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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우덕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의사 처음으로 만나
이토 태운 기차 채가구역 정차 안해 저격 실패
국립현충원 묘비에 서울 출신으로 잘못 알려져
재판 과정에서 일관되게 "충청북도 제천 출신"

  • 웹출고시간2015.10.25 17:39:23
  • 최종수정2015.10.25 15:07:22

우덕순

ⓒ 독립기념관 제공
[충북일보] 우덕순(禹德淳, 1876~1950)은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에 참여한 충북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국내에서 을사늑약 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후에도 교육 및 의병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 충북 제천이 낳은 독립운동가

우덕순은 충북 제천 황석리에서 아버지 우시영(禹始映)과 어머니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이고, 독립운동 시기 우연준(禹連俊), 우홍(禹鴻) 등을 이명으로 사용하였다.

꼭 106년 전 오늘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역(哈爾濱驛)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였다. 이 때 하얼빈역 바로 전 역인 채가구역(蔡家溝驛)에도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대기한 독립운동가가 있었으니, 그가 우덕순이다. 그런데 안중근의 동지인 우덕순이 충북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가 서울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서울 국립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도 서울 출신이라고 적혀있어서, 이러한 오해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오해의 시작은 우덕순이 하얼빈 의거 이후 첫 조사를 받을 때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답변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첫 조사에 대한 진술은 안중근, 우덕순 모두 거짓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어서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을 펼쳤기 때문으로, 우덕순은 이후 계속되는 심문에서 일관되게 충청북도 제천 출신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현재 서울 국립현충원 묘비에 적혀있는 그의 출신지는 충북 제천의 오류이다.

◇ 을사늑약 이후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다

우덕순은 4~5세경 서울로 이주한 후 동대문 근처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면 생활하였다.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던 우덕순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계기로 변화하게 된다.

상동청년회가 있던 상동교회 건물

ⓒ 독립기념관 제공
그는 1905년경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였다. 1904년 조직된 상동청년회는 민영환(閔泳煥), 이상설(李相卨), 이시영(李始榮), 이준(李儁), 이회영(李會榮) 등 고위 관료들이 후원하고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淳萬), 김구(金九) 등 여러 우국지사들이 활동하던 단체였다. 을사늑약이 강제될 무렵에는 주도적으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을사오적 암살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을사늑약에 대한 강력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던 상동청년회의 회원이었던 그가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우덕순은 하얼빈 의거 이후 조사에서 그가 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은 을사늑약 이후였음을 밝히고 있다.

" … 이등(伊藤)이 한국에 통감(統監)으로 와서부터 오개조(五個條, 을사늑약)의 조약(條約)을 만들어 … 나는 그 오개조의 조약이 성립한 이래 이등을 살해(殺害)하려는 생각을 … " (제3회 신문조서(訊問調書) 1909년 11월 25일 답변에서)

이를 통해 볼 때 우덕순은 1905년 강제된 을사늑약이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을사늑약 반대운동을 전개하던 상동청년회는 1908년 결국 해체되었고, 관련 인사들 중 일부는 해외로 망명을 떠났고, 우덕순도 이 무렵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떠났다. 담배 장사 등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생활이 매우 빈곤하였으나 민족주의 계열의 학교인 계동학교(啓東學校)와 한민학교(韓民學校) 등의 교육기관이 설립될 때, 소액이나마 의연금을 납부하기도 하였다.

◇ 안중근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다

우덕순과 안중근이 함께 수감생활을 하였던 뤄순 일아감옥 전경

ⓒ 독립기념관 제공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는 이범윤(李範允)이 의병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우덕순은 이범윤 부대에서 활동하였고 여기서 안중근을 처음 만나 의병 활동을 함께 벌였다.

1908년 5월경부터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홍범도(洪範圖)는 군수물자 부족 등 장애에 부딪치자 이범윤 부대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우덕순은 안중근과 함께 이 해 6월 홍범도를 지원하기 위하여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회령 삼태골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은 의병은 패퇴하고 국내진공작전은 실패하였으며, 우덕순은 안중근과 퇴각하던 중 헤어진다.

우덕순의 회고록에 따르면 퇴각 중 그는 신발이 없어 맨발로 산을 헤맸고, 비가 와서 추위에 떨었으며, 퇴각 중 몇 일 동안 음식을 제도로 섭취하지 못하는 등의 고생을 겪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생을 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퇴각하던 우덕순은 일본군에게 검문을 받게되었다. 당시 우홍이라는 이름으로 의병활동을 하고 있던 그는 소지품에서 우홍이라는 도장이 발견되면서 체포되었고, 함흥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을 받던 중 그는 같은 감옥에 있던 동료들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하였고, 원산을 거쳐 1909년 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 "코레이시케 우라(한국 만세)"

우덕순이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채가구역

ⓒ 독립기념관 제공
우덕순은 1909년 봄, 안중근은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이 무렵 그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체프(КоковцовВ. Н.)와 회담을 가질 것이라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안중근은 이토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처단할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1909년 10월 20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에서 우덕순은 러시아인으로 사장인 미하일로프, 유진율, 이강, 정재관, 윤일병 정순만, 안중근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안중근이 자진하여 실행 책임을 맡았으며, 우덕순에게 이 거사에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다. 안중근의 권유를 받은 그는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토 처단의거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다음 날 21일 안중근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우덕순은 유동하(劉東夏)와 조도선(曺道先)을 통역으로 합류시켰다.

23일 저녁 하얼빈에 있는 김성백의 집에서 안중근과 우덕순은 서로의 각오를 다지면서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를 짓고, 우덕순은 한글로 거의가(擧義歌)를 지어 답례하였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인 너를 만났도다. … "로 시작하는 우덕순의 거의가는 식민지 아래에서 독립운동의 방법을 가장 절실한 언어와 정서로써 일깨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0월 24일 우덕순은 조도선과 함께 채가구역에서 이토을 기다리기로 하였고, 안중근은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역에서 대기하기로 하였다.

탄두에 十字가 새겨진 총알

채가구역에 있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역 지하에 위치한 찻집에서 숙박하였다. 찻집은 위쪽이 채가구역의 플랫폼으로 연결되어 있어 의거를 실행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10월 25일 저녁부터 채가구역에서는 다음날 도착할 이토를 맞이할 환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우덕순은 그를 처단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이토를 처단하기 위하여 준비한 탄환은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사용하였던 것과 같이 탄두에 十자형 흠이 새겨져 있었다.

이토가 도착하는 10월 26일 우덕순은 새벽 5시경 일어났다. 러시아 헌병들은 국적과 이유를 불문하고 채가구역에 대한 출입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우덕순은 출입을 막는 러시아 헌병에게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그가 있는 찻집에서 화장실로 가기 위해서는 채가구역내의 플랫폼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화장실을 갔다 온다는 핑계로 이토를 처단할 기회를 노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헌병은 그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덕순은 채가구역 지하의 찻집에서 이토가 타고 왔던 기차가 들어오고, 다시 출발하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토도 당초 우덕순의 기대와 달리 채가구역에서 내리지 않고 떠났다. 우덕순은 숙소 안에서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성공하기만을 기원하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0시경 러시아 헌병에게 급작스럽게 체포된 그는 이토가 안중근에게 처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코레이시케 우라!(한국 만세)"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기뻐하였다.

◇ 의거 이후의 삶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후 우덕순은 안중근 등과 함께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힌 후 일본에게 인계되었다. 뤄순으로 압송당한 우덕순, 안중근 등은 뤄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은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는다.

우덕순이 재판을 받언 뤄순관동법원 전경

ⓒ 독립기념관 제공
안중근과 함께 뤄순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우덕순은 그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만나기를 소원하였으나, 계속 미루어져 결국 만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점심 무렵 감옥 내의 교회당으로 불려간 우덕순은 안중근의 시신이 담긴 관을 확인한다.

1913년 약 3년간의 옥고를 마치고 출옥한 우덕순은 다시 하얼빈으로 이주하여 전로한족중앙회, 의열단 계열 판의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우덕순은 동포 100여명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안중근 기념사업이었다. 추모회를 개최하고,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등 동지 안중근을 기리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해방 후 혼란한 시국에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국민연맹, 대한국민당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북한으로 끌려가던 중 사망하였는데 향년 75세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업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우덕순은 하얼빈 의거에 참여하였던 4명 중에서 살아서 해방을 맞이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지니고 있는 상징성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재 그는 잊힌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다만 고향인 제천에서 몇 년 전부터 그를 기리는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아직 미비하다. 이제부터라도 그에 대한 다양한 학술연구와 기념사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홍일교(독립기념관 학예사, 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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