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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화백 탄신 100주년 - 그는 누구인가

한국화단의 거목 운보 김기창 화백을 말하다

  • 웹출고시간2013.07.11 18:31:5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 운보(雲甫), 그는 누구인가

생전 운보 김기창 화백이 한 손에 붓을 들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 참고 자료 :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올해는 운보(雲甫) 김기창(1914년 2월18일~2001년 1월23일) 화백의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다.

후천성 청각 장애로 말 대신 붓으로 세상과 소통한 그는 열정적인 작품 활동으로 한국화단의 거목이 됐다.

이당 김은호를 스승으로 자신만의 감성과 개성을 살린 독특한 기법을 구사했고,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롯이 화가의 이름으로 약 2만 여점의 작품을 내놓았다.

본보는 운보 탄신 10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작로서의 활동, 작품세계 등에 대해 모두 11회에 걸쳐 조명한다.

△운보의 생애

운보가 유년기에 찍은 가족사진으로 왼쪽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있다.

ⓒ 참고 자료 :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운보는 1914년 2월18일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당시 총독부 토지관리국 직원이던 아버지 김승환씨와 금은상을 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어머니 한윤명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장남으로 호적에는 1913년생으로 기록됐으나 생전 본인은 1914년을 출생년도로 회술했다.

운보가 태어나던 무렵 아버지는 총독부를 나와 금광을 찾아다니던 사업가가 됐다.

운보는 생후 한 달도 채 못돼 호흡 곤란으로 죽음과 맞닥뜨린 생애 첫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7세 때 서울 인사동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입학식 바로 다음날 전교생이 함께하는 소풍 겸 운동회에서 심한 오한에 걸리게 된다. 오랜 기간 고열에 시달려야 했던 그는 열을 내리기 위해 온갖 약제를 다 써보고도 별 차도 없이 한 해를 넘겼다.

의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해 전염성 장티푸스에 걸린 것을 모르고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이듬해 8세가 된 여름 날, 고열에 시달리던 그가 정신을 차렸다. 누워있던 그가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분명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에게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열에 의한 청신경 마비로 후천성 귀머거리가 된 것이다.

청각마비로 인한 언어장애를 겪는 그에게 아버지는 비교적 말을 할 필요가 없는 목수가 되길 희망했다.

그러나 그를 보는 어머니는 달랐다. 일찌감치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수소문 끝에 그가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에게 동양화를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운보는 이당에게 그림을 배운지 반년 만에 1931년 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판상도무(板上跳舞)'라는 작품으로 첫 입선을 하게 됐다.

이후 1940년까지 6회 동안 입선, 특선 3회를 기록해 한국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이를 계기로 운보는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 참고 자료 :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2년 뒤인 1942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본과에서 동양화를 공부하던 우향(雨鄕) 박래현 화백이 당시 화단에서 주목받던 운보에게 인사를 오게 된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던 그들은 3년간의 필담연애 끝에 1946년 백년가약을 맺는다.

부부화가가 된 운보와 우향은 예술적인 면에서도 서로 도움이 됐다. 각자의 화풍을 존중하고 보다 폭넓은 작품 활동으로 승승장구했다.

작업실에서 나란히 앉은 운보 부부가 환하게 웃고 있다.

1968년 운보가 55세인 해 뉴욕에 체류하며 '태양을 먹은 새', '나비의 꿈' 등을 제작해 L.A 부부전을 열었다.

앞서 운보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1955~1961)과 수도여자사범대학(1962~1974, 현 세종대)에서 교수로도 활동했다.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한 이후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타이베이(台北)와 홍콩에서 열린 한국미술전, 도쿄(東京)·마닐라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출품하는 등 1969년 재차 도미해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질 때까지 해외에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운보가 말년을 보낸 청원군 '운보의집'

운보가 말년을 보낸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위치한 운보의집 전경이다.

ⓒ 충북일보 DB
1981년 한국화단의 거목인 운보가 청주에 왔다.

만년에 낙향할 곳을 물색하던 중 어머니 한윤명 여사가 묻힌 청원군 북일면 형동리 당산마을을 택한 것이다. 어머니의 묘소가 보이는 곳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당산마을에는 이내 대궐 같은 작업실이 들어섰다. 마당 남쪽에는 연못이 조성돼 비단잉어가 헤엄을 쳤고, 집 뒤로는 운향(雲鄕)미술관이 들어섰다.

'운보의 집' 행랑채 모습.

'운향'이라는 미술관이름은 자신의 호 '운보'의 머리글자와 먼저 세상을 뜬 아내 우향 박래현 여사의 호를 합친 것이다.

주위에는 도자기 공방과 분재공원, 수석공원, 조각공원 등도 들어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운보 타운'이라고 불렀다. 운보 타운은 단번에 관광명소로 부각됐다.

전국 각지에서도 관광객과 미술 동호인이 몰려왔고 청주를 찾는 중국관광객들도 이곳을 필수코스로 들렀다. 뿐만 아니라 신혼부부의 야외사진촬영지로 유명세를 얻었다.

관광객들은 운보의 집과 미술관에서 운보의 예술혼을 만끽했고 재수가 있으면 운보의 작업광경을 볼 수도 있었다.

호랑이 같은 인상에 빨간 양말을 신고, 파이프를 문 운보의 모습에서 예술가의 정열과 멋을 느낄 수 있었다.

운보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이곳은 충북의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전국적인 명성을 이어갔다.

/ 김수미기자

<참고 자료 :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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