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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산책로 매화나무 가지에 올망졸망 꽃망울이 맺혀있다. 수줍은 듯 발그레한 미소로 소곤거린다. 아마도 봄 이야기를 시작하는 모양이다. 벌써 꽃이라니.

마음이 설레고 분주해진다.

어느덧 황혼 육아 8년 차다. 딸이 출산하고 일 년간 육아휴직이 끝난 뒤부터 나는 조부모 돌봄 반열에 서게 되었다. 손주 육아는 육체의 수고가 따르지만

아이로 인해 누리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다. 언제 크나 하며 아이의 몸과 정신이 건강하길 바라며 진심을 담았었는데 벌써 초등학교 입학이다. 요 며칠 유치원 졸업을 앞두고 외손녀는 행사준비로 춤과 노래에 빠져있다. 내가 어렸을 적엔 후배들의 애절한 송사와 졸업생의 답사에 눈물을 흘리며 한바탕 울음바다를 이루었었다. 격세지감이랄까, 아이가 들려주는 졸업가도 생기발랄하게 들린다. 결핍을 모르는 세대이다 보니 맑고 순수한 동심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적어 왔다는 외손녀는 꽃 선물을 해야겠다며 하얀 종이 위에 송이송이 꽃을 그려놓았다. 그림 꽃송이를 가위질해서 오려 낸다. 한 움큼 종이꽃을 오려놓고는 다발로 묶고 리본을 달아야 한다며 풀을 달라고 했다. 나는 내 유년기의 필기구를 떠올리며 딱풀 대신 밥풀 떼기를 줘 보았다. 나의 의도된 행동에 아이는 의아해하더니 밥알을 문질러서 종이꽃 다발을 만들어 냈다. 종이꽃에서는 외손녀의 향기가 풍기는 듯했다.

구시대의 발상일까? 편리하고 고급스러운 학용품이 넘쳐나건만, 심연에 간직한 나만의 정서를 손녀에게 심어주고 싶어 문방구로 갔다. 새 공책 냄새 같은 종이 냄새, 고무 냄새, 플라스틱 냄새가 섞여 난다. 아주 오랜만에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연필 깎는 칼을 샀다. 이 자질구레한 것들이 소소한 추억을 부른다. 사랑이 많으시던 아버지는 늙고 뭉툭한 손으로 저녁마다 연필을 깎아주셨다. 필통 속에 동글동글하던 몽당연필이 말을 걸어오는 듯 기억 너머로 아롱진다. 어둑한 사랑으로 결핍을 채워주시던 부모님의 손길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툭하면 부러지고 조금 눌러서 글씨를 세게 쓰면 으레 공책이 찢어지던 기억들…. 비루한 일상에도 어쩌다 필통 속에 나란히 누워있는 기다란 새 연필을 볼 때면 마음은 부자가 되고 학업에 대한 욕구가 절로 샘솟았다.

쓰면 쓸수록 닳아 없어지는 연필은 글씨만 남기고 마침내 소멸해가는 운명이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생애는 몽당연필과 흡사하다. 어려서 어머님을 여의고 역사의 격동기를 겪으며 척박한 땅에서 사셔야 했던 가난한 농부의 삶은 얼마나 비통했을까, 속으로 삭였을 아버지의 눈물이 내 속에 강물 되어 흐른다. 오직 자식의 안일을 위해 일생을 소진하신 아버지는 한 자루의 연필 아닌가, 가슴이 먹먹해 온다.

아이가 하원 해 오기 전에 연필을 깎아놓기로 했다. 연필을 잡고 비스듬히 칼질하는데 플라스틱 필기구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고유한 나무 향기가 흐른다. 연한 냄새가 부드럽고 좋다. 숱한 기억이 연필 끝에 머물다 간다. 흑심을 살살 갈아 놓고 나니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몽당연필을 쥐고 작은 꿈을 그리던 소싯적 풍경이 눈에 펼쳐진다. 돌아보면 비록 화려하지 않아도 추억은 아름답고 소중한 선물이다. 이제 떨리는 마음으로 초등학교라는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손녀에게 손편지를 쓴다. 종이와 맞닿은 연필심의 감촉이 보드랍다. 자판만 사용하다 오랜만에 연필을 쥐고 손글씨를 쓰려니 마음가짐이 새롭다. 할미의 마음을 담아 사랑하는 손녀에게 꿈과 용기를 줄만 한 문장을 적어두고 기다렸다.

내 아버지가 그랬듯이 아이에게 필통을 건네며 몽당연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는 하얀 종이 위에 뽀글뽀글한 사람을 그려놓고는 할미 최고라며 엄지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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