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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현 학예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출근 길 보슬보슬 내리던 아침 비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누구나 이런 날이면 가끔씩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되는데, 바로 첫사랑이지 않을까 싶다.

나에게도 역시 특별한 첫사랑이 있다. 실은 발굴 조사로 인연이 된 고려시대 먹으로, 아직도 설레는 느낌은 여느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첫사랑보다도 더 특별하다.

그 인연은 12년 전 바로 이맘 때 청주 명암동에서 비롯된다. 현재 이곳은 국립청주박물관 앞을 지나는 편도 3차선의 시원한 도로가 이어지고 있다. 당시 청주시에서는 동부우회도로를 건설 중이었고, 공사 구간 내 과수원으로 경작되던 한 구릉의 유적을 국립청주박물관이 조사를 하게 되었다.

본래 예전의 발굴 작업은 비가 오는 날이 휴일이었는데, 한 여름 늦장마로 비가 며칠 오는 바람에 조사를 하지 못하다가 뜨거운 7월 태양 볕 아래서 만나게 되었다.

검고 작은 한 물체가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한 무덤 내부에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무더운 날씨로 인해 흙도 마르고 해서 작은 분무기에 물을 담아 조심스레 주위에 뿌려가며 그 모습을 조금씩 찾아내었고, 처음 보는 유물이라 갈수록 그 호기심은 더해갔다.

유물의 형태를 완전히 드러내자 길이 약 11cm, 폭 4cm 정도 크기의 검고 길쭉한 물체가 나타났다. 바로 '단산오옥(丹山烏玉)' 글자가 있는 고려시대 먹이 천년 가까운 세월을 뒤로 하고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비록 두 개로 동강 난 채 발견되었지만, 붉은 점토질의 흙 속에서 유난히 곱게 느껴지던 검은 빛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마지막 아래쪽의 '옥(玉)'자는 사용으로 인해 닳아져 맨 위쪽의 '일(一)'획 만이 남아 있었고, 위쪽 가장자리는 먹집게로 집어 쓴 흔적도 남아 있었는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먹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도 하여 매우 놀랍기만 하였다.

'단산오옥' 먹은 고려시대 먹으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먹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에서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단산(丹山)'은 현재 충북 단양의 옛 지명이며, '오(烏)'는 '검다'는 뜻으로서 '오옥(烏玉)' 또는 '오옥결(烏玉·)'은 먹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단양의 토산품 가운데 가장 좋은 품질의 먹을 '단산오옥(丹山烏玉)'이라 일컫는 내용이 있어 문헌사료와 발굴 자료의 일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함께 출토된 동전과 글자가 새겨진 젓가락 등의 유물을 통해 먹의 제작연대 및 당시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종이, 붓, 벼루와 함께 문방사우(文房四友)로 불리는 먹은 당시 품격 있는 생활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유물이다. 따라서 크기는 작고 화려함은 없지만 이 유물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더욱이 이 먹이 청풍명월의 고장인 충북에서 만들어졌고, 충북에서 출토된 점은 이 고장의 문화적 수준과 전통을 알려주는 소중한 문화 산물이라 하겠다.

이렇듯 특별한 '단산오옥' 고려 먹이 나에게도 특별한 첫사랑이 된 것은 큰 행운이다. 또 첫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잊기 마련이라 하는데,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첫사랑과 10년을 함께 했으니 그 애착은 각별하다.

한편 청주 명암동유적 역시 나에게 있어 모든 것이 첫 인연이 되는 소중한 기억이 있다. 고향이 청주인지라, 첫 인연이 된 박물관이 국립청주박물관이며,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발굴 시작부터 마무리 보고서까지 모든 과정을 처음으로 맡아 조사한 유적이 바로 명암동유적이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처음 확인된 고려시대의 먹인 '단산오옥' 먹을 명암동유적에서 첫사랑으로 인연을 맺었으니 더욱 특별하다.

그런데 첫사랑과의 짧은 이별을 멈추고 반가운 소식을 접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근무지를 옮긴 지 얼마 안 된 작년 7월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실 개편으로 '단산오옥' 고려 먹이 서울 나들이를 한 것이다. 무더운 한 여름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설레기만 하였다. 서울에 머무르는 기간이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으나, 지금도 가끔씩 궁금하여 전시실을 찾고는 한다. 여하튼 '단산오옥' 고려 먹은 전생에 나와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먹은 내게 처음이라는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품격과 예향의 멋 때문에 첫사랑의 인연이 닿지 않았을까 한다. 박물관을 찾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을 것이고, 각자 선호하는 유물이 있을 터이나 첫사랑의 유물을 만들어 봄은 어떨까. 무심코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는 것 보다는 설레는 발걸음이야 말로 또 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오후 나는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첫사랑 '단산오옥' 고려 먹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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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