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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0.11.14 15:33:2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성낙수

한국교원대 교수·외솔회 회장

'광화문'은 우리의 얼굴이자, 역사다. 고려를 쓰러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수도를 한성으로 옮기기로 하고, 1395년 풍수지리에 밝았던 정도전의 주장으로 북악산 밑에 주궁인 경복궁을 세웠는데, 그 궁궐 정문의 이름을 '사정문'이라고 했다가, 세종 때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풍수지리가 맞는 탓일까· 불에 약할 것이라는 예측과 같이 여러 번의 화재를 겪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이 1864년 흥선대원군의 재건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으며, 국권을 잃어버린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시켰는데, 6·25전쟁 때 타버려서, 1969년에 다시 복원시켰다. 그 때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휘호로 현판을 만들어 40여 년 간 걸려 있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린 후 2006년부터 광화문 복원과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3년 8개월이라는 세월이 걸려 완성하였으며, 현판은 1867년에 공사감독관이자 훈련대장인 임태영의 쓴 것을 디지털로 복원하여 달았다. 이 현판이 몇 달도 안 되어 여러 곳에 금이 가 버렸다고 한다.

지금 세종로 네거리에서 인왕산쪽을 바라다 보면, 왜 '광화문'이 우리의 얼굴인지를 알 수 있다. '광화문' 뒤로는 인왕산에 큰 용이 한 마리 웅크리고 앉아 서울을 내려다 보는데, 그 왕방울 같은 두 눈과 코, 입이 장엄하다. 그 밑에 경복궁이 자리를 잡았는데, 앞에는 이순신장군이 장검을 짚고 서 있으며, 그 뒤에는 세종대왕이 떡하니 의자에 앉아 계신다. 어느 풍수지리가의 말처럼 우리의 국권을 빼앗았던 일본은 지금도 광화문 왼쪽에 대사관을 세워놓고, 광화문을 흘깃거리지만, 한국의 중요 기관들이 거의 다 그 곳에 몰려 있으니, 못된 욕심을 내어도 소용이 없다.

이런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자리한 '광화문'이 왜 '門化光'이냐고 항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우리의 글자가 있는데 어떻게 한자를 쓰느냐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의 표기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인데, 왜 그 반대인 중국식으로 쓰느냐 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진짜 글씨가 아니고, 왜 가짜를 써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혹자는 한자로 써야 의미를 알 수 있다고 할지 모르나, 이미 육백 년 간 써온 이름은 원래 의미와는 관계없이 불리는 것이니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으며, 중국식으로 썼으니, 오히려 그 뜻은 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모사품은 예술로서도 가치가 없는 것인데, 설혹 디지털로 복원했다고 해도 진짜가 될 수 없으니, 조금 모자란다 해도 진짜 글씨를 거는 것이 옳다.

이미 우리는 문화재 보호에 관한 한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이미 2년 전에 그 위용을 자랑하던 '숭례문'이 한 미친 이에 의하여 속수무책으로 불타 버렸으며, 나라의 도장인 국새를 만든답시고 거금을 들였는데, 가짜 장인이 가짜 도장을 만들고, 거기다 여기저기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니 어이가 없다. 그리고 수많은 문화재들이 외국인들에 의하여 해외에 가있는데도 찾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런 판에 또다시 광화문 현판이 졸렬하게 만들어져 걸린 지 몇 달이 안 되어 금이 갔으니, 보통 창피한 일이 아니다. 만든 이들은 나무 탓을 하거나, 시간 탓을 하는 모양인데,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옛날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만들 때에는 딱딱한 나무를 선택하여, 판자로 잘라서 소금물에 넣어 삶아 그늘에서 말려서, 옻칠을 하는 등 온갖 정성을 들였으니, 오늘날까지도 멀쩡하게 잘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야 하는 것을 금강송이라고 베어다가, 졸속으로 말려 붙여서 글자를 새겨 걸었으니, 탈이 아니 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외국인들이 세종로에 와서 광화문을 보고 물을 것이다. "저 글자는 한국 글자입니까·, 저 현판은 왜 금이 갔습니까·" 이럴 때 무엇이라고 답변해야 하나· "우리나라는 고유의 글자가 없어 한자를 썼습니다.", "우리나라는 좋은 나무가 없고, 기술이 없어 금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도 후세에 자손들이 뭐라고 할지가 더 궁금하다. "왜 21세기 초에는 우리나라가 중국식 표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까· 명필이 없어서 서툰 디지털로 복원했을까· 기술이 얼마나 없었으면 저렇게 금이 갔을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광화문' 현판을 한글로 복원하자. 현대의 명필을 모셔다가 써달라고 하든지, 세종 시절에 나온 활자로 찍든지, 그 때 나온 책들에서 집자를 하든지 해서, 정말 우리말로 된, 우리 글자로 써진 현판을 달자. 우리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외국인들에게 창피하지 않도록, 우리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광화문' 현판을 다시 만들어 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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