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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봄이 오려는 걸까, 우산 위로 또록또록 내리는 겨울비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에 연일 포근한 날씨는 삼한사온의 기후 현상도 무색하게 한다. 내가 어렸을 적 겨울은, 유난히 일찍 와서 오래 머물다 갔다. 산과 들이 온통 하얗고 긴 바람에 마른나무들은 길게 울었다. 아담한 농가의 마루 끝에 서면 이엉을 엮어 올린 흙담 위에 참새들이 찾아와 햇살을 즐기고 마을 어귀 큰 연못은 쪽빛으로 얼어있었다. 흩뿌리는 눈을 맞으며 온종일 얼음을 지치고 놀던 옛 동무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푸른 연기가 흐르는 초저녁이면 쇠죽 끓는 아궁이에 삭정이 타는 냄새가 향기로웠고, 가마솥 언저리에 시루 번처럼 누워있던 어린 날 해진 양말들의 잔상은, 겨울이면 내 가슴에 찾아와 머물다 간다.

명절이 가까운 탓일까, 가난하고 비루하던 유년의 기억들이 시간의 무늬를 드러낸다. 농한기를 보내시던 어머니는 설을 앞두고 떡을 하고 엿을 고느라 분주하셨다. 아이들은 긴 겨울방학의 지루함에 모처럼 명절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었다. 설빔과 세뱃돈과 명절에만 맛볼 수 있던 기름진 음식들...빈궁한 살림에도 제례에 쓸 술을 빚고 큰 대야에 떡 쌀을 불리던 우물가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나마 너무 가난하여 떡을 못 하던 친구의 애잔한 설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시리다. 아침 일찍 리어카에 싣고 시내 방앗간으로가신 부모님을 기다리며 동구 밖을 서성이던 소싯적 기억은 어느새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방금 뽑아온 흰떡에 조청을 찍어 먹으며 온 식구들이 행복해하던 소소한 설 풍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래 떡을 썰며 덕담을 들려주시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설날 떡국을 먹는 풍속은 "긴 가래떡은 장수의 복을 기원하고, 흰색은 희비로 얼룩진 삶의 흔적을 깨끗하게 하고, 동그란 모양은 두루두루 만사가 형통하기를 기원함이다"하셨다. 배고프고 허기진 세월을 살아내시며 떡국 한 그릇에 복을 갈망하던 선조들의 해학이 재치가 넘친다.

명절은 그리운 이의 편지처럼 마음을 두드린다. 조봇한 씽크대 위에 쌀을 씻어 물에 잠기게 둔다. 불린 쌀을 소쿠리에 건져 차에 싣고 천천히 시골길을 달렸다. 마트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떡을 굳이 힘들게 하느냐고 식구 들이 핀잔을 하지만, 작년에 갑자기 하늘나라로 간 동생을 애도하며 내 손으로 차례 음식과 떡국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삼십 분 남짓 산모퉁이를 돌자 도롱마을 근처에 조그만 읍내가 보인다. 언젠가 노모가 보내주신 떡 맛이 유난히 찰지던 기억에 시골 방앗간을 찾게 되었다. 가게 유리문에 뿌옇게 서린 김이 명절 기분을 낸다. 떡을 하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 시골 노인이었다. 아마도 객지에 나간 자식을 위해 복을 짓듯 정성스레 떡을 빚는 어머니의 심정이 보이는 듯하다. 나도 겸허히 지나간 삶의 궤적들을 들여다보며 차례를 기다렸다. 이윽고 떡메를 치듯 쪄진 쌀가루를 기계 틀에 반복해 내리더니 희고 긴 가래떡이 쫄깃하게 내려온다. 그 위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이 먼 그리움에 쌓인다. 다라에 나란히 누운 떡가래를 보며 어렵사리 설을 쇠던 우리네 조상의 일화를 떠올려 본다.

구정 설이 가까이 다가오는데 어린것에게 떡 꾹 한 그릇조차 먹일 수 없는 형편의 가난한 어머니가 있었단다. 마침내 딸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어하던 어머니는 옥양목 치마 한 벌을 전당포에 맡겼다. "이십전이라도 주시오"이 말을 들은 주인이 "치마를 어디에 쓰겠느뇨?" 하면서도 옥양목 치마를 놓고 가라며 삼십 전을 내주었다는 1927년의 따듯한 신문기사 내용이다. 어려운 시절에도 우리 민족의 인정이 살아있음과 자식에게 떡국을 먹이려는 어머니의 애타는 모정이 가슴 뭉클하게 한다.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지금, 우리의 번영과 부흥은 유난히 정이 많던 선조들의 온정과 지혜 때문이 아닌가, 올 설은 차례를 통해 조상들께 인사를 하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운수대통을 기원하는 행복의 설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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