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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독신자 아파트에 홀로 사시는 김 할머니는 아들의 가난이 못 배우고 가난한 부모 탓이라며 가끔 회한에 젖는다. 푸석한 머릿결과 거뭇거뭇한 검버섯에 깊게 패인 주름살은 암울한 세대를 살아오신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더욱 같아 애잔하다. 지병인 혈압과 당뇨 때문에 우리 약국에 오신지가 어느덧 이 십 여년이 넘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한 세월의 무게는 단골손님이기보다 허물없는 말동무사이도 되고 인생의 고매한 스승이 되기도 한다.

팔순이 지난후로 노구의 몸을 건사하기가 힘들고 사는 게 귀찮다고 하시는 할머니는 고쟁이 속의 손지갑 외엔 늘 맨손이셨다. 이른 아침 창문너머로 문 할머니와 이 할머니 그리고 김 할머니 세분이서 네모 가방을 들고 가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옆구리에 가방을 끼고 어디론가 바삐 가시는 세 할머니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주간보호 센터에 가시려나, 아니면 약장수 구경을 가시는 걸까, 가방을 드신 모습이 자못 궁금했다.

오후 네 시쯤, 김 할머니가 처방전을 갖고 약을 지으러 오셨다. 아무래도 가방속이 궁금하여 곁눈질로 들여다보니 웬 공책들이 낯설게 보였다. 약을 담아 드리려는데 몽당연필과 지우개도 보인다. 떼구르르 굴러 나온 연필을 보며 멋쩍게 웃으시던 할머니는 "다 들통이 났네 그려" 하시며 요즘 공부방에 다니신다고 하셨다. 동사무소 안에 있는 공부방은 부녀회에서 마련해준 공간이란다. 배움의 때를 놓친 무학에 문맹으로 살아오신 노인들을 위해 한글을 가르쳐주는 방이었다. "한평생 제 이름도 못 쓰고, 까막눈으로 살다 가는 줄 알았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모서리가 헤진 공책을 펼쳐 보이는 만학의 할머니는 예전과 다르게 생기가 넘쳤다.

가갸 거 겨 오 요 우 유 으 이, 빈칸을 빼곡이 메운 할머니의 필체는 그간의 설움을 삭이듯 너울너울 행복한 날개 짓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여든이 넘은 고령에 한글 공부를 시작하셨을까, 자식들한테 털어 놓지도 못하고 긴긴 세월 까막눈으로 산 세월이 너무 억울하다며 눈물을 글썽이신다. 제 엄마가 한글을 모르는 것을 알고 아들은 또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을까… 시리고 아픈 할머니의 고백에 가슴이 먹먹해 왔다. 이번에는 김경덕 (가명)이라고 쓰여 있는 일기장을 보여주신다. 꾸밈없이 사실그대로 써 내려간 할머니의 소소한 이야기는 한 구절 한 구절 이미 한편의 시가 되어 있었다. "있지, 더 열심히 해서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손 편지를 써보는 게 내 소원이여"하시는 말씀에는 깊게 서린 한과 새 희망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몇 해 전, 기억의 서랍에 간직한 추억들을 산문집으로 엮어보고 싶은 마음에 C대학의 평생교육원 수필 창작 반에 등록을 하였다. 예순이 넘은 늦깎이의 창작수업은 문학소녀를 꿈꾸던 날의 바람보다 훨씬 어려운 고뇌?의 시간이었다. 한 문장을 쓰기위해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공연히 세월만 허비하는 것은 아닌지 초조하기도 했다. 어느 때는 흐르는 물처럼 매끄럽고 순조롭게 글이 완성되지만 때로 나의 재능의 한계에 부딪쳐 낙심하고 노트북을 덮는 일이 다반사였다. 게다가 과장된 몸짓과 현란한 기교는 나의 문장들을 치기에 빠지게 하고 쓰다만 토막글들은 아직도 퇴고를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를 위한 나의 심상엔 언제나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가슴을 짓누르기도 한다. 때로 가슴속에 있는 시상과 내가 쓴 문장사이에 감정과 생각이 왜 이렇게 어설플까 하는 괴리감을 느낄 때도 있다. 아마도 좋은 글이란 화려한 수사보다 다소 어설프고 투박하더라도 가식 없는 진솔한 마음이라면 더 깊은 울림을 주지 않을까, 언제쯤 감동을 줄만한 따듯한 글을 쓸 수 있을 런지….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며 인격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 글대로 살고 있느냐고 물어보시는 노교수님의 질문에 글쓰기는 나를 정화시키는 통로이기에 오늘도 나는 습작을 이어간다. 때늦은 김 할머니의 학구열에 내 글쓰기의 초심을 들여다보며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가식이 아닌 진솔한 마음으로의 작문을 꿈꾸며 다시 펜을 잡는다.

담장 너머 산수유 가지마다 노란 속살을 보이며 꽃망울이 돋은 봄이다. 할머니의 봄 편지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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