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화사했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덧 산과 들에 연두색 물감을 칠한 듯하다.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야의 경치를 바라보며 논산에 있는 돈암서원으로 충주향교 유도회에서 모현순방(慕賢巡訪)을 가는 일정에 동참하였다. 향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공립학교를 말한다. 시골 마을이 있었던 서당(書堂)에서 초학자 중심의 학동들이 글공부를 한 다음에 더 높은 공부를 하기 위해 향교에서 공부를 했다. 통학이 어려워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 기숙을 하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으며 오늘날 중등학교에 해당하는 공부를 하였다. 벼슬시험인 과거를 보기 위해 국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성균관(成均館)에 전국의 우수한 유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였다. 조선 태조께서는 평양에 제일 먼저 향교를 세웠고, 당시 한수(漢水) 이남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충주에 1397년(태조 7년)에 두 번째로 향교를 창건했다고 한다. 남한에 남아있는 향교는 234개가 있고, 충북에는 18곳의 향교가 있다. 향교는 문화재로 보호하며 관리를 하고 있다. 인구가 많은 지역의 향교는 선배 유림들께서 전답과 임야를 희사하여 재산이 남아있어 임대수입으로 운영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치단체에서 석전대제나 기로연 등의 행사에 약간의 지원을 받고 시민정신교육이나 도덕성함양 인성교육에 지원금을 받아 운영하고 있다. 재산이 적은 향교는 운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서원은 나라에서 세운 학교가 아니고 덕망이 높은 유학자가 높은 벼슬을 하고 은퇴 후 낙향하여 후학을 기르기 위해 세운 사립학교이다.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祠堂)을 세워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대부분의 서원은 강이 흐르는 경치가 좋은 곳에 사당과 강학(講學)공간을 세워 글을 가르쳤다. 조선후기로 오면서 서원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나 나라에 지원을 요구하는 바람에 대원군께서 서원철폐령을 내려 47개 서원만 보존하고 대부분 훼철(毁撤)되었는데 그후 복원 된 서원도 많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서원도 600여 개가 된다고 한다. 가장 먼저 세운 서원은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을 주세붕 선생께서 설립하였고, 안동 도산서원,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 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 아홉 개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가장 늦게 설립한 돈암(遯巖)서원에는 기호학파의 거장 사계 김장생 선생과 아들 신독재 김집 선생, 동춘당 송준길 선생, 우암 송시열 선생 네 분의 위패를 모셨는데 문묘(文廟)에도 배향된 인물이시다. 사당 숭례사(崇禮祠)을 비롯한 강학을 하던 응도당(凝道堂), 산앙루(山仰樓)등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돈암서원'은 1660년 현종께서 현판을 내려준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지역의 공론과 학문을 주도했다. 서원의 규모를 보면 향교보다 훨씬 컸고 그 수효가 3배 정도가 되었으며 사대부나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많이 몰렸다고 하니 조선시대에도 교육열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좋은 글에 "식물은 봄을 만나야 꽃이 피고, 씨앗은 땅을 만나야 싹이 트며,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야 행복하다."라고 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수많은 사람과의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천지자연은 절대로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산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거짓이 없고 교만이 없고 속임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풍요로운 세상에 살면서 남을 속이며 살아가는 사람이 너무 많다. 우리나라가 선진국대열에 진입했지만 사기 범죄율이 세계 1위라고 한다. 우리 속담에 "물은 건너보아야 알고 사람은 겪어 보아야 안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을 믿을 수 없음을 나타낸 명언이다. 고전 명구인 논어에 '교언영색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이라 하여 교언영색 하는 사람치고 마음씨가 어질고 진실한 사람은 적다고 했다.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며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은 마음속으로는 진실이 없으면서 잘 보이려고 발라맞추는 말과 아부하는 태도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믿었던 친구나 인척에게 속았을 때의 심정은 배신감을 넘어 인륜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낄 수 있다. 금방 들통이 날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트리는 소인배들이 판을 치며 활보하는 세상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가짜뉴스가 돌아다니는데도 많은 사람이 속아주고 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인간이 천지자연을 대할 때 기쁨을 느끼는 것은 천지자연의 진실을 믿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물, 파릇파릇한 새싹, 아름다운 꽃, 늘 푸른 소나무, 조그만 돌멩이 그 어느 하나도 아름다움이 아닌 것이 없고 조화가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거짓을 한자로 위(僞)라고 한다. 사람인(人)과 할 위(爲)가 합한 글자이다. 인간의 행위에는 거짓이 많다. 가식이 있고 교활이 있고 속임수가 있고 교만이 있고 배신이 있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어렵고 힘든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속인다. 사람보다 숲을 좋아한다고 말한 예술가가 인간의 허위와 거짓에 대한 환멸이요 항의라고 했다. 우리는 천지자연을 배우고 본받아야 한다. "진리는 천지자연을 본받는다."라고 노자가 말했다. 천지자연처럼 의젓하고 꾸밈이 없고 허세를 부리지 않고 겸허해야 합니다. 사회구성원들의 마음가짐은 개개인의 마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현상에 큰 영향을 준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의 불안감, 우울증, 이기적인 인간관계, 과도한 경쟁심, 물질 의존성 등은 심각한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많은 사람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물질과 명예 그리고 권력 등 외적인 조건에 두고 있다. 노자는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사회에 고통과 혼란 그리고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보았다. 우리 삶에 행복과 불행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수신제가(修身齊家)를 한 다음에 남 앞에 서야 믿음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의 품격을 갖춘 지도자가 민의를 대변하는 선량이 되어야 나라가 바로 서고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모여 사는 도시도 오래되면 건물이 노후 되고 불편해지게 된다. 집이 헤지면 수리하듯이 도시도 재생하여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눈에 잘 보이지 않아 느끼지 못할 뿐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도시골목이 좁아도 유럽의 좁은 골목처럼 수리하고 잘 가꾸어 살지 않고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인구가 변두리로 몰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국민은 기존의 것을 재생하여 쓸 생각은 안하고 그냥 버리는 경향이 많다. 재활용으로 자원낭비를 막아야 하는데 말이다. 좁은 국토에 농지를 택지로 바꾸어 아파트만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도심이 텅 비는 공동화(空同化)현상이 해가 갈수록 심화된다. 3천여 명이 넘었던 초등학교가 폐교의 위기를 맞고 있다. 넓은 운동장과 그 많은 교실이 텅텅 비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적으로 크나큰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변두리에 세워지는 아파트단지에 학교를 새로 세우지 말고 기존의 가까운 도심학교로 스쿨버스로 실어 나르면 도심학교가 폐교되지 않아도 될 것인데 말이다. 도심상권도 살아남지 못하고 번화가였던 곳에 텅 빈 가게가 한둘이 아니다. 구도심을 살리려고 많은 노력을 기우리지만 그 효과는 미약하기만 하다. 정부에서는 도시재생사업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변화를 꾀하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충주향교주변도 교현·안림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한지 4년이 되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어울림센터 건물을 세워 경로당과 주민편의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향교주변의 도로를 정비하여 현대식 소공원으로 조성되어 신도시처럼 정비되었다. 올해 향교동산에 둘레 길과 팔각정이 세워지면 살기 좋은 동네로 새롭게 변신할 것이다. 도심의 주택을 매입하여 부족한 주차장을 만드는 사업도 잘하는 사업이지만 일본처럼 주택을 지을 때 주차면적을 확보하는 정책을 폈다면 좁은 길이 주차장으로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는 담당공무원은 수시로 향교를 방문하여 협의를 하면서 고생하는 모습은 안 쓰러 울 때도 있다. 향교 명륜당에서 어린이 예절과 인성교육을 해 보겠다하여 지원금을 받아 어린이집 유치원아이들에게 실시한 전통인성교육이 각광을 받으며 반응이 너무 좋아 타 지역에서 벤치마킹하고 있다. 사업이 종료되면서 지원금도 끊겨 2024년에는 교육이 중단위기에 처했다. 장의회 때 익명의 장의께서 후원금을 모아 교육을 이어가자고 제안하였다. 향교에서 처음으로 후원계좌를 개설하여 연말연시에 한 달 만에 960만 원을 자발적으로 후원하여 겨우 교육을 이어갈 수 있게 되어 가장 큰 보람이다. 철제였던 홍살문을 목재로 세웠고 바닥도 신도(神道)는 붉은 색 대리석으로 깔고 화강암 의자를 놓고, 전통문양의 가로등과 주목도 두 그루를 심어 공원처럼 말끔하게 단장이 되었다. 향교 담장주변도 꽃나무를 심고 단장했다. 종합안내판, 현수막 게시대 등까지 새롭게 갖추어 문화재인 향교건물과 조화를 이루어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향교가 시민과 더 가까워지고 산뜻하게 정비됐다.
소정묘(少正卯)는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 같은 노(魯)나라 사람인데 그는 인기에 부합하는 이상한 학문을 가르쳐서 유명해지고 인기가 높아져 당시 노나라 조정에서 대부(大夫)란 관직까지 올랐다. 공자가 노나라의 사법을 관장하는 장관격인 대사구(大司寇)란 관직을 맡게 되자 취임 7일 만에 첫 조치로 소정묘를 대궐의 궁문 앞에서 처형하고 그 시체를 3일 동안 백성들에게 보여 경종을 울렸다. 이에 깜짝 놀란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물었다. "그를 처형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사악한 행위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첫째, 만사에 통달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마음이 음흉하고 음험한 짓을 하는 것이고 둘째, 행실이 괴팍하고 고집스러운 것이고 셋째, 말이 거짓되고 교활한 것이며 넷째, 괴이하고 추잡스런 일들을 많이 꾸미고 행사하는 것이고 다섯째, 그릇된 일을 일삼으면서도 겉으로는 교묘하게 옳다고 꾸며대어 백성을 기만하는 것이다. 라고 소정묘의 행실을 일갈(一喝)하였다. 이 다섯 가지 중 한 가지만 해당되는 사람일지라도 군자의 처형을 면하기 어려울 진데 소정묘는 이 다섯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으면서 소인들의 영웅이 되어 있으니 처형하지 않을 수 없다. "꼭 사형에 처해야 할 사람은 대낮에 강도짓을 하고 밤중에 남의 집 담장을 넘어가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라를 어지럽히고 뒤엎을 그런 사람들이다"며 "이런 자들은 현명한 군자들마저도 미혹에 빠지게 하는 자이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완전히 속이는 자이다." 소정묘 같은 자를 공자는 향원(鄕愿)이자 영인이라고 불렀는데 둘 다 말재간으로 나라를 어렵게 한다는 말이다. 수령을 속이고 양민을 괴롭히던 촌락의 토호(土豪)로 겉으로는 선량한 척하면서 환곡이나 공물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따위의 일을 향원이라 하였고, 간사 스럽게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을 영인이라 한다. 2500년여 전 노나라의 다섯 가지 악한 죄를 지금 우리나라 위정자나 공직자에게 적용한다면 어떠할까? 명심보감 성심(省心)편에 작자미상의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장원시(壯元詩)가 떠오른다. 國正天心順(국정천심순)이요. 官淸民自安(관청민자안)이라, 妻賢夫禍少(처현부화소)요, 子孝父心寬(자요부심관)이니라. 나라가 바르면 천심(天心)이 어질고, 관리가 깨끗하면 백성이 편안하네, 아내가 어질면 남편의 근심이 적고, 자식이 효도하면 부모 마음이 너그러워 지느라. 사람들은 공자라고 하면 인(仁)의 사상을 먼저 떠올린다.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공자라고 해서 늘 인자하지만은 않았다. 그에게는 엄격한 잣대가 있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것이다. 바로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사리(事理)를 공정하게 판단해 잘못이 있으면 벌을 받고 잘했으면 칭찬을 받는 것이다. 즉 소정 묘처럼 사악한 성격의 소유자는 선량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나라의 질서를 교묘하게 어지럽히는 오악(五惡)을 저질렀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충주에는 동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산이 충주분지를 감싸고 있다. 계명산(계족산)과 금봉산(남산) 그리고 대림산이다. 계명산과 금봉산은 여러 차례 등산을 하였지만 대림산은 한 번도 오른 적이 없었다. 충주에 살면서 40년이 넘게 등산으로 체력을 다졌는데 가까운 대림산을 못 올라서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주말 오후에 수안보로 온천욕을 하러 가다가 대향산 계곡으로 들어가면 주차장이 있고 등산로가 있다하여 가보았는데 등산로를 못 찾고 헛걸음을 하고 온 적이 있다. 지난 주말엔 지인의 말을 듣고 충주미덕학원 뒷산으로 올라가면 된다하여 등산화 끈을 졸라매고 등산복차림으로 혼자서 오르기 시작했다. 낙엽송이 태풍에 쓰러져 잘라놓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오르니 옛날 나무꾼이 다녔던 능선길이 나왔는데 가파른 길인데다 칡넝쿨과 잡목이 우거져 오르기가 힘들었다. 가장 직선거리인데 깎아지른 듯 경사가 심하여 숨이 차고 힘이 들었다. 정상은 까마득하고 절벽에 가까운 산 아래서 올려다보니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완만한 등산로를 두고 험한 길을 들어선 내 자신을 원망하며 올라갔다. 참나무 낙엽이 쌓여 뒤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스틱도 차에 두고 온지라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 지팡이로 사용했다. 몸을 앞으로 굽혀서 숨을 몰아쉬며 한발 한발 오르면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겠다는 일념으로 극기 훈련을 오랜만에 경험했다. 삼부능선 쯤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잠시 휴식을 가졌다. 달콤한 휴식을 뒤로하고 정상을 향해 오르니 점심시간도 되었는데 체력은 소진되어 겨우 전망대에 오르니 이정표가 보이는데 대림산 정상이 0.32㎞라고 적혀 있다. 정상능선은 등산로가 넓어서 걷기가 편했다. 시루를 엎어놓은 듯한 가파른 정상을 오르니 봉수대(烽燧臺)가 3기(基)가 보인다. 통신시설이 없었던 시절에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을 이용하여 통신을 하였던 봉수 터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사용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한다. 평상시는 1거(炬)를 운영하다가 유사시나 적이 침입할 때는 최대 5거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대림산 봉수는 주정산(수안보)봉수를 받아 마산봉수(대소원면)로 연결하였다고 한다. 주머니에 넣어 온 우유를 마시니 시장기가 가셨다. 부부등산객이 가방에서 귤을 꺼내어 주어서 맛있게 먹었다. 향산리 방면에서 올라 온 등산객도 있었다. 정상을 오르는 길은 관주골 서편 능선을 따라 오르는 서문지(등산기점)길과 향산리(윗말), 발치봉 길과 관주마을 길이 있다는 표지판이 있다. 올라 올 때 너무 힘들게 올라와서 완만한 등산로로 내려갈까도 생각했는데 차를 세워둔 곳으로 이동하자면 불편할 것 같아 온 길로 하산하기로 마음먹었다. 대림산성은 고려시대 토석혼축 포곡식의 성곽으로 둘레가 약 5천144m로 현재 성벽 일부와 우물터·봉수지 등이 남아 있다. 이 성은 새재(鳥嶺)와 계립령(鷄立嶺)으로 통하는 큰 길을 막아 충주의 남쪽을 방어하던 요새(要塞)였다고 한다. 기진맥진 하여 하산을 하고 나니 극기체험의 보람을 느꼈다.
초겨울 낙엽 뒹구는 소리를 들으니 허전하고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옛 묵객들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어떻게 읊었을까? 조선 효종 당시 문인 홍만종의 소담집(笑談集)인 명엽지해(蓂葉志諧)에 소리의 품격에 관하여 논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지인의 환송 회식에 정철, 심희수, 유성룡, 이정구, 이항복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자리를 같이하였다.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서로 잔을 돌리면서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 가운데 누군가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무엇인가? 각자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고 생각하는 바를 읊기 시작했다. 먼저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청소낭월 누두알운성(淸宵朗月 樓頭按雲聲) 맑은 밤 밝은 달빛이 누각 머리를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 소리라 읊었다. 이어서 일송 심희수(一松 沈喜壽)가 만산홍수 풍전원수성(滿山紅樹 風前遠岫聲)만산 가득한 붉은 단풍에, 먼 산 동굴 앞을 스쳐지나가는 바람 소리라 응수(應手)하였다. 그러자 서애 유성룡(西崖 柳成龍)이 효창수여 소조주적성(曉窓睡餘 小槽酒滴聲)새벽 창 잠결에 들려오는, 작은 통에 아내가 술 거르는 소리라고 애주가답게 넌지시 던졌다.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는 산간초당 재자영시성(山間草堂 才子詠詩聲) 산골 마을 초당에서 젊은 학동의 시 읊는 소리라는 동심을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재치가 넘치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은 동방양소 가인해군성(洞房良宵 佳人解裙聲) 아늑한 침방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끈 푸는 소리라고 읊자 모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단연 으뜸은 백사 이항복의 가인 해군성(佳人 解裙聲)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백사는 본디 재치와 익살이 뛰어난 인물인지라, 그의 우스갯소리에는 모두들 웃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김광균의 '설야'라는 시도 눈 내리는 밤 머 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시(詩)로 읇었다. 백사 이항복과 김광균 시인은 여인의 치마끈 푸는 소리, 옷 벗는 소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 하였다. 그 들은 분명 얼굴도 마음씨도 매우 아름다웠으리라 생각된다. 이항복은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어나서 사흘 동안은 울지도 않고 젖을 먹지도 않아 모두 걱정을 하였는데, 점성술사가 보고 장차 큰 인물이 될 아기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는 해학(諧謔)에도 뛰어나 만인의 귀염을 받았음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옛 조상님들은 갓난아기 우는 소리, 학동의 글 읽는 소리, 여인네의 다듬이소리를 삼호성(三好聲)이라 하여 가장 듣기 좋은 소리라 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우리 생활 주변에는 많은 소리가 있는데 아름다운 소리보다는 소음(騷音)과 굉음(轟音)이 너무 많아 청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여름철 계곡을 흐르는 맑은 시냇물 소리처럼 우리의 마음을 청정하게 정화시켜 주는 아름다운 소리가 인간의 삶에 품격을 높여주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소리라고 생각 한다.
노란 은행잎이 가로수 밑에 융단처럼 펼쳐진 만추의 계절에 충주시조문학회회원 십여 명이 남구만의 약천집(藥泉集)기록을 보고 수소문 끝에 태어난 옛 집터를 답사하였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 지리 우지진다."시조는 중년세대 이상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기 때문에 낯설지 않은 시조이다. 남구만(1629~1711)선생은 인조 7년 1629년 12월 3일에 외가 루암(樓巖)리(지금은 대소원면 검단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외가는 안동 권 씨이고 외조부는 권엽으로 묘소와 비석이 옛집 뒷산에 있으며 12대 종손이 집을 지키고 있다. 남구만 선생은 루암리에서 다섯 살까지 자랐다고 하며 올해가 탄생 395년이 되는 해이다. 약천은 어려서 외증조모인 이 씨 부인에게 글을 배우다가 고향인 홍성에서 부친에게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향선생(鄕先生)에게 글을 배우기도 했다. 14세부터 다시 외가에 와서 4년 정도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18세 때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내외종으로 근친이었던 김익희(金益熙)에게 의탁했는데 김장생의 손자이다. 당시 유림의 종장(宗長)이었던 송준길(宋浚吉)문하에서 수학을 했다. 대표 관직은 교리(校理), 대사성(大司成), 안변부사, 함경도관찰사,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내 효종·현종·숙종 때 3대 정승을 지낸 뛰어난 인물이다. 남구만 선생은 당시 정치 운영의 중심인물로 정치, 경제, 행정, 군정, 인재등용, 의례 등 국정전반에 걸쳐 경륜을 폈을 뿐 아니라 문장에 뛰어나 책문(冊文) 반교문(頒敎文) 묘지명(墓誌銘)등을 많이 썼다. 약천(藥泉) 남구만선생이 태어난 옛집은 한국전쟁에 전소되어 바로 옆에 세 채의 한옥이 남아있다. 남구만 선생이 충주외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충주시민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충주출신 전 대진대학교 명예교수 서범석(시인, 국문학박사)교수가 강의 자료를 찾다가 약천집에서 충주 루암리 외가에서 출생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이 사실을 충주지역에 알리려고 충주신문에 두 차례 글을 기고한바 있다. 충주시조문학회에서 이런 사실을 근거로 현지답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물이나 유적지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고 종손 권용갑(權容甲)의 선친이신 권순철(權純徹)전직 교장님의 구전(口傳)을 아들을 통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남구만 선생의 고향은 충남 홍성이다. 필자가 다녀온 홍성구항면 거북이마을에 초당(草堂)이 있고, 관직에서 물러나 살다가 묘소가 있는 용인에서도 문화제를 한다. 잠시 유배생활을 했던 동해시에는 약천사라는 사당을 지어 지역문화행사를 하고 있는데 외가이지만 실제로 태어난 충주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 사료는 너무 빈약하지만 학술연구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널리 알려진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 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이렀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하나니』를 읊으며 발길을 돌렸다. 다른 사진은 받아서 넣어주세요.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에게 "만약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移住)하게 된다면 오직 한 가지 뭘 가지고 가겠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서슴지 않고 대답한 말이 "오직 한 가지, 한국의 가족제도를 가지고 가겠다."란 내용은 한국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가족제도가 문명의 발달과 함께 호주(戶主)제 폐지를 기점(起點)으로 허물어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서양문명이 서세동점(西勢東漸)하여 우리의 고유문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가족공동체가 무너지면서 효(孝)문화가 사라지고 있고 밥상 머리교육이 평생의 바탕이 되는 인성(人性)이 형성되었는데 사람의 본성을 잃고 존속살인까지 하는 금수(禽獸)와 같은 극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집단이나 조직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가장 핵이 되는 집단이 가족입니다. 민족고유의 명절이 되면 한복을 입고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하고 차례를 올리며 명절음식을 만들어 먹고 전통 민속놀이를 즐기는 미풍양속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것을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지고 맙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인은 따뜻한 정을 나누며 함께하는 가족을 가까이하지 않고 교류가 점점 소원(疏遠)해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우리 조상은 가족관계를 숫자로 나타낸 촌수(寸數)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이를 자라는 세대에게 가르치지 않아 잘 모르고 사용을 안 합니다. 가족의 핵심은 호주중심이었는데 어느 정부 때 전국의 유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주제를 폐지하여 가족이 와해(瓦解)되었습니다. 아놀드 토인비가 땅을 치고 통탄(痛嘆)할 일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민족고유의 혼이 담긴 인륜도덕은 지켜야합니다. 가족이 모여 사는 곳을 가정(家庭)이라 합니다. 전통가정은 안방이 사랑방이 있어서 가장(家長)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벌과 개미도 여왕이 있어서 가족집단을 다스립니다. 가족이란 핵심집단이 건강하고 화합할 때 그 사회도 건강한 사회가 되고 건강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가족이 허물어지면 세포가 병들게 되어 건강한 가정으로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결혼을하지 않는 젊은이가 너무 많습니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고 둘만 즐기겠다며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이 가족제도의 붕괴가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결혼연령도 늦어지고 집을 사고 차도사고 모든 것을 갖춘 다음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겠다고 하니 말이 됩니까? 부모 조부세대는 셋방살이를 하면서 아이를 키웠습니다. 가정을 꾸리고 한 푼 두 푼 저축을 하며 살림을 늘려가는 재미로 신혼살림을 하며 아이들 자라는 모습을 보며 부모님에게 효도를 했습니다. 부모 곁을 벗어나 직장 다니며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미혼여성도 늘고 있고 부모님만 바라보며 쉰이 너머도 혼자 사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직장 때문에 비록 떨어져 살아도 부모님과 교류를 자주하며 낳아서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젊은이가 줄어드는 것도 가족제도의 몰락에서 잘못된 개인 이기주의입니다. 가족의 정을 느끼며 사람답게 살았던 우리 전통가족제도를 되살려야 합니다.
반세기를 넘긴 51회 우륵문화제가 열리고 있는 9월 8일 저녁 6시부터 충주생활문화센터 공연장에서 우리악기, 소리, 무용 등 신나는 국악한마당행사가 있었다. 충주국악연구회 윤일로 원로 예술인이 주관하는 국악행사에 조길형 시장님의 격려사로 막을 올렸다. 이날 행사는 국악연구회 회원이 전통국악의 맥을 이어가는 행사였다. 충주하면 악성 우륵선생이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탄주한 곳으로 회원들의 가야금 병창과 함께 춤으로 막을 열었다. 승월 혜광주지스님의 축사, 충주미덕학원 안건일 이사장님의 격려사와 함께 시낭송을 해 주셨고, 손병기 전 충주교육장의 축사와 일편 단심가를 낭송하였다. 필자에게는 윤일로 원로 예술인께서 오래전에 지은 한시 7언 율시로 수연 때 부른 "장수 기원가"를 낭송하였다. 집안 가득히 화목한 화기(和氣)가 돌면 이곳이 천당이라는 첫 구가 마음에 와 닿는다. (滿堂和氣 是由天) 많은 사람들은 죽어서 가는 곳이 천당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형제와 이웃이 화목하고 화합하는 기운이 가정마다 가득하면 바로 이곳이 천당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이어서 성균관유도회 최은성 회장이 상각유용가(相各有用歌)를 낭송하였다. 원로 교육자이신 엄봉학 전 교장님의 훈민정음 서문을 낭독하셔서 노익장을 보여주셨다. 윤일로 원로 예술인은 올해 86세이시다. 갓을 쓰고 선비복장을 하시고 선비무를 추는 모습은 60대 모습처럼 그 동작이 가볍고 나비처럼 사뿐하셔서 박수를 많이 받았다. 이어서 장락회 회원의 시낭송이 있었고, 한묘전의 대퉁소선율이 장내를 숙연하게 하였다. 이어서 윤일로 원로께서 어우동 춤을 추어 참석자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회원들이 시조창, 농가월령가, 사설시조 만상풍엽 등 시낭송이 이어졌다. 이탈리아 악기로 흙으로 구워 만든 도자기인 오카리나 연주를 원유순 님이 연주하여 새로운 감동을 주었다. 별도로 사회자가 없이 윤일로 원로 예술인이 진행하는 모습이 젊은이 못지않았다. 의상을 바꿔 입으시며 매끄럽게 진행하시는 예술열정덕분에 건강을 유지하시는 같았다. 유관순 복장을 한 여성이 삼일절 시를 낭송하고 태극기를 품에서 꺼내어 만세삼창을 하여 장내분위기가 갑자기 반전되는 효과를 주었다. 여성 세분이 기타 연주를 하여 박수와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니 가라앉았던 분위기에 흥을 돋우었다. 이어 섹소폰 연주에 맞춰 이풍경, 전신애 향토가수의 노래로 장내는 여흥을 즐기는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1960년대를 마지막으로 간이 무대에서 연극과 노래자랑 등의 장기를 보여주었던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윤일로 원로 예술인은 사서삼경을 읽고 한학을 하셨다. 후배를 가르치신 시조시인이며 시조강의를 서울에 가서 하신다.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께서 무대에서 공연을 하시는 현역이다. 가야금을 비롯하여 악기도 잘 다루시는 우리 고장의 원로예술인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으신 분이다. 살아계신 무형예술인으로 후배들에게 재능을 전수하며 충주의 국악을 이끌고 있다.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행사가 성균관청년유도회경주지부 주관으로 실시돼왔다. 통일신라시대 최초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의 시원지인 경주에서 전국 유림들의 종합적인 유교문화 전승대회로 열리다가 코로나로 3년간 축소운영 됐는데 올해 아홉 번째로 경주향교에서 '신라국학경연대회'가 오는 9월 10일 펼쳐진다. 단체부와 개인부로 실시하는데 단체부는 경전암송과 창홀(唱笏)을 겨루는 국학부, 시창(詩唱)을 하는 예악(禮樂)부, 궁술대회인 향사례(鄕射禮)로 겨루는 국궁부, 전서(篆書), 예서(隷書), 해서(楷書), 행초서(行草書), 한글 오체(五體)를 현장에서 겨루는 경연(競演)대회가 펼쳐지고 오후에는 개인부가 펼쳐져 실력을 겨루게 된다.공정하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장원(壯元), 방안(榜眼), 탐화(探花), 장려(奬勵)상으로 나뉘어 상장과 상금이 수여된다. 전교(典校)와 유도회장은 국궁부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되어있다. 대회 한 달을 앞두고 다섯 명의 선수가 탄금대 숲속 호숫가에 자리 잡은 탄금사정(彈琴射亭)을 찾아갔다. 탄금호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운 곳에 위치해 전국의 국궁장(國弓場)에서 손꼽히는 곳이라 한다. 사대에서 145m 거리의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은 마치 신선처럼 우아한 모습이다. 국궁장에 들어서면 정간(正間)에 예를 갖추고 사범께서 기본자세부터 자세히 가르쳐 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유도회 선수 두 분은 활을 쏘셨던 분이라 사범이 안 나오실 때는 도와주어서 연습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요하지방의 홍산문화는 동이문화로 황하문명보다 천여 년 앞선 문화라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은 활을 잘 쏘는 민족이다. 동이(東夷)의 이(夷)자에는 활 궁(弓)자가 들어있다. 올림픽에서 남녀 양궁부가 활 잘 쏘는 민족의 후예(後裔)라는 것이 전 세계에 알려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고전 교과목은 육례(六禮)라 하여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여섯 과목을 공부했는데 유학의 근본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인성을 갖춘 다음에 글공부를 가르쳤음은 사람의 됨됨이를 갖춘 다음에 학문을 하였다. 사람으로서 인륜도덕의 바탕위에 재능을 키워야 그 재능이 인류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작금의 교육이 본받아야 할 것 같다. 향교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업무를 처리하다가 탄금정 활터에 도착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심신수련이 되는 기분이다. 기본자세가 매우 중요하므로 반복연습을 하고 쉴 때는 충분히 휴식하고 다음단계인 주살연습을 한다. 주살이란 가는 기둥에 줄을 매어 끝에 화살을 매달아 쏘는 연습을 말하는데 달대(達臺)라고도 한다. 주살연습이 된 다음에 사대(射臺)에 서서 과녁을 향해 활을 쏠 수 있게 된다. 대회장 활터가 향교 안에 있기 때문에 대회규정이 30m이다. 나무로 만든 사대에 올라 네 순(巡)을 쏘아야 하는데 참가팀이 많으면 두순(10발)만 쏠 것 같다. 경연에 참가하는 선수의 복장은 도포나 한복을 입는다. 유림들만 참여하는 경연이므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전승하는데 더 큰 의미를 둔다. 이번 대회 덕분에 국궁을 배우는 재미에 하루가 즐겁다.
우리 조상들은 군사부(君師父)일체(一切)라 하여 임금과 스승과 부모를 같은 위치에 놓고 스승의 그림자도 안 밟는다고 했다. 그랬던 나라가 어찌하여 학생이 교사를 폭행해 상해를 입히지 않나 학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편애하거나 인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고소 고발을 일삼고 있으니 아이들 앞에선 교사들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 교사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심지어 교직에 염증을 느껴서 교단을 떠나는 교원이 많이 있으며 최근에는 2년 차 새내기 교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가슴이 아프고 한숨만 나올 뿐이다. 교권이 무너져서 더 이상 참지 못한 수많은 젊은 교사들이 주말에 거리로 나와 집회를 하며 하소연을 하고 있는데 교육당국은 뒷북만 치고 있으니 안타깝다. 이 나라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하나 둘 만 키우는 자식에 대한 지나친 애착심만 있지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데 필요한 인성교육을 가정에서 외면하고 있다. 자신만 아는 이기적이고 오직 경쟁에서 이겨 1등만 하라고 가르치는 부모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인성은 어릴 때 길러지고 부모가 모범을 보이면 아이들은 은연중에 닮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의 행실을 보면 그 부모가 어떤 분인지 짐작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릴 때 습성이 평생을 가는데 인성은 부모의 언행과 그 집안의 가풍(家風)에서 결정이 된다. 교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선생님을 원망하고 전화를 하거나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언행과 법에 호소하려는 작태는 자기 자식을 망치는 길이라는 것을 모르는 학부모들은 헛똑똑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학력이 높고 부를 누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아도 자식 농사는 망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여기다 학생인권조례만 강제조항을 만들어 과잉보호하려는 것도 한 몫을 해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올바른 인성을 가르칠 수 없는 교육현장이 됐다. 교육을 포기하라는 조례를 제정한 어른들의 마음은 당당하단 말인가? 학생의 인권이 소중한 만큼 상응하는 책임도 뒤따라야 한다. 교사들이라고 완벽한 인격체일 수는 없다. 어느 학부모는 담임교사에게 "당신 어디까지 배웠어? 나 카이스트 나온 여자야!" "카이스트 경영대학 나오고 MBA까지…"라며 아이 담임인 유치원교사에게 갑질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오래전에 담임선생님의 교권을 존중해준 어느 대학교수의 이야기는 감동을 준다. 생물을 전공하는 교수의 초등학생 아들이 아버지에게 식물 이름을 물었다고 한다. 한참 생각하더니 "글쎄 잘 모르겠다. 내일 담임선생님께 물어 보렴" 다음날 아이는 담임선생님께 물어 보았다. 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니까 생물학 박사인 아버지 보다 더 잘 알고 계신 선생님께 믿음과 존경심이 생기고 우러러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그 교수는 선생님의 권위를 세워주려고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식물에 대한 질문을 하면 가르쳐 주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권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식이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세워줘야 자식교육이 잘 될 것임을 아시는 훌륭한 부모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이런 학부모만 있다면 교권이 오늘날처럼 무너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연을 벗어나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 자연이 무상으로 공급해주는 공기와 물을 한순간도 마시지 못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 인간이 불을 발견한 후로 인류문명은 크게 발전해 왔다. 우리 조상은 집안에 불이 꺼지면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기에 이사를 할 때 불씨를 담은 화로를 가장 먼저 들고 들어갔다. 이렇게 인류문명에 반드시 필요한 불이 작은 불씨가 살아나 대형 산불로 번져 화마(火魔)가 되어 산림과 산속의 문화재인 사찰을 잿더미로 만드는 재앙이 크나큰 재난으로 인간에게 다가 온다. 매년 여름철이 되면 집중폭우로 인하여 산사태가 일어나 산 아래 있는 가옥을 덮쳐 많은 인명피해를 일으키고 있다. 폭우는 강물이 범람하여 농경지와 마을을 침수시키고 미호강 둑이 터져 오송 궁평 지하도를 지나던 차량에서 14명의 아까운 생명이 유명을 달리하는 참사로 돌변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력 댐인 괴산댐이 3시간이나 월류(越流)하여 달천하류에 큰 피해를 입혔다. 경북 예천의 산사태로 골짜기의 마을을 초토화 시키며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혀서 안타까웠는 데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해병대원의 죽음은 안타까움을 더해주었다. 충남 논산 공주의 폭우피해도 컸는데 이번피해 지역은 상습수해지역이 아니라 큰 상처를 입은 것 같다. 기상예보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날벼락처럼 닥쳐오는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위성에서 찍은 첨단기술로 일기예보를 했는데도 피해를 줄이지는 못했다. 재난 속에서도 관할을 따지고 인재(人災)였다며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부서에서 매뉴얼에 따라 대처하지 못하고 보고체제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며 잘잘못을 가리는 조사도 진행되고 있다. 오송 궁평지하도 참사는 인재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우선 미호강둑방공사를 우기(雨期)인 장마철에 하다가 임시로 쌓은 둑이 무너져 순식간에 물이 넘쳐 지하도로 덮쳤고, 강물이 범람하기 직전에 임시로 막은 둑방을 중장비도 아닌 삽으로 6명의 인부가 투입된 것도 지적이 되었다. 더 근본적인 것은 미호강이 그동안 하천 바닥이 높아져 준설(浚渫)공사를 했더라면 강물이 넘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얻는다. 더욱이 미호강 준설의 필요성이 환경단체의 반대로 진행되지 못했다고 하니 복합적인 인재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너무 큰 자연재해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치더라도 소중한 인명피해와 재산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국가가 치수관리를 잘하고 있다 할 것이다. 법적인 제도가 미비하여 재난을 입었다면 국회와 정부도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번 푹우 피해는 북태평양 고기압과 대륙의 한랭한 고기압이 정체전선이 형성되어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 계속 걸쳐져 있어 많은 폭우를 쏟아 부었다. 이상기후변화로 그동안 큰 상처를 입고도 그것을 쉽게 잊고 대비에 소홀하여 예상치 못한 피해를 계속 이어왔다. 8~9월에 단골손님처럼 찾아오는 태풍의 진로가 한반도를 지나게 되면 또 다른 재난이 기다리고 있으니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옛 성인들은 천지자연은 불인(不仁)하다고 했다. 자연재난으로 부터 안전한 미래를 위해 이번 피해의 원인을 반드시 짚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맨발의 인도 전도자 '선다 싱(Sundar Singh)'이 히말라야 산길을 걷다가 동행자를 만나서 같이 가는 도중에 눈 위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발견하였다. '선다 싱'이 제안 했습니다."여기에 있으면 이 사람은 죽으니 함께 업고 갑시다."그 말에 동행자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안타깝지만 이 사람을 데려가면 우리도 살기 힘들어요."동행자는 그냥 가버렸습니다. '선다 싱'은 하는 수 없이 노인을 등에 업고 얼마쯤 가다 길에서 죽은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먼저 떠난 동행자 였습니다. '선다 싱'은 노인을 업고 죽을힘을 다해 눈보라 속을 걷다 보니 등에서는 땀이 났습니다. 두 사람의 체온이 더해져서 매서운 추위도 견뎌낼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선다 싱'과 노인은 무사히 살아남았고, 혼자 살겠다고 떠난 사람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가리키는 한자 '人'은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맞댄 형상입니다. 나와 등을 맞댄 사람을 내치면 나도 넘어진다는 것이 "人의 이치"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등을 기대고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살이입니다. 훗날 어떤 이가 '선다 싱'에게 물었습니다."인생에서 가장 위험할 때가 언제입니까?"'선다 싱'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지고 가야할 짐이 없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산을 오를 때도 가방이나 짐을 지고 오르는 것이 힘은 들어도 더 안전하게 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짐이 가벼워지기를 바라지만 그때가 위험하다는 것이 '선다 싱'의 가르침입니다. 먼 바다를 떠나는 선박도 항해를 시작하기 전 배의 밑바닥에 물을 가득 채웁니다. 배의 전복을 막기 위해 채우는 "바닥짐"입니다. 우리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 강(姜)태공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태공은 가난 속에서 곤궁하게 살며 언제나 책을 가까이하고 학문에 열중했는데 집안 살림은 부인 마씨가 맡아 했습니다. 하루는 부인이 일을 나가면서 비가 오면 마당에 말려놓은 갱피를 거두어 놓으라고 당부를 하고 나갔습니다. 많은 비가 내려 마씨 부인이 집에 돌아오니 마당에 갱피가 빗물에 다 떠내려가고 없었습니다. 태공은 비가 오는 것도 모르고 책만 읽고 있었습니다. 마씨 부인은 더 이상 가난한 살림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 재가(再嫁)를 해버렸습니다. 태공이 위수에서 낚시를 하며 때를 기다릴 때 무왕이 찾아와 도움을 청하자 왕위를 이을 아들 문왕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무왕이 은나라를 점령하여 주나라를 세웠고 강태공은 덕과 계책으로 제후들을 결속시켜 천하의 3분의 2를 주(周)나라에 귀속시키게 했습니다. 태공도 천하통일의 큰 공로로 제후로 봉해졌습니다. 어느 날 강태공이 수레를 타고 어느 거리를 지나는데 옛날 자기를 버리고 재가한 마씨가 들에서 갱피를 훑고 있었습니다. 강태공은 수레를 멈추고 마씨를 불렀습니다. 마씨는 옛일을 후회하며 다시 자신을 받아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이에 강태공은 한번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번 끊어진 인연은 다시 맺을 수 없다며 재가해 살고 있는 마씨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떠났습니다. 마씨는 큰 인물이 될 태공을 몰라봤고 남은 생을 후회를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하는 집안 대청소를 마치고 아파트 앞 김밥 집에 들어갔다. 김밥 두 줄을 사서 조수석에 놓고 맨발로 흙길 걷기를 위해 문경새재 3관문 길로 달려갔다. 2주전에 맨발로 한 번 흙길을 걸었는데 발바닥은 조금 아팠지만 지압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저녁식사 후에 운동을 나가면 공원길에 우레탄포장길을 맨발로 걸으면 촉감이 좋아 매일 걷는다. 주말에는 흙길을 걷기 위해 고사리 마을을 지나 휴양림 바로 아래 차를 주차하였다. 간편한 복장을 하고 맨발로 흙길을 들어섰는데 장맛비에 길이 파여서 골이 지고 굵은 모래가 솟아올라 처음엔 망설여졌다. 어제까지 장맛비가 내려서 계곡에는 맑은 물이 노래를 부르듯이 귀를 즐겁게 해주었고 흙바닥은 아직 습기가 촉촉하여 흙을 밟는 감촉이 좋았다. 지난번에는 흙이 바싹 말라서 거칠게 만 느껴졌는데 습기가 땅에서 올라오는 지기(地氣)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우거진 숲에서 풍겨 나오는 습도가 있는 상쾌한 공기에 마음이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11시가 넘어 드문드문 하산하는 등산객들도 있고 산길을 오르는 탐방객도 있었다. 그런데 맨발로 걷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모두들 눈길을 주며 염려하는 눈빛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고무신을 들고 맨발로 걸어 다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는 못 살던 시절이라 건강을 위해서 맨발로 걸었던 것이 아니라 신발이 닳을까봐 손에 쥐고 걸었다. 발이 아프면 슬리퍼를 신으려고 손에 들고 걸었는데 그 동안 해온 맨발걷기로 발에 굳은살이 많이 생긴 것 같았다. 한 시간이 넘게 맨발로 걸어도 견딜 만 하였다. 파여 나간 길을 보수하려고 흙을 무더기로 갖다 놓았다. 새재 길은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다니던 길이었는데 3관문을 경계로 문경 쪽으로는 문경시에서 관리를 하고 있고 충북 연풍면 쪽은 충북도에서 관리하는데 경북방면 새재 길은 오래전부터 흙길로 잘 다듬어 관리하여 맨발로 걷는 탐방객을 많이 볼 수 있다. 북향으로 비탈길인 충북 쪽은 몇 년 전부터 흙길을 조성하여 새재 길은 걷기 편한 흙길로 전국에서 유명한 곳이다. 흙길을 맨발로 걸으면서 1차선 도로 폭으로 만들어진 길인데 가장자리에 맨발로 걷는 길을 별도로 만들어 주면 탐방객들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느덧 3관문을 통과하고 우회하여 돌아서 넘어왔다. 요즘은 시골 농로까지 대부분 시멘트 포장을 하여 맨발로 흙길 걷기를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문경새재 길은 자연 그대로 흙길을 보존하고 있어 주말만 되면 전국에서 물밀 듯이 등산과 산책을 즐기려는 탐방객이 몰려오고 있다. 40여분 만 나오면 이렇게 편하게 걸을 수 있는 흙길이 있는 충주에 살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은 문경읍 관음리에서 수안보면 미륵리로 넘은 계립령(鷄立嶺)또는 하늘재라 한다.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할 때 넘었던 재로 고려 공만왕도 홍건적을 피해 몽진(蒙塵)할 때도 하늘재를 이용했다고 한다. 조선 태종 때 지금의 문경새재 길이 열렸는데 새로 난 길이라 "새재"라 했는데 한자로 조령(鳥嶺)이라 하고 있다. 하산 길에 휴양림 입구 옆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발을 담그니 피로가 풀리며 개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장기가 돌았다. 점심으로 준비한 김밥을 먹으니 소풍 온 것처럼 꿀맛이었다. 휴양림 근처 공기가 너무 좋아 차창을 열어놓고 잠시 오수(午睡)를 즐기고 나니 몸이 날아갈 듯하였다. 주말에 이렇게 건강을 다지고 운동을 하며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오늘 하루 힐링의 마무리는 수안보 왕의 온천에 들려 사우나를 즐길 수 있으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하지를 며칠 앞둔 지난 16일 오전 10시에 충주시 대문산 탄금대 충혼탑 옆 위령탑에서 431주기 팔천고혼위령제가 봉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충주문화원(원장 유진태)에서 주관하였고 충주시가 후원하였다. 충주시 우륵국악단의 장중한 제례악에 맞춰 조길형 시장과 이종배 국회의원, 목성수 충주경찰서장, 안영석 재향군인회장, 신립장군 후손인 평산 신씨 종회장, 김여물 부장 순천김씨 후손회장 순서로 헌화와 분향이 이어졌다. 소나무 숲 앞에 우뚝 세워진 팔천고혼위령탑은 높이 15m, 기단부 지름 18m 규모로 2003년에 건립되었다. 탑신 상단부의 혼 불은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모습으로, 하단은 신립 장군과 4인의 군상으로 최후를 맞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호국 충절을 상징하고 있다. 팔천고혼위령제는 조선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옥쇄작전(玉碎作戰)을 감행한 충장공 신립(1546-1592)장군과 김여물(1548-1592)부장을 비롯해 8천여 명의 군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제이다. 왜군은 조총과 같은 신식 무기와 조련(調練)된 군사력 앞에 배수진을 치며 위국과 충절의 단심만으로 대항해 조선군의 용맹을 떨쳐 보였던 8천여 명 의군들의 뜻을 받들고,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음력 4월 28일 위령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문화원장, 충주시장, 국회의원의 추념사, 추모 헌시 낭송 등의 순서로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유월을 호국보훈의 달이라 하는데 현충일과 6·25 한국전쟁 등이 있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님들 덕분에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국민의 도리이자 당연함이다. 기마장군 이었던 신립장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략전술을 잘못 세워서 중앙에서 내려온 4천 명의 군사와 인근 지역민으로 구성한 4천여 명이 투혼을 발휘했으나 지형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전투에 임하다가 패하였다. 혹자는 신립장군은 패장으로 역사적으로 평가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패전의 역사도 역사로 기록되어 후손들에게 애국심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하는데 위령제에 학생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시민들의 참여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반성할 부분이다. 현충일이 무슨 날이냐는 질문에 "쉬는 날이요"라는 답을 하는 젊은 학생세대들이 많았다는 뉴스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올해처럼 징검다리 연휴가 되어 여행이나 캠핑을 즐기는 세대들에게 어떻게 호국정신을 넣어주어야 하나? 가슴 답답하기만 하다. 동족상잔의 6·25한국 전쟁도 UN군이 16개국이나 싸워주었기 때문에 반쪽의 대한민국이라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북한공산당의 적화야욕은 70년이 넘었는데도 변하지 않고 도발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우리 국토는 우리가 지키는 자주국방의 국력을 길러야 한다. 국방은 주인인 국민의 정신력이 무기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라를 빼앗는 전쟁은 과학문명의 발달로 핵을 보유하며 위협을 가하고 있는데 만약에 핵전쟁이 발발한다면 인류의 멸망이 올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431년 전의 탄금대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였다고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교훈으로 삼아야할 교육 자료를 만들어 우리 지역 학생들에게 가르쳐서 호국정신을 굳건히 새기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라를 지키다 먼저가신 호국혼령들에게 후손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고 내 나라를 길이길이 지키며 민족의 자긍심을 품고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국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