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사(故事)에 당나라의 도림선사(道林禪師)와 백거이(白居易: 字-樂天, 號-香山)의 일화에서 인생의 진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도림은 진망산(盡望山)소나무 위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수행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시인이며, 높은 관직을 가진 백거이가 어느 날 도림이 수행하고 있는 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도림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 높은 곳에서 수행하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습니까· 실수로 떨어지면 크게 다치지 않겠소" 도림은 웃음 띤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보다는 그 쪽이 훨씬 불안해 보입니다. 그렇게 계셔도 괜찮습니까·" 백거이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소나무 위에 있는 선사(禪師)보다 땅위에 있는 내가 더 위험하다고 하는 것은 선사는 이미 생명의 무상함과 변화가 많은 세속을 떠나 있지만, 나는 변화가 많은 세속에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주변에는 항상 음모, 시기와 질투 등 위험한 요소가 많아서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 백거이가 수도를 떠나 지방인 항주에 온 것도 권력투쟁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이 더 위험하오."라고 말한 선사의 한 마디가 백거이의 가슴을 찌른 것입니다. "괜찮지 않을게 무엇이오· 나는 높은 관직에 드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소. 불안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그러자 도림은 백거이 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 높은 벼슬과 명성의 자리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면 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고통과 상처를 얻게 될 텐데 어찌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도림의 말을 듣고 백거이는 당황해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불안을 떨치기 위해 어찌하면 좋겠소·"도림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항상 착한 일과 좋은 일만 하면 됩니다. 나의 대답이 너무 뻔하다. 생각 할 수 있겠지만, 항상 착한 일과 좋은 일만 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미 인생의 진리를 다 알고 있습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할 것','고마운 일에 감사할 것',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을 할 것'등 평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평범한 진리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나간다면 인생의 진리를 맛 볼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날마다 한 시간씩이라도 정진하는 생활을 습관화해야 합니다. 혹자는'감사할 일이 있어야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요·'라고 할지 모르만 마음만 고쳐먹으면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선 우리가 생명을 유지 할 수 있도록 자연은 무상으로 공기와 물과 햇빛을 제공해 주지 않나요· 이렇게 대자연이 베푸는 은혜는 너무 커서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대자연은 어떠한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우리가 대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해 주는 자연을 훼손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자연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면 어떨까요· 하루 세끼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뙤약볕에서 땀 흘려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감사하고, 거친 파도와 싸우며 해산물을 제공해 주는 어부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때라도 없으면 불편하다고 한숨짓는 생활필수품을 생산하여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산업역군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먹으면 감사할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행복해 지길 원합니다. 항상 감사하는 생활습관은 사소한 일에도 만족함을 느낄 수 있고,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맛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례(古禮)에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성년(成年)의 예(禮)를 성대하게 치렀는데 이를 남자는 관례(冠禮), 여자는 계례라 해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첫 관문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관례는 사라졌는데 향교나 대학교, 군부대, 자치단체 등에서 성년식을 치러주어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1973년부터 1974년에 걸쳐 각각 4월 20일에 성년의 날 기념행사를 하였으나 1975년부터는 청소년의 달인 5월에 맞추어 날짜를 5월 6일로 바꾸었다가 1984년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5월 셋째 월요일에 성년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의식은'성인식'또는'성년식'이라고 하는데 만 19세가 되는 성인에게 의례를 베풀어 어른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축하해 주고 있습니다. 옛날에는'관례'와'계례'를 묶어서'성년례'라고 했고, 성년례는 남녀가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곡식이나 과일에 비유하면 익었다고 보아 미성년에서 성년이 되면 어른 대우를 해 주는 의식을 치러주었던 것입니다. 남자는 보통 열다섯에서 스무 살 사이에 땋았던 머리를 풀고 상투를 틀어 관을 쓰면서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여자는 보통 열다섯 살에 머리카락을 감아 올려 비녀를 꽂으며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오늘날에는 만 열아홉 살이 되면 특별한 의식을 치르지 않고도 성인으로 대우해 줍니다. 성인이 된 사람은 나이에 걸 맞는 행동을 해야 하며 모든 일을 스스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 신체와 머리카락과 피부는 모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 하여 효경(孝經) 개종명의(開宗明義)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림으로써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이다. 무릇 효는 부모를 섬기는 데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 과정을 거쳐 몸을 세우는 데서 끝나는 것이다.(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夫孝, 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 그래서 머리털을 자르지 않았고 수염도 길렀던 것입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댕기머리를 하다가 상투를 틀어 올리고 검은색의 베로 만든 치포관(緇布冠)을 썼습니다. 외출 할 때는 갓을 썼고 예복에는 유건(儒巾)을 썼습니다. 관례는 평상복을 입는 시가례(始加禮 ), 외출복을 입는 재가례(再加禮), 예복을 입는 삼가례(三加禮)를 하였고, 성인이 되어 술 마시는 법을 배우는 초례(醮禮)를 치렀습니다. 부모님이 내려주신 존명(尊名)은 존귀하게 여겨 아무나 부르지 않기에 새로운 이름을 지어 관자에게는 자(字)를 계자에게는 당호(堂號)를 내렸습니다. 아명(兒名)을 쓰다가 성인되면 어른의 이름을 지어주는 절차인 자관자례(字冠者禮)를 하였습니다. 성년례 의식이 모두 끝나면 사당에 고하고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돌잔치는 거창하게 하면서 성인이 되는 의식을 치르지 않는 어른들이 대부분이라서 어른다운 어른이 보이지 않는다는 쓴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무엇보다도 예(禮)를 중요시 하였고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올해 성년이 되는 젊은이들에게 어른 됨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어른으로서의 독립된 인격체가 되었으니 의무와 책임을 다하여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되도록 노력할 것을 주문하고 싶습니다.
엊그제가 어린이날이었고 내일이 어버이날입니다. 오월을 가정의 달이라 하고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들어있는 한주(週)를 가정주간이라 하는데 부모가 계시고, 자녀를 키우는 30~50대 세대들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자녀를 키우면 어린이날 무슨 선물을 해주고 어떻게 놀아 줄까·를 걱정해야 하고, 대부분 부모와 떨어져 살지만 어버이날이 되면 맛있는 식사대접을 해드리고 용돈이라도 드리려면 마음에 걱정이 앞설 것입니다. 친부모는 물론 처가부모님들도 신경을 써야하니 허리가 휜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가정주간입니다. 사실은 생각을 달리하면 어린 시절 부모님이 키워주신 사랑을 되갚는 것이고, 지금 아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노년이 되면 자식들에게 받을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 어쨌든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아래 위를 공경하고 사랑하느라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습니다. 필자의 자녀와 조카들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되면 이 두 행사를 묶어서 온 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하며 화목을 다져오다가 가끔씩 휴양림의 방을 빌려서 1박 2일 가족행사를 하며 친척의 정을 나누고 화합을 다져오고 있습니다. 올해는 괴산군에서 아름답게 가꾼 성불산 산림휴양단지 안에 있는 한옥체험관에서 30여명의 온 가족이 모여 1박을 하며 가족의 따뜻한 정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아들딸과 4촌까지 모임을 만들어 매월 회비를 모아 계곡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오거나 겨울엔 스키장에 모여 설경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습니다. 이런 모임이 없다면 친척의 정도 멀어지고 우리 전통의 아름다운 가족제도가 허물어져 가고 있는데 정말로 좋은 모임을 갖고 있어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과 어린 증손자들의 재롱을 보고 함박웃음을 웃으시던 구순을 넘기신 노모께서는 건강이 안 좋으셔서 올해는 가족행사에 참석을 못하시고 요양원에 계시니까 마음이 아프고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집안에 어르신 한분이 계셔야 구심점 역할을 하는데 얼마나 우리 곁에 계실지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어버이날이 다가오니 전에 읽었던 글이 떠오릅니다. 시골에 사시는 어느 노부부가 어버이날이 되어 이웃집엔 자가용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 혹시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찾아 올까하는 마음으로 동구 밖에 나와 앉아 기다려도 자식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추 모를 심으려다 어버이날이니까 하루 쉬자며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한 딸과 사위가 아버지가 좋아하는 쑥버무리를 쪄서 따뜻할 때 드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옛 말씀에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지요. 잘 된 자식들은 시간을 못 내서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하고 용돈만 부쳐온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자식얼굴을 직접보고 귀여운 손자를 안아줄 때가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데 말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자식이 용돈을 줘도 못쓰고 그 돈을 모아 두었다가 손자들 용돈으로 쥐어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주자 십회훈(十悔訓)에도 '不孝父母 死後悔'가 으뜸 이듯 부모님 살아생전에 효도하지 아니하면 돌아가신 후에 후회한다고 했지요.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아요. 살아생전 잘 모셔야 그것이 효도입니다. 어버이날이 되어 딸네 가족이 찾아오면 반갑지만 사위에겐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아들 두신 부모님 마음이 서운하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만약 지구가 멸망하게 되어 지구를 떠나 가야할 때 지구에서 갖고 갈 것은 오로지 딱 하나 그것은 한국의 효도(孝道)문화다." 라고 토인비가 한말이 떠오르는 어버이날 전날입니다.
지금부터 450년 전인 1569년 음력 3월 4일 따뜻한 봄날에 퇴계 선생은 69세의 연세로 벼슬에서 은퇴하여 마지막 800리 귀향길에 오르셨습니다. 곁에 두고 멘토로 삼고 싶었던 선조임금도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강한 귀향의지를 존중하여 귀향길을 허락하셨습니다. 경복궁을 나서 동호 몽뢰정에서 1박을 하고 배를 타고 봉은사에 도착하실 때 조정의 동료와 한강변에 운집한 백성들도 아쉽지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께서 어떤 마음으로 귀향하셨는지 되새겨보는 재현행사가 지난 4월 9일 서울 봉은사를 출발하여 도산서원까지 11박 12일간 대장정으로 엊그제(21일)막을 내렸습니다. 이번 행사는 도산서원 원장(김병일)이 재현단장을 맡아 24명의 실무진행 팀과 참여자 23명(유학자, 선비수련원, 도산서원 참 공부모임)으로 의관을 갖춘 선비복장을 하고 걸으면서 참여했습니다. 행사 날짜도 450년 전 귀향길에 맞추어 봄 향기 짙은 남한강 옆 강변길을 봄꽃들이 어우러진 충주, 청풍, 단양을 거쳐 죽령 옛길을 선생께서 이동하신 노정(路程)에 최대한 접근하여 이동하였습니다. 4월 9일 오후 2시 봉은사 보우당에서 개회식에 이어 퇴계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의 의미라는 주제로 국제퇴계학회 이광호 회장의 강연과 걷기문화의 우리시대 전통을 위하여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재현행사 노정을 살펴보면 봉은사→미음나루→한 여울→배개 나루 → 흔바위 나루 →가흥창(목계나루)→충청감영(충주)→청풍관아→단양향교→풍기관아→영주 두 월리→안동 도산 삽골재→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하여 고유(告由)를 하고 기념강연을 한 다음 폐막식을 가졌습니다. 내륙뱃길 항구역할을 했던 우리고장 목계나루까지 선조께서 내주신 배를 타고 오셨고, 남은 길은 말을 타고 가셨다고 합니다. 행사 5일 째는 유홍준 교수와 남한강 따라 걷기, 충청감사의 퇴계 선생 영접해설을 듣고, 가흥창이 있었던 가흥초 근처에서 묵었습니다. 6일 째는 이상기 중심고을원장의 안내로 중원문화재를 관람한 다음 충청감영의 건물이 남아있는 관아공원으로 이동하여 4시부터는 바로 옆 문화회관에서 충청감영행사를 했는데 필자도 충주향교유림의 일원으로 퇴계 선생 귀향길 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공연행사로 도산12곡의 언학(言學)부분의"그분들이 가신 길"한글가사에 충남의대 김종성 교수가 곡을 부쳐 기타반주로 연주하였습니다. 충청감사 송당 유홍(兪泓)과 퇴계(退溪)선생의 시(詩) 창수(唱酬)를 이갑규 교수가 낭송하고 해설까지 하였습니다. 강연은 허권수(경상대학교 명예교수)가 "형제지기 온계(溫溪)선생과 퇴계(退溪)선생"이란 주제로 고향에서 수학(修學)하고 같은 조정에서 관직에 있으면서 남다르게 우애가 두터웠던 형제문신(文臣)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두 번째 강연은 "퇴계 선생의 삶과 정신"이란 주제로 성균관 대 이기동 명예교수께서 하였습니다. 필자와는 유학대학원 원장시절 유림지도자과정을 하면서 강의를 많이들은 터라 친근감이 들었습니다.'한 나무가 여러 나무로 되는 경우'로 같은 뿌리로 모두가 하나로 한 마음으로 영원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군자가 되어 참된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물러날 때를 아는 퇴계 선생의 경(敬)의 선비정신을 본받고 우리의 정신문화의 가치를 되살려 세계에 우뚝 서는 한국인이 되자고 할 때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우리사회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인성이 황폐해지고 있으므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학문을 완성하신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인성회복운동에 동참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뜻 깊은 재현 행사였습니다.
만우절(萬愚節)로 시작되는 4월이 열린지 상순(上旬)을 지나고 있다. 앞산 뒷동산에는 개나리 진달래가 봄소식을 안고 사뿐히 찾아왔는데 꽃샘추위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먼 산에는 노파의 머리처럼 춘설(春雪)이 희끗희끗하고 심술쟁이 봄바람은 양쪽 볼을 때리며 스치고 지나간다. 미세먼지까지 숨 막히게 하는 회색하늘만 보이는 봄철이다. 4월의 첫 절기인 청명(淸明)이 되면 화창해 질것인가· 기대했건만 식목일과 청명이 겹치고 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찬밥을 먹었던 한식(寒食)이 되었는데, 강원도 동해안은 강풍에 불덩이가 날아다니는 도깨비불이 화마(火魔)가되어 수십 년 자란 수목들과 모든 마을을 집어삼키는 재난을 일으켜 검은 잿더미만 남기고 말았다. 들판에 파릇파릇 돋아난 달래, 냉이, 씀바귀, 쑥, 돌나물 등이 동상(凍傷)이라도 걸릴까 걱정이 앞선다. 이런 봄날에 딱 맞는 글귀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봄이 왔는데 봄 같지 않다 ' 이 명구(名句)는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叫)가 왕소군(王昭君)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소군원(昭君怨)"이라는 한시(漢詩)에 나온다. 왕 소군은 중국의 4대미인중 한사람으로 절세의 미인이었으나 슬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한(漢)나라 원제(元帝)때, 전국에 후궁을 모집하였는데 수천 명의 궁녀가 선발되었다. 이때 본명이 왕장(王嬙)인 왕 소군이 18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연수(毛延壽)등 화공들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빈천하여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 소군은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려버렸다. 남흉노의 호한야(呼韓邪)가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했는데,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다. 왕 소군의 미모에 반한 호한야는 왕소군을 지목했다. 3일 후, 왕 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未央宮)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고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왕 소군이 흉노를 향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장안(長安)을 한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 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웠다. 왕 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 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 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왕 소군의 미모를'낙안(落雁)'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낙안이라는 지나친 과장법이 재미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 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청총(靑塚)'이라 하였다고 한다."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소군원이라는 시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작금의 봄 날씨를 설명해주는 것 같아 자주 인용되는 것 같다. 이는 한반도 정세와도 비교되는 것 같으며 불청객 미세먼지 피해가 어디까지 미칠지 답답하기 만한 봄철이다. 4월은 벚꽃이 만발하는 계절이라서 벚꽃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펄럭인다. 상춘객을 기다리는 벚나무 가지엔 꽃망울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꽃샘추위가 아무리 매서워도 지구는 돌고 있기에 밀려가는 겨울을 밀어내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봄은 한반도를 아름다운 봄꽃으로 물들일 것이다.
봄이 오는 소식을 알리는 남쪽지방의 섬진강줄기를 따라 벚꽃보다 먼저 피는 매화(梅花)가 절정을 이룬 광양매화축제장을 지난 16일에 찾아갔다. 모처럼만에 코레일(E-Train)관광열차를 타고 새벽공기를 가르며 충주 역을 출발하였다. 주덕을 지나니 먼 산과 들판에는 하얀 눈이 덥혀있어서 마음이 들뜬 관광객의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일반객차와는 달리 관광용으로 꾸며진 열차를 타고 여덟 명 일행이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의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해 3월 17일에는 괌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꽃구경을 하기위해 당일로 국내여행을 하니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새벽 일찍 나오며 준비해온 먹을거리로 아침을 때웠다. 김밥과 기차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삶은 계란, 쑥 절편, 사과, 딸기, 과일, 냉동옥수수 등으로 조반(朝飯)을 해결하고 따끈한 커피 향을 맡으며 한 달만의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직장동료로 20여년 넘게 모임을 이어오며 국내여행도 많이 다녔고, 베트남 캄보디아, 터키, 대만, 곤명, 괌 등 해외여행도 여러 곳을 다녀왔다. 은퇴 후에도 모임을 이어온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일정안내에 이어 레크리에이션으로 열차 안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모두 어린 시절로 돌아가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게임을 하며 한바탕 웃고 나서는 속이 후련하다고 한다. 남쪽으로 내려오니 차창밖에는 봄꽃이 여기저기서 반기며 화사하게 웃는다. 아침엔 눈을 보며 출발했는데 완연한 봄날이다. 광양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과 통화를 했는데 감자를 심고 있다고 하였다. 들녘에는 마늘, 보리, 유채가 파릇파릇 싱그럽게 느껴졌다. 흐르지 않고 멈춰있는 듯한 섬진강은 파란 비단길 같았다. 섬진강 둔치에는 주말을 맞아 매화축제장을 찾은 승용차와 관광버스가 주차장을 가득 채웠다. 21회를 맞는 매화축제는 백운산 자락에 만개한 매화보다도 사람이 더 많은 듯했다. 축제장까지 이동 수단으로 셔틀버스가 있었지만 짧은 거리만 운행을 하고 걷는 구간이 너무 길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강바람을 안고 걸어서 이동하였고 재첩회덮밥으로 점심을 먹고 매화동산을 둘러보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였다. 축제장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하다.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 거리 등이 눈길을 끌지만 산비탈 마을길을 굽이굽이 돌아보고 사진을 찍으며 봄기운을 느꼈다. 전망대에 오르니 모래밭이 드러난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켰다. 매실 액을 숙성시키는 수많은 장독대가 장관(壯觀)이었다. 매화 밭, 장독대, 대숲, 돌담, 모두가 사진 배경으로 인기가 있었다. 주전부리거리도 인기가 있어 추억의 국화빵이나 강정 수수부꾸미 등도 눈길을 끌었다. 매화마을의 대표인물 홍쌍리家 라는 큰 돌 에 새긴 글씨도 눈에 뜨였다. 섬진강 바로 옆에 매화밭길을 따라 걷는 길은 시간이 없어서 그냥 지나 처야 했다. 걷는 길이 너무 많아 경로관광객은 별도의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약 1시간동안 이동하여 광양와인동굴에 도착하여 터널 속을 걸으며 찬란한 빛을 보고 와인을 마시며 모두가 즐거워하였다. 5시 30분에 관광열차는 광양역을 출발하였다. 저녁식사는 도시락이 나와서 열차 안에서 만찬을 즐겼다. 어둠이 짙어지자 열차에 설치된 화면에 추억을 되살리는 영상을 보여준 뒤 사회자가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유익했다. 열차와 축제장 주요장면의 사진을 영상으로 보여주어 여행의 감동을 더해주었다. 남쪽매화축제를 회상하면서 와인 잔을 기울이고 정담을 나누다보니 봄소식을 가슴에 가득안고 돌아온 즐거운 봄 나들이였다.
고전(古典)명구(名句)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안겨줍니다. "두 마음은 한사람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한마음으로는 백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兩心은 不可以得一人이오 一心은可以得百人이니라)" 이글은 중국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유안(劉安)이 저술한 책'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명구(名句)입니다. 마음을 밝혀주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을 공부하고 강의하다 보면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의구심(疑懼心)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가슴(심장)에 있는지, 머리(뇌)에 있는지 알쏭달쏭하기만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두 마음(兩心)'은 상대방을 대함에 있어서 한결같지 못하고 이런저런 딴 마음을 품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귐은 어느 순간에 갑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만남에서든지 상대를 대함에 있어서 자신의 진실 된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결국은 한 사람의 마음도 얻기 힘들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인데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진심을 다하여 상대를 대하더라도 상대는 나를 신뢰하지 못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어릴 때는 실감을 하지 못하다가 점차 나이가 들수록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인간관계를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분명 본인 노력의 차이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내가 상대방을 대할 때 진심으로 잘 처신했었는가.'하는 생각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심 즉 한마음이란 어떤 조건의 변화에도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양심(兩心)으로 인간관계를 하면 마음이 분산되어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배신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배신을 하지만, 동물은 배신을 하지 않는다."는 말속에는 사람은 한마음이 아닌 두마음으로 상대방을 배신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남을 속이고 의리를 저버리고 배신하는 사람을 보고 짐승마저도 못하다고 합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한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사기(詐欺), 이혼, 강도, 폭력, 살인 등 각종 범죄가 줄어들어 서로 믿고 살아가는 밝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정치인들도 국민과 유권자들에게 일심으로 일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인(公人)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두마음을 먹으면 민심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심의 인간관계는 상대방에게 두터운 신뢰를 주기 때문에 마음이 통하여 믿을 수 있는 동지(同志)를 얻어 나의 어려움에 내일처럼 나서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부자가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들이 많은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하여 진정한 친구인가를 실험을 했습니다. 어느 날 밤에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거적에 싸서 아들 친구 집에 갔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여 시체를 가져왔다며 도움을 청했는데 모두 거절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는 "이번에는 내 친구를 찾아가 보자." 아버지의 친구는 걱정을 하며"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면 좋은 해결 방법이 있을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는 거적에 쌓인 것을 번쩍 둘러메고 자기 집 마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시체가 아니라 돼지라며 한결같은 우정을 확인한 후 껄껄 웃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에게"위급한 처지에 있을 때 도와주는 친구가 참된 우정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일심(一心)으로 사람을 사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하늘재를 넘으려고 오후의 따스한 햇살을 등에 업고 미륵사지 옆을 지나 걷기 시작했다. 수년전 등산모임에서 오를 때는 등산로가 돌밭이었다. 지압효과는 있었지만 걷기가 불편했었다. 충주시가 하늘재를 찾는 관광객을 위해 고운마사토를 깔아놓았다. 흙길을 걷는 편안함이 온 몸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아 너무 좋았다. 장마로 흙이 파여 나갈 것을 대비하여 옛 석문분교장터에 마사토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문경새재길이 유명한 것은 편안한 흙길이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맨발로 걷을 수 있는 여유로운 길이 흔치않아 전국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계절의 변화를 맛보며 건강을 챙기는 명승지가 되었다. 하늘재는 신라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 공주가 함께 서라벌을 떠나서 하늘재를 넘었다. 미륵리에 당도한 마의태자는 그곳에 미륵입상을 세우고 덕주 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건립한 후 오랜 세월을 기도하며 신라의 부흥을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그들의 내세(來世)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소백산줄기 중에 영남의 과객(科客)들이 하늘재를 이용하여 한양으로 가장 많이 다녔던 길이라 한다. 죽령(竹嶺)과 추풍령(秋風嶺)이 있었지만 하늘재는 높지 않고 완만하며 중간에 위치한데다가 충주로 나가면 한강뱃길을 이용할 수 있어서 가장 선호했던 고개라고 한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 문경새재로 개척하여 세 개의 관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험준한 지세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이 조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문경새재라는 이름은 하늘재 대신 새로 만든 재라고 하여 새(新)재(嶺)인데, 한자로 새조(鳥)자를 써서 조령(鳥嶺)이 되었다고 한다. 하늘재의 한자이름은 계립령(鷄立嶺)이라 한다. 월악산 쪽으로 포암산(布巖山 : 961.8m)을 일명 베바우산이라 했는데 하늘을 가득 채우고 우뚝 솟은 모양이 마치 큰 베를 펼쳐놓은 것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희게 우뚝 솟은 모습이 껍질을 벗겨놓은 삼대(지릅)같이 보여 마골산(麻骨山)이라고도 하고, 계립산 이라고도 하여 이 고개를 계립령 이라 하는 것 같다. 하늘재 라고 널리 알려졌는데 고개를 기준으로 문경 쪽의 마을 이름은 관음(觀音)리다. 고개 양편으로 절이 많은데 관음리에는 관음사 라는 절과 포암사 라는 절이 있다. 관음이란 '관세음보살'의 준말이다. 충주 쪽의 지명은 미륵리다. 미륵사지에는 주춧돌과 절터가 남아있고 세계사와 대원사라는 절이 있다. 전해오는 야화(野話)로는 문경 쪽의 관음리는 현세(現世)이고, 충주 쪽 미륵리는 내세(來世)라 하는데, 현세에서 내세로 가려면 하늘을 통해서만 갈 수 있기 때문에 하늘재 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미륵리에서 하늘재를 넘어가면 내세에서 현세로 넘어가는 것이 되니 아이러니하다. 솔숲의 양 옆으로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새롭게 느껴졌다. 마치 제복을 갖춰 입은 의장대의 사열을 받는 우쭐한 느낌도 들었다. 길이 굽어지는 부분에 연아를 닮은 소나무가 오른편에 서있다. 은반의 요정으로 국위를 선양시킨 김연아 선수의 묘기를 보는 듯 했다. 하늘재를 넘어서니 문경 쪽은 아스발트를 깔아 놓아 충주 쪽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하늘재 길에 마사토를 깔아 자연친화적인 흙길을 만든 것은 아주 잘한 시책이다. 생태체험 길을 만들어 자연을 관찰하는 가족단위의 산책길로 역사성을 되살려 보완을 한다면 또 다른 명품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두 식구가 조용히 살던 아파트에도 설 명절 준비가 시작됨을 아내의 분주함에서 느끼게 된다. 가래떡을 뽑을 쌀을 담가 놓고 식혜 만들 준비, 전 부칠 준비 등 주방과 베란다에 그릇 숫자가 늘어난다. 설 명절에 가족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면서 덩달아 마음도 들뜨는 것 같다. 가족과 함께 보낼 화목한 명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힘든 줄도 모르는 것 같다. 옛날 같으면 칠순을 바라보는 할머니 인지라 며느리에게 지시나 하며 감독처럼 있을 나이인데도 손수 명절준비를 하니 해가 갈수록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늦둥이 아들은 아직은 미혼이라서'올 추석에는 며느리가 도와주겠지'하는 희망을 안고 참아내는 것 같다. 온 가족이 맛있게 먹을 음식을 만들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대가족이 함께 모여 명절준비를 하면 덜 힘들 것 같은데 핵가족으로 분산되어 살아가니 우리 고유의 전통을 지키던 명절 풍속은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깝다. 올해는 설날 앞으로 주말이 있어 5일간 연휴로 귀성차량과 차례준비가 여유로웠던 것 같다. 설 전날에 만두도 만들고 전(煎)도 굽느라 너무 바쁘고 힘들어 했는데 만두는 미리 만들고 전만 부치니 힘이 덜 든다고 하였다. 집안청소 외에 서툰 솜씨로 설 준비를 도와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설 전날에야 나타난 아들이 하는 말은 "엄마 ! 힘들게 하지 말고 사서해요."말은 쉽게 하고 전 몇 조각을 맛있게 먹고는 친구 만나러 간다며 나간다. 드디어 명절날이 되었는데 동생과 조카들이 와서 차례를 지내고 작은집으로 이동하여 차례를 모시고 나니 9시 반이 되었다. 92세이신 노모가 계시니 손자들이 고운 한복을 입고 세배를 드린다고 모여든다. 귀여운 증손들의 세배를 받고 오천 원짜리 신권을 두 장씩 나눠주시며 모처럼 환하게 웃으신다. 몇 년 전만 해도 가족이 둘러 앉아 윷놀이를 하며 화목한 시간을 보냈는데 올해는 성묘만 다녀오기로 했다. 장가든 조카들은 처가에 가야 한다며 하나 둘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다. 저녁 시간이 되니 딸을 많이 둔 우리 집엔 외손자 손녀들을 앞세우고 사위까지 들어서니 적막했던 집안에 화기(和氣)가 넘친다. 그런데 인천에 사는 둘째네 가족이 출발도 못하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육아휴직을 하고 복직한 둘째 딸이 일이 많은 부서에 발령을 받아 몸살이 나서 못 올 것 같다고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과 유치원 다니는 이종사촌들은 서로 보고 싶다며 아우성이다. 저녁상을 물리고 과일과 안주를 놓고 정담을 나누는데 인천 딸이 아이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니 모두가 환호를 하며 박수까지 터져 나왔다. 아이들은 반가워서 부둥켜안고 좋아했다. 요즘에는 친사촌이 없는 아이들이 많아 이종사촌끼리 친사촌보다 더 가까이 지내는 것 같다. 비슷한 또래라서 캠핑을 함께 가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만들고 있다. 가끔 충주 인근으로 캠핑을 올 때 저녁에 들려보면 성씨가 다른 이종사촌끼리 친족처럼 지내는 것을 보면 가족이라는 제도가 너무 빠르게 변해 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 연말에는 둘째 네가 스위스와 프랑스로 가족 여행을 다녀온 사진과 동영상을 보았는데, 이번엔 첫 딸네 가족이 뉴질랜드로 여행을 다녀와 사진과 번지점프 하는 영상을 보며 한바탕 웃었다. 여행사진 보다 재미있는 것은 4학년이 되는 동우가 세 살 때 몸을 흔들면서 춤을 추는 6분짜리 동영상을 다시 보니 너무 귀엽고 깜찍해서 그야말로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하며 집안이 떠나갈 듯 웃었다. 명절이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는 것 외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정(情)을 나누고 화목한 시간을 보내라는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뒤면 우리민족 고유의 설날이다. 고려 때는 9대 명절이 있었고 조선에는 4대 명절이 있었는데, 오늘날은 설과 추석 2대명절만 남았다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한식(寒食)은 조상의 묘를 이장(移葬)하거나 떼를 입히는 절기(節氣)로 남아있고, 그네타기와 씨름으로 대표되는 단오(端午)명절은 강릉단오제가 유일하게 남아있고 전통문화의 맥을 이으려는 지역축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이다. 설날도 한때는 신정(新正)과 구정(舊正)으로 나뉘어 이중과세(二重過歲)로 전통성을 잃을 뻔 했던 시절도 있었다. 조상대대로 민족의 정통성을 지켜왔던 고유명절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후손 된 당연한 도리(道理)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새로운 문명의 물결에 밀려서 우리 것의 소중함을 상실(喪失)하며 사라진 전통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는 70%가 한자어(漢字語)인데도 한글전용이라는 미명(美名)아래 자라는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지 않아 문자 독해력(讀解力)이 현저히 떨어지고 문장표현의 깊이가 없고 경망(輕妄)한 인성(人性)의 소유자만 양산(量産)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면 자라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를 가르치는 좋은 기회인데 해외로 여행이나 떠나는 풍조(風潮)는 뿌리를 모르는 잘못된 생각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설과 추석명절은 음력으로 하기 때문에 중국의 문화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한가위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민족이 고유한 명절이 있었고, 고유어인'설'도 그 어원(語源)을 알아보자. 첫째, '설다, 낯설다' 의 '설'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처음 가보는 곳은 낯선 곳이고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인 것처럼 설 역시 처음 맞이하는 '낯선 날'로 생각한 까닭에서 비롯한다는 설이 있다. 다른 하나는 '서럽다'는 뜻의 '섧다'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한 해가 지남으로써 점차 늙어가는 처지를 서글퍼하는 말이다. 또 다른 세 번째 유래는 '삼가다'라는 뜻을 지닌 '사리다'의 '살'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나이를 말할 때 몇 살이라 하는 것이다. 각종 세시풍속 책에는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표현했다.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다. 설날의 세시풍속으로는 차례(茶禮), 세배(歲拜), 세비음(歲庇陰)이 변음 된 설빔(歲粧), 덕담(德談), 문안비(問安婢), 설 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귀(夜光鬼)쫓기, 청참(聽讖),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종류가 다양하다. 설과 추석 명절은 기제(忌祭)와 달리 모든 조상들에게 차(茶)를 올리는 예(禮)이기 때문에 차례, 또는 다례라 하는 것이다. 요즘은 가족과 친척에게만 세배를 하지만 예전에는 마을 어른들께도 세배를 드리면 음식을 주시거나 세뱃돈을 주며 덕담을 해주는 풍습이 있었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새 옷을 입는데 이를 설빔(歲粧)이라고 한다. 다른 세시풍속은 '양괭이 쫓기'가 있었다. 야광귀(夜光鬼)라는 귀신은 설날 밤 사람들이 사는 집에 내려와 아이들의 신을 두루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가버린다고 한다. 그해는 그 신의 주인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귀신이 무서워 모두 신을 감추거나 뒤집어놓은 다음 잠을 잤다.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며 밤을 새던 풍습도 있다. 이것을 해 지킴이 곧 수세(守歲)라 했다. 행운이 깃든다는 황금 돼지해인 기해(己亥)년에 독자 모두가 행복한 설을 맞이하길 기원한다.
올해가 황금돼지해라고 떠들썩하며 기대가 큰 것 같은데 실제로 황금돼지는 존재하는 것일까· 새해엔 행운이 찾아올 것 같은 희망을 안고 시작한 기해년(己亥年)이 밝아 온지도 보름이 되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백말 띠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라는 말을 듣고 띠는 알겠지만 앞에 색깔이 붙은 것이 궁금하였다. 오행(五行)으로 색깔을 결정하기 때문에 청(靑)말, 적(赤)말, 황(黃)말, 백(白)말, 흑(黑)말 이라하는 것이다.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를 천간(天干)이라 하고, 띠를 구분하는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는 지지(地支)라 하여 올해가 기해(己亥)년이므로 앞 글자 기(己)는 천간이고, 뒷 글자 해(亥)는 지지로 돼지띠가 된다. 띠는 12년마다 돌아오기 때문에 12살 차이를 띠 동갑이라 하고, 기해년에 태어난 사람이 올해 회갑(回甲), 환갑(還甲)이 되는 것이다. 십이 지지는 땅에 사는 동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색깔은 천간으로 구분하는데 갑·을은 靑色, 병·정은 赤色, 무·기는 黃色, 경·신은 白色, 임·계는 黑色로 구분한다. 지난해가 무술년이라 황금 개띠해라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색상으로 파랑(靑), 빨강(赤), 노랑(黃), 흰색(白), 검정(黑) 다섯 가지 기본색을 오방(五方)색이라 한다. 예로부터 음양오행사상을 색상으로 풀어내어 東(파랑), 西(흰색), 南(빨강), 北(검정)과 中央(노랑)이라 한다. 색깔의 느낌은 양의 기운(빨강, 노랑, 흰색)과 음의 기운(검정, 파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대의 동양에서 우주에 대한 인식과 사상을 정립한 원리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음(陰)과 양(陽)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한다는 사상이 음양오행 사상으로 방위와 상징을 나타낸다. 동방(東方)은 태양이 솟는 곳으로 나무가 많아 항상 푸르기 때문에 청색으로 봄을 의미하며 탄생하는 곳으로 양기가 강하다. 서방(西方)은 쇠가 많다고 생각하고 쇠의 색깔을 희게 보아 백색으로 표현하였고, 가을을 의미하며 해가 지는 곳으로 음기가 강하다. 남방(南方)은 언제나 해가 강렬해 적색이고 만물이 무성하여 양기가 왕성한 곳으로 여름을 의미한다. 북방(北方)은 깊은 골이 있어 물이 있다고 여겨서 이를 검게 보아 흑색으로 표현하였고 겨울을 의미한다. 중앙(中央)은 땅의 중심으로 해와 가장 가까운 곳이라 여겨 광명을 상징하는 황색으로 표현하였다. 색깔은 오행(五行)에 근거하는데 동양 철학에서 우주 만물의 변화양상을 다섯 가지로 압축해서 설명한다. 인간사회의 다섯 가지 원소로 생각된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운행변전(運行變轉)을 말한다. 수(水)에 해당하는 북(北)을 뒤로하고 남쪽을 향했을 때 좌측인 목(木)·동(東)·청룡(靑龍)을 좌청룡(左靑龍)이라 하고, 우측인 금(金)·서(西)·백호(白虎)를 우백호(右白虎)라고 풍수(風水)에서 말하는 것이다. 동양의 사상은 음양2원(陰陽二元)의 생각과 융합(融合)을 도모(圖謀)하여 여기에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오행의 목·화·토·금·수는 물질의 원소뿐 아니라 색깔, 방향, 몸의 장기(臟器)에도 오장(五臟)이 있고, 맛도 오미(五味)가 있고, 오음(五音), 오곡(五穀)등으로 분류하는데 60갑자로 정하는 기해년은 돼지해인데 색깔이 황(黃)에 해당하므로 부르기 좋게 황금(黃金)을 붙여'황금돼지해'라 하는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세상을 풍자(諷刺)하거나 함축(含蓄)된 성어(成語)로 뜻을 전달 할 때 고사성어를 자주 사용한다. 1990년대 정치권에서 만들어져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말 중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앞글자로 만든 '내로남불'이 있다. '내'와 '남'은 고유어이고 '로'는 로맨스(Romance)로 영어이며, 불륜(不倫)은 한자어이다. 한마디로 고사성어가 아닌 혼합(混合)된 사자성어라 할 수 있다. 주로 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때는 변명을 하면서까지 합리화하는 모습을 지칭하는 말로 남에겐 엄격하나 자신에겐 자비로운 태도(자기합리화)를 일컫는 말이다.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과 타인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중 잣대를 가진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남은 비난하지만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을 일컫는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사자성어에는 '나는 옳고 다른 이는 그르다'라는 뜻을 가진 '아시타비(我是他比)'가 있다. 고사성어는 역사적 사건이나 일화를 압축한 교훈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넉자로 만든 한문문구(文句)로 단행본이 나올 정도로 많다. 역사적 인물에서 유래한 것도 많고, 어떤 사건에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대부분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름을 남기고 간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역사 속의 인물 중에는 추한 이름도 있지만 후세에 본보기가 될 만한 의롭고 훌륭한 이름도 있다. 그래서 옛말에 '호사유피(虎死留皮)인사유명(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뜻이다. 흔히 친한 친구를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인 죽마고우(竹馬故友)라고 한다. 진(秦)나라 12대 황제(皇帝)인 간문제 때의 일이다. 촉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라는 은사(隱士)를 건무장군 양주지사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政敵)이 돼 반목(反目)했다. 왕희지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 중 하나인 후조의 왕석계룡이 죽고 호족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秦)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途中)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어릴 때는 친했으나 뒤에는 벼슬에 의해서 사이가 갈라지는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틀리기 쉬운 고사성어를 살펴보면 바람이 불어 우박(雨雹)이 이리 저리 흐트러진다는 뜻으로 엉망으로 깨어져 흩어져 버림을 '풍비박산(風飛雹散)'이라 하는데 '풍지박산'이라 발음하고, 의지(依支)할 곳 없는 외로운 홀몸을 '혈혈단신(孑孑單身)'이라 하는데 '홀홀단신'으로 잘못 사용하기도 한다. 한밤중에 몰래 도망(逃亡)함을 야반도주(夜半逃走)라 하는데 '야밤도주'로 발음하고, 특정한 사람의 목소리나 또는 짐승, 새 등의 소리를 그럴 듯하게 흉내 내는 것은 성대모사(聲帶模寫)인데 '성대묘사'로 잘못발음하기도 하니 한자어문화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부끄러움이다.
꽃의 향기는 십리(十里)를 가고, 말의 향기는 백리를 가지만, 인품의 향기는 만리(萬里)를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것도 아니고, 명성이 높은 분도 아닙니다. 어느 시골 고등학교 앞에서 '할매 밥집'을 운영하면서 누룽지할머니로 유명한 할머니의 따뜻한 사람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한편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느 주부가 저녁에 남편이 누룽지를 끓여 먹자는 말을 듣고 눌려놓은 누룽지를 끓이며 10여 년이 지난 학창시절의 실화를 적은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집이 시골이었던 저는 고등학교 삼 년 내내 자취를 했습니다. 월말 쯤 집에서 보내 준 돈이 떨어지면 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하곤 했어요. 그러다 지겨우면, 학교 앞 밥 할 매집에서 밥을 사 먹었죠. 밥 할매집 에는 언제나 시커먼 가마솥에 누룽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어요. "오늘도 밥을 태워 누룽지가 많네. 배가 안 차면 실컷 퍼다 먹거라! 이 놈의 밥은 왜 이리도 타누!" 저는 늘 친구와 밥 한 공기를 달랑 시켜놓고 누룽지 두 그릇을 거뜬히 비웠어요. 그런데 하루는 깜짝 놀랐습니다. 할머니가 너무 늙으신 탓인지 거스름돈을 원래 드린 돈보다 더 많이 내 주시는 거였어요. '돈도 없는데 잘 됐다. 이번 한 번만 그냥 눈감고 넘어가는 거야. 할머니는 나보다 돈이 많으니까…' 그렇게 한 번 두 번을 미루고 할머니의 서툰 셈이 계속되자 저 역시 당연한 것처럼 주머니에 잔돈을 받아 넣게 됐습니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밥 할매집엔 셔터가 내려졌고 내려진 셔터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어요. 며칠 후 조회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심각한 얼굴로 단상에 오르시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모두 눈 감아라. 학교 앞 밥 할매집에서 음식 먹고 거스름돈 잘못 받은 사람 손들어라." 순간 나는 뜨끔했어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 부스럭거리며 손을 들었습니다. "많기도 많다. 반이 훨씬 넘네!" 선생님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죠. "밥 할매집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께서 아들에게 남기신 유언장에 의하면 할머니 전 재산을 학교 장학금에 쓰시겠다고 하셨단다." 그리고 선생님은 잠시 뜸을 들이셨어요. "그 아들한테 들은 얘긴데 거스름돈은 자취를 하거나 돈이 없어 보이는 학생들에게 일부러 더 주었다더라. 그리고 새벽부터 일어나 그날 끓일 누룽지를 위해 밥을 일부러 태우셨다는구나. 그래야 애들이 마음 편히 먹는다고." 그날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유난히 '밥 할매집'이라는 간판이 크게 들어왔어요. 나는 굳게 닫힌 셔터 앞에서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할머니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할머니가 만드신 누룽지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어요. 당신의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 없이 내 가슴에도 다가옵니다."이런 내용의 글입니다. 학생들이 밥값으로 낸 돈보다 더 많은 거스름돈을 주신 할머님. 거스름돈을 잘못 받았으면 할머니께 되돌려 드려야 정직한 학생들인데 누룽지 할머니께서는 손녀 같은 학생들에게 용돈으로 주고 가셨습니다. 할머니다운 자비심을 베풀며 살다 가셨습니다. 배고픈 아이들이 마음 놓고 먹을 수 있게 일부러 밥을 태워 누룽지를 해 놓고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하신 누룽지 할머님. 밥집을 운영해 번 돈을 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놓았다는 유언은 삭막한 세상을 훈훈하게 녹여주는 감동이었습니다. 할머니의 베푸는 삶에 경외(敬畏)심마저 들어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낙엽 진 황량한 초겨울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베푸는 삶을 살다 가신 천사 같은 할머니의 인품의 향기는 오랜 세월 전해질 것입니다.
봄, 가을철에 여러 단체에서 다양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 화합을 다지는 행사를 자주 볼 수 있다.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문회행사, 직장동료와 정을 나누는 사원(社員)체육행사, 같은 고향사람들이 만나서 향수를 느끼는 향우회, 피는 물보다 진함을 느끼며 화합하는 종친행사,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친목을 다지는 화합한마당행사 등을 보면서 우리 민족은 흥이 많고 마음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사람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인력으로 농사일을 하면서 힘들고 고단함을 슬기롭게 이겨내려고 민중(民衆)들의 생활감정(感情)을 소박(素朴)하게 나타내고 지방의 특색이 담겨있는 민요(民謠)를 즐겨 불렀다. 방아 타령·변강 쇠 타랑·토끼 타령·장끼 타령 등 타령(打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농부(農夫)들이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피리, 날라리 따위로 하는 음악(音樂) 및 탈춤이나 곡예(曲藝)를 곁들여 하는 민속(民俗)놀이인 농악놀이도 우리민족의 애환(哀歡)이 담겨있는 전통놀이문화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이 모이는 행사엔 음악으로 흥을 돋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화합을 다진다. 행사 주최 측이 행사를 잘 치르도록 돕기 위해 대행업체가 생겨난 것이 이벤트사라 할 수 있다. 천막, 방송시설, 의자 등을 갖추고 진행을 맡아보는 사회자, 초청가수, 악단까지 갖춘 대형 이벤트사도 성업(盛業)중이라 한다. 지역자치단체마다 경쟁하다 시피 열리는 축제도 지역민은 물론 타 지역의 관광객들에게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특색 있는 행사들이 펼쳐지고 있다. 입동이 지난 지 열흘이 됐고 소설을 며칠 앞둔 지난 17일에 종친행사에 참석했다. 충주중앙탑공원 아래 자리 잡은 체육공원에서 개최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충북지원에서 주최하고 충주분원에서 주관한 종친행사가 처음 열렸다. 행사장에 많은 인원이 모이고 확성기의 소음(騷音)이 민원을 발생하기 때문에 마땅한 장소를 구하기도 어렵다고 하는데 주택가와 떨어진 수변(水邊)공원이라 많은 단체에서 이곳을 선호한다고 한다. 통일신라 원성 왕 때 북쪽과 남쪽 끝에서 걸음보폭(步幅)이 같은 사람이 동시에 출발해 만난지점에 7층 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를 '중원 탑평리 7층탑'이라 했는데 당시 국토의 중앙이라 해 '중앙탑'이라 부르고 지금은 공원이 아름답게 조성됐다. 충주댐 하류에 농작물의 냉해(冷害)를 막기 위해 조정지(調整池)댐을 막았는데 이 호수 이름을 탄금호(彈琴湖)라 한다. 수위가 항상 일정해 중앙탑 공원과 건너편 골프장과 어우러져 관광객의 감탄을 자아내는 명승지(名勝地)가 됐다. 2013년에는 세계조정(漕艇)선수권대회를 개최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명소(名所)가 됐다. 충북도지원에서 처음 주최한 행사를 탄금호와 중앙탑공원이 어우러진 잔디공원에서 개최해 200여 명의 종현이 참석해 숭조(崇祖)돈종(敦宗)하며 화합을 다지는 뜻있는 자리였다. 식전행사로 난타공연에 이어 개회식을 갖고 장기 자랑과 초청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경품추첨을 겸한 행사를 했다. 호숫가 잔디밭 천막 아래서 다과를 겸한 점심식사를 하면서 친교(親交)의 시간도 가졌다. 오후엔 각 시군 분원별로 충주의 문화유적을 답사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국보 제6호인 중앙탑과 국보 제205호인 고구려비를 비롯해 통일신라 때 조성된 루암리 고분군, 충주박물관, 술 박물관, 풍류문화관 장미산성 등을 답사했다. 겨울을 한 발짝 뒤로 밀고 한낮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종친간의 가슴 따뜻한 정을 느낀 행복한 하루였다.
늦가을 날씨가 너무 좋다! 참아내기 어려웠던 폭염(暴炎)으로 여름을 보내고 나니 이렇게 좋은 가을 날씨가 감동을 안겨줘 잡아두고 싶은 만추(晩秋)의 계절이다. 파란 가을 하늘아래 오색물감을 풀어놓은 듯 온 산은 만산홍엽(滿山紅葉)이 돼 너무 아름답다. 잎을 떨 군 감나무엔 터질 듯 빨간 홍시가 먹음직스럽다. 일찍 수확한 감나무 끝엔 까치밥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자연의 선물을 동물과 함께 나눠먹는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일찍이 선조들로부터 보고 배우며 실천하고 있다. 시골에 계시는 노모를 찾아가니 텃밭에서 가꾼 호박을 수확해 놓고 아들딸들에게 나눠주려고 하신다. 뒷밭에 심은 총각(總角)무도 된서리에 얼지 않도록 덮어놓으셨다. 넓적한 소쿠리에는 대추와 감을 담장에 올려놓고 가을 햇볕에 말리는 풍경은 풍요로운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가뭄이 심해서 고구마 알이 굵게 영글지 못하고 자잘한 것들을 쪄서 가을볕에 말린 고구마말랭이를 집어 먹으니 꼬들꼬들한 맛이 주전부리 간식으로 너무 좋다. 이웃에 사는 사촌동생은 김장을 담그느라 분주했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은 시골 마당에서 장난치며 놀고 있는 웃음소리가 아이들이 많았던 옛날의 농촌풍경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가을걷이도 거의 마무리 돼 월동준비를 하는 모습이 농촌의 정겹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사과를 한창 수확하고 있고 도로 옆에서 사과를 팔고 있어 한보따리 샀다. 들깨 타작하는 소리, 무를 뽑는 아낙네들, 쾌청한 가을 날씨에 노란융단을 깔아놓은 듯했던 들판은 벼 수확을 하고나니 썰렁해 보였다. 지금처럼 기계화가 되기 전의 농사는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다. 예전에 중학교 다닐 때 하교하고 돌아오면 일손이 모자라 달밤에 논에 세워둔 볏단을 지게로 날랐던 일이 생각났다. 마당에 볏가리를 쌓아 놓고 날을 잡아 타작을 했다. 탈곡기를 발로 밟으며 벼 나락을 터는 일은 여러 명이 역할을 맡아 먼지를 뒤집어쓰며 하루 종일해야만 했다. 요즘은 모내기도 기계로 하고, 콤바인(combine)으로 논에서 잘 말린 벼를 자르면서 탈곡을 한 다음 자루에 담는 일까지 한 번에 마쳐서 손쉽게 농사를 하고 있다. 일손이 많이 필요했던 농촌에서는 들판에서 새참이나 점심을 이웃과 나눠먹으며 정을 나눴던 모습은 보기가 드물게 됐다. 예전엔 아낙네가 집에서 음식을 손수 만들어 머리에 이고 논밭 길을 걸어가는 모습도 이제는 볼 수 없게 됐다. 요즘은 식당에서 배달을 해준다고 한다. 들밥을 전문으로 해주는 식당까지 생겼다고 한다. 한낮의 가을날씨가 너무 평온해 차를 몰고 목적지도 없이 집을 나섰다. 충주호가 단풍과 잘 어울리는 월악산을 바라보며 송계계곡입구에 들어서니 잔잔한 호수는 마치 거울 같았다. 아름다운 가을 산이 거꾸로 비친 호수는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차를 세우고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만 담아가기가 아쉬워 사진을 찍었다. 봄에는 벚꽃길이 아름답고 여름엔 녹음(綠陰)과 어울리고, 가을의 단풍이 비추는 호수는 절경이 아닐 수 없다. 눈 덮인 아름다운 설경을 볼 수 있는 겨울까지 사계절의 변화를 보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살아간다는 것이 자연이 안겨주는 선물이 아닌가? 노란 은행잎 길을 걸을 때면 귀인이 된 느낌이다. 청정계곡이라 자주 찾는 만수계곡을 걸으며 물소리를 들으니 마음까지 정화가 됐다. 한적한 계곡에 자리 잡은 찻집에 앉아 우수(憂愁)에 젖어본다. 어린 시절의 그리운 친구들도 생각이 나고 주말에 찾아오는 가족들과 귀여운 손자들도 보고 싶어진다. 계곡의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따뜻한 차 한 잔의 향기는 만추의 정감을 잡아두고 싶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