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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이광

서간도 신흥학교 교장 출신… 임정 외교를 담당하다
청주 출생, 신민회 가입 계기로 본격 독립운동나서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회사 '폭탄의거' 적극 지원
임정 환국 후에도 중국에 남아 교포송환 문제 매듭
공비 습격으로 도청에 화재, 충북도지사직 물러나

  • 웹출고시간2015.10.18 17:51:14
  • 최종수정2015.10.18 15:42:14

충북도지사 재임 시절.

이광은 광복을 맞이한 후 귀국하여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충북도지사를 역임하였다.

이광(李光, 1879~1966)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망국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외교관련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3.1운동 이후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에는 이회영과 교류하면서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의거를 지원하기도 했으며, 광복 후에는 중국에서 한교선무단의 단장으로 교민보호에 앞장섰다. 1948년 귀국하여 충북도지사, 감찰위원장, 체신부장관을 역임했다.

◇신민회 동지들과 망명길에 오르다

이광의 호는 성암(星巖), 본관은 전주로 1879년 9월 30일에 충북 청주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범형(範珩), 어머니는 경주 김씨이다.

이광은 1907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본격 나섰다. 이 시기 대한제국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되어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2년 뒤인 1907년에는 헤이그특사를 계기로 광무황제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는 동시에 군대마저 해산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임시정부와 연합군 환영준비회 취지문(1945. 8). 설계부 실행위원으로 이광 명단이 들어 있다.

이광이 가입한 신민회는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독립운동단체였다. 1909년 양기탁의 집에서 개최된 간부회의에서 신민회는 만주지방에 민주정부와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기지를 확보하기로 결의했다. 이를 위해 신민회는 답사를 통해 랴오닝성(遼寧省)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 쩌우자가(鄒家街)를 목적지로 선정했고, 1910년 12월 이광은 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 등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만주에 도착한 신민회원들은 1911년 봄에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이광은 신흥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1912년에는 상하이로 이동하여 신규식(申圭植)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함에 따라 세계질서의 재편을 위해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이는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어 1919년 일본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때마침 승하한 고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독살설이 확산됐고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제수탈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이 폭발하면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광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

3·1운동 발발은 중국 지린과 상하이에 거류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지린의 독립운동 세력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는데, 이광은 39명의 독립운동가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려 당시 독립운동계에서 그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한편 상하이에서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성립되었다. 이광은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외무부 소속으로 활동했으며,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운영에 관여하기도 했다.

1921년 이광은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갔다. 조성환(曺成煥)·한세량(韓世量) 등과 함께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위원으로 임명되어 베이징주재 특파원으로 파견된 것이다. 이광은 베이징에서 중국과의 연락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그곳 교민들의 거주권 확보와 생활안정을 위해 활약했다.

1925년 이광은 허난성의 군벌 독판 호경익(胡景翼)의 행정고문으로 취임했는데, 이때 호경익으로부터 2~3,000원에 달하는 많은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광은 이 자금을 갖고 1926년경 텐진으로 가서 평소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이회영을 만나 그의 생계를 지원하는 한편, 상하이의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정화암 등 아나키스트들을 텐진으로 불러 자금을 나눠주면서 무기를 마련케 하였다. 이광의 자금은 상하이에서 권총과 폭탄을 마련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이렇게 마련된 무기들은 나석주가 1926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의거를 수행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대한대독립당주비회의 '조선지혈' 기자로 활동하다

이광이 기자로 활동한 대한대독립당주비회 기관지 조선지혈(朝鮮之血).

1926년 홍진과 안창호에 의해 중국 관내에서 촉발된 민족유일당운동은 1929년 들어 실패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면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박용태(朴龍泰)가 1930년 1월 텐진에서 대한대독립당주비회(大韓大獨立黨籌備會)를 결성했다. 아나키스트 유기석(柳基石)과 전 강화군수 한영복(韓永福) 등이 주비회에 가세한 가운데 당시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이광도 합류했다.

대한대독립당주비회는 '한국독립청년당'을 조직하여 학생단체를 운영했으며, 중국 각계의 인사들과 국내외 한인들로부터 자금을 충당하여 기관지 『조선지혈(朝鮮之血)』을 발간했다. ··조선지혈··은 박용태가 주간, 베이징의 유기석이 고문을 맡은 가운데 이광 등이 기자로 가세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창간호·제2호·제5호를 통해 기사의 내용을 보면, 주로 베이징과 텐진을 비롯한 국내외 소식과 일제의 침략상을 비판하고 독립을 위해서 민족이 단결하여 대항해야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후 이광은 베이징을 떠나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떤 경위에서 이광이 대한대독립당을 떠났는지, 언제 임시정부로 합류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광의 신분이 임시정부 베이징 주재 외교관이었던 점을 비추어보았을 때 임시정부 측에서 먼저 소환을 한 게 아닐까 생각되나, 한편으로는 1930년 5월 발생한 호서은행사건(湖西銀行事件)도 이광의 임시정부 복귀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이 된다. 이 사건으로 관내 아나키즘 세력이 타격을 입게 되고, 그로 인해 이회영이 상하이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한교선무단 단장으로 동포의 안전 귀국을 지원하다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1937년 7월 7일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여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전황은 중국에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중국 국민당정부의 수도였던 난징(南京)이 12월에 함락되고 말았다. 일제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임시정부 인사들도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임시정부 인사들은 11월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로 이동했는데, 임시정부에 합류한 이광도 함께 이동하여 후난성 외교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교선무단 명부(1945. 10). 이광이 화북선무단 단장겸 교무조 주임으로 되어 있다.

임시정부는 1938년 7월 광저우(廣州)로 이동했고, 12월에는 류저우(柳州), 1939년 4월에는 쓰촨성 치장(·江)을 거쳐 1940년 10월에는 충칭(重慶)에 도착했는데, 이 무렵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당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 내의 여당으로 활동하면서 임정 유지를 견인한 독립운동 정당이었다. 1944년 3월, 이광은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서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국에 남겨진 동포의 환국을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임시정부는 중국 교포의 보호와 생환을 위해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을 조직하여 10월부터 책임자를 임명하여 파견했다. 한교선무단은 화북·화중·화남 한교선무단으로 구분되었는데, 각각의 선무단은 단장을 중심으로 교무조·구호조·군무조로 조직되었다. 이광은 베이징 소재 화북 한교선무단의 단장겸 교무조 주임을 맡았으며, 휘하의 구호조 주임은 조성산(趙城山), 군무조 주임은 최용덕(崔用德)이 책임진 가운데 텐진·칭다오·타이위안·핑수이·따통·스자좡에 분단을 두었다. 이광은 중국 동북 일대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을 중국 정부 및 미군과 협상하여 팔로군(八路軍)으로부터 보호하는 활동을 했으며, 더 나아가 임시정부가 환국한 뒤 중국 정부와의 연락 업무 및 교포 송환문제 등을 처리하였다.

◇자랑스런 독립운동가 부자

광복 후에도 중국에 남아 교민들의 보호를 위해 진력하던 이광은 1948년에야 비로소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국내에 돌아온 이광은 1949년부터 고향인 청주에서 충청북도지사직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한국전쟁의 여파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1951년 5월 충청북도청이 북한군 잔당의 습격을 받게 되면서 그 책임을 지고 도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2년에는 오늘날의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감찰위원장이 되었으며, 1954년에는 체신부장관이 되었다. 1963년에는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의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1966년 사거했다.

이광의 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그 두 아들인 윤장(允章), 윤철(允哲)의 활약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윤장과 윤철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 항일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두 아들에게는 1990년 각각 애국장과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부자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한 것이다. 현재 윤장은 장손인 이두표와 서울에서, 윤철은 시흥에서 거주하고 있다.

/ 이용철(독립기념관 연구원, 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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