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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9.09.26 15:46:09
  • 최종수정2019.09.26 19:32:20

강성일

충북시인협회

 나는 종갓집의 대종손으로 태어났다. 내 나이 30세란 젊은 나이에 가정 살림의 모든 책임을 맡게 되니 앞날이 막막했다. 아직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동생들의 학업 문제와 집안의 경제적 뒷받침도 큰 걱정이지만, 종갓집의 대종손의 역할에다 건강이 쇠약하신 어머님을 모셔야 하고 거기에다 아내와 내 자식까지 도맡아 살아갈 생각을 하니 어깨가 무겁고 앞이 캄캄했다.

 매월 받는 교사의 월급으로 많은 식솔들을 어떻게 감당해 나갈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걱정이 태산과 같았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사는 동안 산도 만나고 파도도 만나는 험한 길도 있겠지만, 아름다운 꽃길을 만나는 순탄하고 행복한 길도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집안 전체를 살피다 보니 우리 가족은 항상 셋방살이 신세를 벗어날 기회가 없었다. 단 칸 방에서 두 칸 방으로 몇 번을 옮겨 다니며 살다보니 내 집 한 채 장만한다는 것은 아주 포기한 채 내 평생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때 당시 얼마나 경제 형편이 어려웠으면, 나는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다. 남동생 대학 수업료가 없어 아내의 결혼 패물을 모두 팔아 학비를 해결했던 마음 아픈 추억도 있다.

 일 년에 기제사가 8번이고 설 명절과 추석 명절까지 합쳐 십여 번의 행사를 치루고 있다. 매월 한 번 격으로 제삿날이 돌아오니 참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았다. 시장에 가서 제사 흥정을 하여 준비해 오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승용차가 없어 매번 아내와 같이 제물을 양손에 들고 다녔다. 제사상에 올리는 제물 값도 그렇지만, 형제가족들이 먹을 음식장만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형제 조카들이 다 모이면 집이 비좁아 앉아 있을 공간이 없어 서로가 매우 불편했다.

 사람들은 요즈음 누가 제사를 4대 봉사까지 하는 집안이 어디 있느냐고 하며 제사 방식을 간단히 바꾸라는 소리를 했다. 시대가 변한 만큼 봉건사상에서 벗어나 현 시대의 흐름에 따라야 한다는 말을 했다. 모든 제사를 한 날로 잡아 일 년에 한 번만 지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가문의 전통 예법을 어찌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있는가. 대의적으로 보면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인간 모두가 하나님 곧 창조주의 아들딸이 아닌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공경의 대상이 되어 세배 같은 절을 하고 돌아가시면 마귀가 된 것으로 판단해 절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효도 관념의 타당성과 합리성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방식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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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