[충북일보] 우덕순(禹德淳, 1876~1950)은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에 참여한 충북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국내에서 을사늑약 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후에도 교육 및 의병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 충북 제천이 낳은 독립운동가 우덕순은 충북 제천 황석리에서 아버지 우시영(禹始映)과 어머니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이고, 독립운동 시기 우연준(禹連俊), 우홍(禹鴻) 등을 이명으로 사용하였다. 꼭 106년 전 오늘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역(哈爾濱驛)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였다. 이 때 하얼빈역 바로 전 역인 채가구역(蔡家溝驛)에도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대기한 독립운동가가 있었으니, 그가 우덕순이다. 그런데 안중근의 동지인 우덕순이 충북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가 서울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서울 국립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도 서울 출신이라고 적혀있어서, 이러한 오해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오해의 시작은 우덕순이 하얼빈 의거 이후 첫 조사를 받을 때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답변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첫 조사에 대한 진술은 안중근, 우덕순 모두 거
[충북일보] 괴산은 고려시대에는 괴주(槐州)로 불리었다. 지금의 지명 괴산(槐山)은 조선 태종대에 등장하였다. 본래 '州'(주) 자 지명은 '牧'(목) 이상에만 붙이는 행정 위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고려 후기들어 '주'자 인플레이션 현상이 강하게 일어났다. 고려의 국사(국사)나 왕사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 '주' 자를 붙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시들도 중국을 갔다온 후 그 기념으로 자신의 출생지에 '주'자 지명을 끌어다 붙였다. "혹은 환시(宦寺)가 중국에 들어가 입시하였다가 사명을 받들고 환향하거나, 혹은 중이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되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고을은 내가 난 땅이라.' 하여, 권세를 타서 요구하고 청하여, (…) 혹은 군과 현을 승격하여 주를 만드니, 이 때문에 군과 현의 이름이 날로 뛰어오르게 되었으나…."- 선초의 태종은 이같은 주자 지명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 메스를 가했다. 이 과정에서 괴주는 지금의 괴산으로 개명됐다. 들이 넓고 물이 풍부한 곳은 천(川) 자가 붙었으나 괴산처럼 산이 많은 곳에는 山자가 붙여졌다. 전자의 예로는 우리고장 제천·옥천·진천 등이 해당된다. 현재 괴산군은 감물면·문광면·불정면·사리면
[충북일보] 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하였다. 그는 1864년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자 크게 당황하였다. 이때 국내 입국해 있던 천주교 선교사 가운데 일부가 "천주교도의 힘을 빌어 한 · 불 · 영 3국동맹을 체결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이 조언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학장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나갔다. 그는 왕권유지 차원에서 천주교 탄압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는 1866년(고종 3)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을 내렸고, 그 결과 프랑스 선교사 9명과 국내 신자 8천여 명이 학살을 당하는 대참극이 발생하였다. 바로 병인박해다. 병인년의 박해로 신자들은 산속이나 오지로 피신해 다니다가 수많은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병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같은 사실이 중국 천진에 주둔해 있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알려지면서 그 보복으로 병인양요(1866)가 일어났다.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국내 숨어지내던 인물로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erron·1827-1903) 신부가 있었다. 그는 리
[충북일보] '레고 조형과 세필이 수묵화 위에서 만나다.'지난 2011년 약관의 나이에 충북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해 지역 화단을 화제를 낳았던 허주혜(24·충북대 대학원) 씨가 제 3회 개인전 '끝없이 펼쳐진'(Un ending)을 구 도지사 관사인 충북 문화관에서 갖고 있다. 출품작은 30여점으로 조선시대 화원화가 이인문(李寅文·1745-·)이 그린 (江山無盡圖)를 모티브로 한 것들이다. 특히 출품작 가운데는 가로 9m가 넘는 작품도 있어, 모처럼 지역화단의 대작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이인문의 는 춘하추동 4계절의 대자연 경관을 연이어 그린 가로 8.5m의 권축(卷軸·두루마리) 작품으로, 현존하는 조선후기 최대의 거작이다. 허씨는 "강산무진도는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구도가 지루하지 않고 마치 운율이 흐르듯 자연스러웠다"며 "그 같은 구도를 모티브로 삼아 현대의 공간성을 재해석, 이번 개인전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에서의 구도는 좌에서 우로 전개되고 있고, 그 공간은 산과 강 그리고 집 등 전통시대 자연경관으로 채워져 있다. 허씨의 이번 작품들도 동일한 구도로 흐르면서 경관이 끝나는 곳에서는 시야가 가물가물, 경관은 제목 그대로 '끝없이 펼쳐진' 모습을 하고
[충북일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가네코 타카시(金子敬·1944년생) 씨가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 도움으로 지난 16일 세종시 부강면을 찾았다.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여인으로 잘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는 1912~1919년까지 7년 동안 부강에 거주한 바 있다. 그녀는 1919년 일본으로 귀국한 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됐고, 여기에는 부강에서의 조선인 탄압과 3.1운동 목격 등도 큰 영향을 미쳤다. 타카시 씨는 후미코의 외가쪽 친조카로 현재 야마나시현 소구마치에서 후미코의 생가와 시비를 관리하고 있다. 타카시 씨는 먼저 세종시 부강초등학교(교장 민방식)를 방문해 곽창록 씨로부터 후미코가 다녔던 부강심상학교와 그녀의 학창시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어 후미코의 자전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원제: 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에 등장하는 부강파출소(당시 일본 헌병대 자리)를 방문, 일대를 둘러봤다. 후미코의 수기에는 조선인이 매질을 당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서술돼 있다. '그중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헌병대 건물이었다. 카키색 제복을 입은 헌병이 마당으로 조선인을 끌어내 옷을 벗기고 알몸이 된
이광(李光, 1879~1966)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망국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외교관련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3.1운동 이후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에는 이회영과 교류하면서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의거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광복 후에는 중국에서 한교선무단의 단장으로 교민보호에 앞장섰다. 1948년 귀국하여 충북도지사, 감찰위원장, 체신부장관을 역임했다. ◇신민회 동지들과 망명길에 오르다 이광의 호는 성암(星巖), 본관은 전주로 1879년 9월 30일에 충북 청주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범형(範珩), 어머니는 경주 김씨이다. 이광은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본격 나섰다. 이 시기 대한제국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되어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2년 뒤인 1907년에는 헤이그특사를 계기로 광무황제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는 동시에 군대마저 해산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광이 가입한 신민회는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독립운동단체였다. 1909년 양기탁
[충북일보] 헤이안, 지금의 교토를 도읍으로 한 덴노는 간무(桓武; 781~806년 재위)이다. 784년 간무(桓武; 781~806년 재위)는 야마시로국(山背國)의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새로운 도읍의 건설은 신라계인 하타(秦)씨를 어머니로 하는 후지와라노다네쓰구(藤原種繼)를 중심으로 야마시로국을 비롯한 근방의 여러 지역의 부호들의 도움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나가오카교(長岡京)로의 천도에 제동이 걸린 것은 평성경의 궁궐문을 이건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기근이나 질병이 유행하면서 789년에는 간무의 모후(母后)인 다카노노니가사(高野新笠)가 사망하고, 790년 황후가 사망하게 된다. 간무는 마침내 수해를 입기 쉬자 지형에 위치한 나가오카쿄을 포기하고 794년(延曆 14년)에 도읍을 나가오카교보다 북쪽에 위치한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겼다. 예나 지금이나 천도는 대개 지배자의 확고한 의지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상례이다. 710년 후지와라쿄에서 헤이조쿄로의 천도는 율령체제의 확립과 함께 관청과 관인의 수가 증가하자 이들이 거주할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실은 아스카가 구호족의 중심지여
[충북일보] 조선시대 10여명의 희생자를 낸 옥천 권대전 역모사건(일명 정한 역모사건)은 조흥빈(趙興賓)이라는 인물의 고변(밀고)으로 시작됐다. 권대진에게는 '낙'(絡)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는 조흥빈의 아들 '완'(浣)에게 권대진의 역모를 흘리며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니 이 기회를 놓히지 말라"는 식으로 동참을 꼬드겼다. "지금 호남과 영남에 8대장이 있는데 동시에 군대를 일으켜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 네가 나와 같이 행동하면 부귀를 얻을 것이니, 절대 전파시키지 말고 남몰래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조흥빈의 아들 '완'은 무시무시한 대화가 잘 믿기지 않았는지 며칠 뒤 발설자인 권대진을 직접 찾아가 사실 여부를 다시 확인했다. 권은 성공을 확신했는지 역모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낙이 간 뒤에 신이 동생 조희빈과 함께 대진을 찾아가 물어 보았더니, 대진이 말하기를 '우리 집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는데, 참기(讖記) 가운데에 백마장군에 관한 설이 있으니, 이야말로 우리 집이 일어나는 좋은 징조이다.' 하고, 8대장에 관한 이야기는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권대진의 역모 의도를 재차 확인한 조완은 이를 아버지(조흥빈)에게 알렸고, 그가
[충북일보] 조선 인조 때의 옥천지역 역모사건과 관련해 권대진, 정한, 양천식 위로로 서술을 했다. 그러나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추안급국안 등을 종합하면 당시 역모사건에는 총 32명이 연루된 것으로 확인된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옥천 10명, 합천 6명, 나머지는 전라도, 경상도, 청주 등이다. 청주에서는 조철이라는 인물이 당시 역모사건에 가담했다. 옥천 가담자가 가장 많은 것은 권대진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가장 컸음을 의미한다. 옥천 가담자 가운데 권대진, 권락, 권계, 권순, 영이, 박선검, 박준검 등 7명은 처형됐다. 권락, 권계는 권대진의 아들이고 권순은 조카이다. 이밖에 영이는 권대진가의 노비이고 박선검, 박준검 권대진가의 보인이었다. 보인은 대신 병역의무를 지는 것을 말한다. 권락, 권계 형제는 아버지(권대진)의 역모 도모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양천식·양정식 및 이찬희 등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도당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먼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병사를 일으켜 왜적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성을 치기로 약속이 되었다.' 하고….'- 인용문의 '그
[충북일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 있다.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이다. 서울 남산 아래 살았던 그는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을 하나 동료의 모함을 받아 정거(停擧)를 당하였다. 정거는 일정기간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일컫는다.그는 가학(家學)을 하면서 문학을 집중적으로 연마하였고, 이 시기에 그 유명한 동악시단(東岳詩壇)이 형성된다. 동악시단은 이안눌이 주축이 돼 결성된 일종의 시(詩) 동호인회로, 정철(鄭澈)의 제자였던 권필, 선배인 유근수, 평생의 맞수였던 이호민·홍서봉·이정구 등이 참여하였다.그가 끝까지 출사(벼슬살이)를 마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29세 되던 해인 1599년(선조 32) 다시 과거 시험을 봐 문과에 급제하였고, 32세 되던 해에 우리고장 청풍부의 경시관(京試官) 임무를 부여받았다.조선 조정은 지방에서 치뤄지는 향시(鄕試)를 감독하기 위해 시험 감독관을 지방의 과거 시험장에 종종 파견하였고, 이를 경시관이라고 불렀다.시험 감독관으로 파견되는 만큼 현지 체류 기간은 길지 않았다. 아안눌의 청풍 체류기간도 길지 않았으나, 이때 〈호서록〉(湖西錄·동악집 제 4권)이라는 연작
[충북일보] 정운경(鄭雲慶, 1861~1939)은 제천 유력가문 출신으로 영춘에 살면서, 을미의병기 호좌의진 참여를 시작으로 을사의병기에는 원용팔에 이어 단양에서 의거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의 의거는 유학을 공부하면서 단순히 현실의 묵수나 과거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적 이상을 지키며 유학자로서 민족이 처한 위난을 극복하려는 충절에서 비롯된 지행합일의 실천이었다.◇ 제천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나다 정운경은 1861년(철종12) 2월 9일 제천의 월림(月林)에서 정희원(鄭羲源)과 원주 원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 자는 화백(和百), 호는 송운(松雲)이다. 그의 집안은 송강 정철의 후손으로 정보연(鄭普衍) 때 제천에 터전을 잡은 이후 정보연의 손자인 정익하(鄭益河)가 나라로부터 불천위를 인정받으며 지역사회의 명문으로 번성하며, 인근의 유력 문중과 연이은 혼인관계를 통하여 향촌 내에 기반을 굳혔다. 정운경은 고향에서 재종숙 정일원(鄭一源)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타고난 재질로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24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고 그 다음해에 부인인 한산 이씨가 두 딸을 남기고 일찍 타계하는 슬픔을 겪었다.
[충북일보] 9일이 제 569주년 한글날인 가운데, 구한말 조선을 정탐한 일본인이 한글을 '서양의 알파벳을 능가한다'고 평가,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본인은 '팔도의 말 가운데 충주의 말이 가장 격조있고 온하하다'고 평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일본인 첩자 혼마 규스케(本間九介·1869~1919)는 지난 1893년 조선에 파견되어 1년 동안 팔도 구석구석을 정탐하였다.그리고 일본 도쿄로 되돌아가 1894년 4월 17일부터 1백54편의 조선 정탐글을 '이륙신보'(二六新報)에 연재했다.해당 글은 최혜주 박사가 지난 2008년 '일본인의 조선 정탐록 조선잡기'(김영사 간)라는 책명으로 출간한 바 있다.그러나 그동안 구한말의 조선풍속만 주로 인용됐고 언어와 문자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탐꾼 혼마는 한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구한말의 조선풍속만 주로 인용됐고 언어와 문자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탐꾼 혼마는 한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 구조는 일본글과 같다. 교묘한 것이 서양의 알파벳을 능가한다. 한인(韓人)은 실로 이와 같이 교묘한 문자를 가지고, 왜 고생스럽게 일상의 서간문까
[충북일보] 나라에 가서 도다이지(동대사)를 보지 않으면 나라를 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사카에 가서 오사카성을 보지 않으면 오사카를 갔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사카성은 오사카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 오사카성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굳이 답사가 아니더라도 오사카를 여행하게 되면 오사카성의의 외곽이라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의 도시인 오사카는 운하가 많다. 오사카에는 오사카의 운하를 운행하는 배가 있는데, 특히 배를 타고 바라보는 오사카성의 모습은 환상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성은 고대도성 나니와궁 옆에 위치하고 있다.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세우기 전에 이곳은 원래 이시야마의 혼간지(本願寺)라는 사찰터였다. 전국 무장들이 최후의 승부를 향해 치닫던 시점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사원과 잇키를 대상으로 전쟁을 선포한다. 노부나가에 의해 사원세력과 잇키가 차례대로 진압되고 남은 세력은 승려와 촌민이 결합된 혼간지였다. 전국을 사실상 통일한 통일국가의 권력을 대표하는 노부나가도 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혼간지를 쉽게 공략하지 못하였지만, 혼가지가 계속 버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돌산 위에 위
[충북일보] 우리고장 옥천사람 권대진(權大進)을 현혹한 인조조의 떠돌이 요승 양천식(楊天植)은 출가와 환속을 3번씩이나 반복할 정도로 생활 자체가 불안정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역시 3번씩이나 개명하는 등 뭔가를 감추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그 가운데 '양병(楊丙)이라고 하는 자는 바로 양천식이며, 양팽(楊彭)은 바로 양정식이다. 병 등은 세 번이나 그 이름을 바꿨는데,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했다.' 하고….'- 인용문의 양정식은 양천식과 이부동모(異父同母)의 형제간으로 출가와 환속을 함께 했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나, 양천식은 외견상 관상(觀相)과 풍수(風水)를 보는데 능했다. 권대진이 첫 만남부터 양천식에게 설득당한 것은 이 때문으로 파악된다. 양천식은 권대진을 보자 "백마장군이 될 관상"이라고 유인하는 말을 던졌다. 민속에서는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인물을 '백마장군'으로 호칭하고 있다. 의 공손찬(公孫瓚)이나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을 백마장군으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선검(先儉)은 공초하기를, "기사년에 자칭 관상을 잘 본다는 어떤 승려가 대진의 집에 와 관상을 보고 매우 좋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철
[충북일보] 안석경(安錫儆·1718-1774)은 전회 소개한 안중관과 고령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자는 숙화(叔華), 호는 삽교(·橋)이다. 그는 부친 안중관과 함께 충주 가흥촌에서 살다가 1740년 원주의 흥원(興原)으로 이주하였다.충주 가흥과 원주 흥원은 행정구역으로는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그리 멀지 않은 상류와 하류이다. 그리고 흥원은 남한강과 그 지천인 섬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충주로 치면 남한강과 달천에 해당한다. 섬강은 정약용이 충주 하담과 남양주를 물길로 오르내릴 때마다 스쳐 지나갔던 곳으로, 강가의 풍광이 선계(仙界)처럼 다가왔다. '섬강 나루에 해가 뉘엿뉘엿 저무니 / 여기저기 흐르는 물 석양빛이 일렁인다. / 멀리 있는 일엽편주 술 실은 배이런가 / 오리 쌍쌍 날아가는 데가 어부의 집이라네. / 봄 지난 버들이 언덕머리 아직도 푸르게 하고 / 꽃이 지는 물에 비쳐 바위 얼굴 때때로 붉어지네. /…/.'- 섬강은 상업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영·정조 연간의 문인 정범조(丁範祖·1723-1801)는 (해좌집)라는 시에서 '밝은 등불 켜고 나무 끝 사이로 지나가니 / 아마도 한양에서 오는 배겠지. / 금년에는 소
[충북일보] '진천을 뜨겁게, 충북을 새롭게'를 주제로 펼쳐지는 충북 도민의 스포츠 축제인 63회 충북도민체육대회가 9일 진천군에서 화려한 막을 올린다. 총 26개 종목 5천여 명의 선수단이 손에 땀을 쥐는 승부를 선보일 이번 대회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진천군 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진행된다.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재난 상황에 2년 연속 대회가 취소돼 무려 17년이라는 세월을 거쳐 충북도민을 초대하게 된 진천군은 이번 행사를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감동과 창의의 대회로 선보이고자 작은 부분 하나까지 챙기는 세심한 준비 절차를 밟아왔다. 진천군이 준비한 감동과 창의의 도민 체전은 개막식 전날인 8일 펼쳐진 성화 봉송에서부터 시작됐다. 군은 충북도 최대 역점 사업인 레이크파크 르네상스 사업의 상징성을 부각하기 위해 역대 최초로 수상 채화 방식을 적용했다. 국내 최장의 무주탑 출렁다리인 '초평호 미르 309'를 배경으로 채화된 성화의 첫 봉송을 모터보트와 카누를 활용해 연출하는 등 색다른 볼거리를 선사했다. 채화 행사의 감동을 이어받아 9일 오후 5시부터 열리는 개막식 행사는 처음으로 공군 블랙이글스 비행단의 화려한 에어쇼가 파란 하늘을 수놓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 오송에 바이오의약품 소부장 특화단지와 첨단재생바이오 글로벌 혁신특구 유치에 성공한 충북도가 바이오 특화단지와 K-바이오 스퀘어 조성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로 자리 잡은 오송을 바이오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클러스터로 육성하기 위해서다. 바이오 특화단지는 올해 상반기 지정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며 예타 면제는 이때까지 실현시킨다는 목표를 잡았다. 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한 바이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공모에 도전장을 던졌다. 특화단지로 지정되면 신규 산단 조성 시 국가산업단지로 신속 지정 검토, 생산시설 신·증설 때 산업단지의 용적률 최대 1.4배 상향 등을 지원 받는다. 정부 연구개발(R&D) 우선 반영, 입주 기관에 대한 국·공유 재산 사용료와 대부료 감면, 예타조사 특례 적용 등이 주어진다. 이 같은 다양한 혜택이 바이오산업 육성에 큰 도움이 되는 만큼 유치전은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충북을 비롯한 11개 지자체가 뛰어들었다. 인천과 강원, 대전, 경북, 전북, 전남이며 경기는 수원과 성남, 시흥, 고양 등 4곳이 신청했다. 도는 지난달 30일 서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