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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찾아서 中 졸본성을 찾아서

산정수리에서 바위 뽑아 올려 하늘 고인 듯

  • 웹출고시간2008.11.16 20:00:1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 갈수록 고구려의 체취가 강하다. 나라가 멸망한지 1천500년이 지났지만 산하(山河)는 그대로 있다. 세월의 풍상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고구려 성(城)들은 압록강 언저리에서 이어달리기를 하며 요동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만주벌에서 강력한 제국을 형성했던 고구려는 중국과 힘겨루기를 하다 700년 사직에 마침표를 찍었고 중국의 수(隨)나라, 당(唐)나라도 고구려를 침입하다 종말을 고하거나 국력이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두보의 시구처럼 나라는 없어졌으나 고구려의 산과 들은 2천년의 풍파를 굳굳하게 견뎌내며 옛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우리나라는 난생설화권(卵生說話圈)에 속한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으며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高朱蒙) 역시 알을 깨고 나왔다.

동부여의 금와왕은 태백산맥 남쪽 우발수에서 사냥을 하다 강가에서 울고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부인이다. 유화부인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통상적인 남녀관계가 아니라 햇빛에 의해 임신을 한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하늘과 땅의 조화이고 햇빛과 물의 결합이다. 금와왕이 거둔 유화부인은 사람이 아닌 닷 되들이 크기의 알을 낳았다. 그 알이 불길하다 하여 짐승우리에 던졌으나 개, 돼지들이 이를 피했고 산에 버렸으나 들짐승도 그 알을 경배했다. 유화부인이 정성껏 알을 품자 건장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곧 주몽이다. 주몽은 7세 때 부터 활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

금와왕은 주몽을 왕자대접 하였으나 대소왕자 등 금와왕 아들들의 시샘과 질투는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마구간 지기로 전락한 주몽은 새나라 건국이라는 웅대한 꿈을 안고 온갖 수모를 견뎌냈다. 마구간에서 준마를 점찍어 두었다가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부여를 탈출, 남행을 하였다. 압록강 지류인 비류수(홀천)에 이르러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주었다. 드디어 졸본 땅을 도읍으로 정하고 졸본성을 쌓으니 이 나라가 곧 고구려이다. 이 때 비류국의 토착세력인 소서노(召西弩)라는 여인이 주몽의 건국을 도와주었다.

졸본성을 배경으로 답사반 일행이 포즈를 취했다.

답사 일행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卒本城)을 찾아 야간 행군을 펼쳤다. 심양에서 졸본성이 있는 요령성 본계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까지는 버스로 4~5시간이나 걸린다. 가로수의 밑둥에 흰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차량의 안전운행을 위해 반사경 역할을 하도록 고안한 것이다. 휴게소가 별로 없는 고속도로에 주유소는 쉴 참 역할을 했다. '중국석유(中國石油)'라고 간판을 붙인 주요소에선 차량급유뿐만 아니라 오토바이용이나 가정용 석유를 판매하는데 기름이 필요한 사람들은 플라스틱 용기에 얼마간의 석유를 담아간다.

고속도로가 아닌 마을 곳곳의 도로에도 차단기가 설치돼 있다. 주민들은 차량들로부터 통행료를 받아 도로 보수에 나선다. 비포장 길을 통과할 때도 차단기는 어김없이 손을 내민다. 자정 무렵에야 버스는 환인에 도착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도로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1990년대에 환인이나 집안으로 갈라치면 철도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에 비하면 큰 발전이다.

만주벌의 아침 해는 대개 들판에서 솟는데 환인의 해는 우리나라처럼 산에서 솟는다. 첫 도읍지 환인은 산골도시다. 만주족자치주로 인구는 30만 명에 이른다. 한 때는 조선족이 5만 명이나 되었으나 이제는 5천 명 정도다. 고구려, 발해의 후예들이 문전성시를 이뤘으나 이제는 다른 도시로 이주했거나 코리아 드림을 찾아 한국행을 선택한다. '고려 구육'이라는 간판도 보이고 고려성 호텔에는 '고려성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는 글귀를 한글로 표기해놓았다.

우리는 주몽의 첫 도읍지를 졸본성이라고 부르나 중국에서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통칭한다. 또 금석문이나 옛 기록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 표기되어 있다. 오녀산성에는 힘센 다섯 여인이 맹수를 물리쳐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어디까지나 이러한 전설은 우리나라의 '남매축성설'과 달리 중국 측 시각에서 발생한 것이다.

환인에서 8km쯤 산길을 돌아드니 졸본성의 웅장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치 산 정수리서 바위를 뽑아 올려 하늘을 고인 듯하다. 해발 820m에 달하는 바위산으로 무려 200m 높이의 바위가 산성을 에워싸고 있다.

산 중턱까지는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버스에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스티커가 큼지막하게 붙어있다. 주차장에서 부터는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성으로 진입할 수 있다. 노약자를 위해서 돌아가는 길도 만들어 놓았다. 서쪽 돌계단이 몇 개인가 세며 올라갔는데 도중에 까먹었다. 족히 1천여 계단은 되는 듯하다. 숨이 차면 난간을 붙들고 잠간씩 쉬는데 시멘트 난간이 너무 차가워 손이 얼얼하다.

졸본성의 서문 터 문 지두리와 초병이 숨는 감실모양의 피신처.

마지막 계단 근처에는 천창문(天昌門)이라는 붉은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하늘로 이르는 문'이라는 뜻이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오르니 서문 터가 나온다. 서문 터의 문 지두리를 살펴보니 매우 특이한 형태다. 바위에 ㄴ자 홈을 내어 문을 달았던 흔적이다. 문 터의 구조로 보아 안에서 밖으로 밀어 열도록 고안된 것이다. 밖에서는 아무리 밀어도 성문을 열 수 없게 해놓았다. 이런 구조는 보은 삼년산성에서 이미 발견되었는데 수 천리 떨어진 졸본성에서 나타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고대에, 성 쌓는 기법을 서로 교류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그 문터를 지나면 성벽을 오목하게 쌓아 놓은 감실(龕室)모양의 초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초병이 이곳을 들락거리며 파수를 보던 곳이다. 그 오목한 곳에서 숨어 있다가 불심검문을 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구조물은 처음 보는 형식이다. 졸본성은 계곡을 감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인데 오르는 길은 험난하지만 산성 내부는 제법 넓다. 동서축이 200여m에 이르고 성벽 둘레는 1,110m에 달한다.

성내는 곳곳에 발굴조사 흔적이 있다. 근년에 환인현 문물관리국에서 텔레비전 송신대를 설치하다 발견된 유물을 조사하였는데 매우 많은 고구려 초기의 유물과 요(遼), 금(金)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왕궁지는 정면7칸 측면 3칸으로 주초석이 남아 있다. 천지(天池)라고 불리는 연못도 있으며 건물 터가 여러 곳에 산재한다. 건물 터에는 구들의 흔적이 완연하다. 벽을 따라 고래를 낸 초기 구들의 형태로 배달겨레의 주거문화와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졸본성의 동쪽성벽. 성 문은 옹성처럼 엇갈려 쌓았다.

전망대에 이르면 산성을 감돌아 흘러가는 혼강(渾江)이 정수리로 밀려오는 듯하다. 험준한 산세에다 산 아랫도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대동구(大東溝)와 혼강은 자연의 해자(垓字)역할을 했고 두 강이 일궈낸 충적 평야는 고구려인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전망대 철책에는 연인들의 사랑을 약속하는 명패가 무수히 걸려있다. 이 명패에다 이름을 적고 자물쇠로 채운 다음 열쇠를 천길 낭떠러지기로 던진다. 그렇게 하면 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것인데 우리의 풍습은 아닌 것 같다.

동쪽 문터는 옹성(甕城)의 형태로 엇갈리게 만들어 놓았다. 옹성이란 성문 앞에 쌓은 작은 성으로 적의 공격을 막는 동시 대각선으로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화강암, 응회암, 편마암 등으로 쌓은 성에 고구려의 이끼가 잔뜩 끼어 있다. 관구검과 모용씨의 침입을 막아낸 졸본성에는 아직도 고구려 병사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평지성인 하고성자. 일부 주춧돌만 남아 있고 배추밭으로 변해있다. 앞 편으로 졸본 성이 보인다.

산성아래에는 오녀성박물관이 있다. 졸본성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가락바퀴, 갈돌, 갈판 등이 전시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 이전, 신석기 청동기 시대에도 인류가 거주한 듯하다. 고구려의 토기는 손잡이가 달려있거나 몸통이 길고 속이 깊다. 유견토기는 토기의 최대지름이 어깨부분에 있다. 초기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유추해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환인에는 졸본성 이외에도 평지성인 상고성자(上古城子)와 하고성자(下古城子)가 있는데 모두 폐허로 변해 있다. 하고성자는 성 기단부 석축만 일부 남아 있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다. 성터는 배추밭으로 변했고 인근 마을은 성 돌을 빼어다 담장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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