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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화백 탄신 100주년 - 생전 주변 인물들이 회고하는 운보

아이 같이 순수한 웃음으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 웹출고시간2013.07.25 20:07:5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3. 생전 주변 인물들이 회고하는 운보

운보의집 전경

운보 김기창 화백이 말년을 보낸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운보의집에는 늘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지인들도 많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만의 사연을 남기고 또 엮어간 곳이기도 하다.

김기창 화백이 평소 지인과 나눈 필담.(왼쪽) 이당사모님과 이당의 제자 (앞줄 오른쪽), 김형태 관장.

어릴 때 장티푸스를 앓아 농아가 된 그는 서툰 말씨로 방문객들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속 깊은 이야기는 필담으로 나눴다. 운보를 본 첫 인상은 '호랑이'에 비유됐다. 임병무 수필가(전 충북일보 논설위원)는 "호랑이 얼굴에 빨간 양말을 신고 파이프를 문 모습에서 예술가의 정열과 멋이 저절로 배어나왔다"고 했다.

생전 운보와 남다른 인연을 가진 김형태(전 운보미술관장) (사)국제장애인문화교류충북협회장, 강호생 충북미술협회장,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이 소중한 추억을 더듬었다.

◇김형태 전 운보미술관장

"평소 삶 속에서는 장애로 인한 마음의 상처 '동물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애정 쏟아"

운보와의 첫 대면은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운보전을 크게 할 때다. 서울에서 소규모 갤러리 전시 기획을 하던 나는 미술관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전시 기간 동안 이틀에 한번 꼴로 전시장을 들렸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 오듯 땀 흘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때마다 나는 흰 고무신을 벗겨 발을 편하게 하고 발 받침대를 만들어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이런 이야기를 몇 번들은 아들(김 완씨)은 나에게 청주에서 아버지를 모셔줄 수 있느냐고 제안했다. 공주가 고향인 나는 낯설음으로 제안을 거절했다. 며칠 뒤 아들은 다시 나에게 제안을 했고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청주에 오게 됐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10년 이상을 그림자처럼 옆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가까이서 운보를 보필했다. 2001년 운보의집에 차려진 빈소에서도 나는 상주를 맡아 가시는 길까지 모셔드린 셈이 됐다.

운보는 평소 동물들을 좋아했다.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을 지녔지만 평상의 삶 속에는 장애로 인한 무시와 배신 등 마음의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 집에는 사슴을 비롯한 칠면조, 오골계, 토끼, 금계, 은계, 꿩, 공작, 닭 등을 키웠다. 사슴은 운보가 사회복지사업에 열중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영부인 이순자 여사와 동생 전경환씨가 서울의 복지회관에 청음버스를 마련해 주고, 운보의집을 방문하면서 어린 사슴 한 쌍을 선물로 가져 왔다고 한다.

운보의집을 찾은 많은 지인들 중 고인이 된 마라톤 영웅 손기정 옹이 생각난다. 1년에 한 번씩 들렀는데 황영조 선수를 데리고 온 적도 있었다. 두 분은 무슨 사연인지 만날 때 마다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기에 주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면서 숙연해 지곤 했다.

운보는 청각장애로 인해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말뜻을 오해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이처럼 순수하셨으나 그림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셨고 옳지 못한 일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또 너무 인정이 많아 맛있는 것을 먹을 때는 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진귀한 음식을 나눠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강호생 충북미술협회장

"위풍 당당한 체구·빨간양말·모자·지팡이·담뱃대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나는 대학교졸업 후 운보를 처음 만났다. 1987년 동숭동 대학로의 문예진흥원에서 전시회 치르고 있을 때 운보가 방문을 한 것이다. 서로 대화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진의를 느낄 수 있었다. 위풍당당한 체구와 특유의 빨강양말, 모자, 지팡이, 담뱃대 등의 모습은 함께 기념 촬영한 사진이 있기에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도 처음 뵙게 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거장을 대할 때 짐짓 생각하는 거리감이나 위압감 등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순수하고 맑은 어린애 같은 음성과 잔잔하고 투명한 대화에 선입견적 격식은 온데간데없었다. 운보 역시 백남준 선생에게 느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름 이들의 세계에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으로서 큰 위안과 용기를 얻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얼마만인가. 전통 채색화부터 서구의 모더니즘 회화까지 동서미학을 넘나들며 한국 근대미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우향 박래현 선생의 회고전이 호암갤러리에서 열렸다. 아내를 잃은 그 심정이 지금도 전달이 된다. 전시회를 보고 밖으로 나왔는데 운보가 대리석 둔덕에 걸터앉아 있었다. 다가가고 싶었지만 순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팡이를 지탱하고 있는 힘없는 팔과 빨강양말에 흰 고무신을 신고 다리를 포개 앉은 처량함은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 옆에는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고 오로지 홀로만 그 자리에 천금 같은 무게감으로 땅을 응시하고 있었다.

운보 타계 후 잠깐 동안 운보재단의 일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수많은 책과 생전의 그림도구들을 정리하면서 여전히 들리는 운보선생님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림 그리는 것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나 역시 선생의 그림사랑과 책사랑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문 서적과 많은 도록의 정리 자체만으로도 배움의 충동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 깜짝 놀란 것은 말과 듣기를 대신했던 운보선생의 필담이다. 상당량의 필담 등은 참으로 소중한 자료이기에 고이 다시 싸서 잘 보관했다. 반면 미술관에 남아있는 작품 수는 너무도 적었다. 다재다능함을 익히 알 수 있듯 초기의 사실적 작품의 구상미술시기, 예수의 생애를 담은 신앙시기, 청록산수 및 바보산수시기, 말년의 추상시기 등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탄생 100주년이 된 지금도 우리는 이 여운 속에 그리움으로 그 이름 '운보'를 부르고 있다.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세상의 많은 소리를 듣고 누구보다 많이 생각했던 것을 그림으로 그려내"

만남은 선하다. 누구에게나, 어떤 만남이든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 같지만 우연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없었다. 모든 만남 속에는 앙가슴 뛰는 묘한 떨림이 있고, 축복과 감동이 있으며, 시리고 아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하여 만남은 그 자체가 내 삶의 마디마디이며, 인생이라는 거대한 서사시를 쓸 수 있게 한다.

운보 김기창 화백과의 만남도 내 삶의 작은 마디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더 큰 세계의 이야기를 붓끝으로 전달했다는 예술가로서 운보가 아니라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기자라는 신분으로 취재를 위해 운보를 만났을 때 악동 같은 맑은 웃음으로 내 손을 꼬옥 잡아준 것을 잊을 수 없다. 햇살이 정원에 가득 쏟아지던 늦은 봄 어느 날, 당신은 말 대신 붓 끝으로 세상의 풍경을 담아보겠다며 툇마루에 앉아 화선지에 검은 물감을 거침없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일필휘지(一筆揮之). 한 일(一)자를 10년 쓰면 붓끝에서 강물이 흐른다고 했는데 그는 온 몸의 근육과 심장이 정지된 것처럼 무위의 표정으로 대자연의 속살을 하나 둘 펼쳐보였던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그 풍경 앞에서 나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온 몸이 사위어가는 것처럼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먹물 하나로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세계를 표현하다니, 그 몰입의 순간이 경이로울 뿐이었다.

두 번째 만남은 가수 서유석씨와 형동리의 한 식당에서 식사 중에 만났다. 당신은 토속적인 음식에 담백한 맛을 즐겼다. 우리 일행을 보자마자 반갑다며 함박웃음을 피우는데 식당 안이 그 때묻지 않은 표정으로 가득 빛났다.

그리고 당신의 팔순생일에 초대를 받지 않았던가. 운보의집 정원에서 100여명의 손님들과 일일이 인사하며 보름달처럼 둥글고 평화로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다니긴 했지만 그의 눈과 표정은 분명하고 명료했다.

세상의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이야기를 말로 한다고 다 하는 것이 아니다. 운보는 나보다 더 많은 세상의 소리를 듣고, 더 많은 말을 하며, 더 많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단지 운보는 그 모든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림 작업을 할 때의 집중력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반면 자연을 벗 삼아 휴식을 취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더 없는 악동이었다. 내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알려준 사람이었다.

/ 김수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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