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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낙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외솔회 회장

6월은 우리 세대들에겐 정말 뜻 깊은 달이다. 광복 후 태어나 아직 어릴 때 '6.25전쟁'이 터졌다. 아버지 나이 되시는 분들은 갑자기 영장이 나와 군으로 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자로 돌아오거나, 상이군인이 되어 오시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늘에선 'B29'가 날아다녀서, 밤에는 등잔불도 켜지 못했다. 불을 보면, 폭탄을 투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우리들은 밤에 무서워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북한의 어린 인민군들이 많이 죽어, 그 영혼들이 밤에 하늘에서 상여를 메고, 북쪽으로 간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그래도 시골에서 목숨을 건진 이들은 행운아들이었는지 모른다. 그 전쟁통에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고향을 빼앗기고, 부모를 잃고, 장애인이 되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우리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에 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교과서도 운크라에서 보내준 돈으로 만든 것이었고, 학용품도 외국에서 보내준 구호품이 대부분이었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으니, 유엔에서 주는 분유를 간식으로 학교에서 끓여주었다. 가끔 그것을 가루로 나누어주면 집에서 쪄서 먹었는데, 오래 되면 돌처럼 굳어졌지만, 침으로 녹여서라도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자라 4.19, 5.16을 겪었고, 고등학생일 때에 '한일 국교 정상화'라는 것이 이루어지더니, 그것이 굴욕적이라 하여 고등학생들까지 데모를 하였다. 당시의 권력자들은 나라를 건지는 일이라 그렇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잘못은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 그 때 이른바 '6.3세대'라는 분들이 데모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현재 그들이 이 나라에서 큰일들을 하고 있다.

시위하는 일은 우리들의 대학시절에도 일상화되어, 3월에 개학이 되면 등록금을 내고, 한 달 동안 빈둥빈둥 대다가, 4월부터 데모를 시작하면 6월까지 계속되었고, 그대로 방학으로 이어졌다. 9월에 다시 개학을 하면, 또 데모를 시작해서 얼마 되지 않아 조기방학을 주거나, 위수령 등이 내려져 강제로 대학 문이 닫혔다. 이런 과정이 해마다 반복되었음은 물론이다. 군사독재 반대, 3선 개헌 반대, 부정선거 규탄 등으로 이어지는 60년대는 정말 암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70년대는 아예 유신정권으로 이어져, 나라 전체가 암흑천지로 변해 버렸다.

1979년, '10. 26사건'으로 유신시대가 끝을 맺나 싶더니, 80년대에도 군사정권은 이어졌고, 억압과 공포의 분위기는 전보다 더해졌다. 급기야 1987년 6월에는 전국적으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벌어져, 드디어 민중에게 정권이 돌아오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광복 이후 이런 과정을 겪어온 까닭에 '4.19세대'부터 '386세대'에 이르도록 모든 세대가 각각 이 나라의 민주화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큰소리치는 것도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 제 각각 그들이 젊은 날에 큰일들이 있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한 번쯤이라도 데모를 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투쟁과 노력이 있었으므로,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가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우리들은 6월이 돌아오면, 젊은 날의 낭만과 회한에 젖는다. 그리고 눈물과 재채기를 유발시키던 그 독한 최루탄 가스 냄새를 맡는다. 그 당시에는 대학뿐만 아니라, 대학이 있는 거리마다 그런 최루탄 가스가 길바닥에 남아, 일 년 내내 그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가로수에도 달려 있다가 바람이 불면, 다시 그 위력을 떨쳤다. 우리를 괴롭히던 그 냄새가 이제는 오히려 그립고 향기로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 시대에도 젊은이들은 누구나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으로서 '독재ㆍ유신ㆍ군사 정권'을 반대하는 운동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월남전에 가서 피와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면서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고, 어떤 이들은 독일 탄광에 가서 석탄을 캐고, 어떤 이들은 그 더운 중동에 가서 돈을 벌었다. 꽃다운 젊은 여성들도 독일에 간호원으로 갔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열악한 환경과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산업전선에서 젊음을 바쳤다. 그 덕분에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이 정도의 경지에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이 끝나고, 온 세상에 활력이 넘치는 6월이 돌아왔다. 그리고 한바탕 소란스럽던 선거판이 끝나고, 각 광역단체장, 교육감을 비롯하여 많은, 다양한 일을 담당할 분들이 뽑혔다. 누구나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의 발전에 모든 역량을 다 바치겠다며 사자후를 토했고, 어떤 분들은 우리나라의 교육을 현대화ㆍ민주화ㆍ능률화 시키겠다고 굳게 다짐하기도 하였다. 그런 약속을 믿고 유권자들은 그들을 기꺼이 뽑았다. 그 분들 중 누구도 이 나라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미래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수십 년 간 정말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그리고 열의와 투쟁이 있어, 오늘날의 우리가 존재함을 돌아온 이 6월에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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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