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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4.09.22 15:12:15
  • 최종수정2024.09.22 15:12:15
어떤 지역은 유독 전망대가 많은데 이는 고개들이 있어서다. 피반령, 말티재, 염티재, 독수리봉등 전망이 좋은 곳이 많으며 조선시대 역대왕들이 쉬기 위해서 가던 곳이 충북 보은이다.

보은군이 속리산면 갈목리 일원 110㏊에 조성한 속리산 숲 체험 휴양마을은 식당, 숲 속도서관, 공공 이용시설과 한옥·황토·통나무방 등 55실 규모의 휴양·치유시설이 있어 인기가 많다.

말티재는 속리산 체험휴양마을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고개다.
보은은 고려시대까지 보령이라고 불리었던 지역이라고 한다. 태종이 왕자의 난으로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속리산 법주사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돌아오는 길에 지명을 보은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현감이 근무하도록 승격도 해줬다.

보은은 말 그대로 은혜를 갚는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백두대간 속리산의 관문이라는 이곳의 말티재에는 전망대와 꼬부랑길 카페가 있다.

말티재라는 이름에는 여러 유래가 전해진다.

정상부는 해발 약 430m로서 차이가 160m 가량이나 되는 험한 고개에 조선 세조가 속리산으로 행차할 때에 속리산면 장재리에 있던 별궁(현 대궐터)에서 타고 왔던 가마를 말로 갈아탔다 하여 말티재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도 한다.

아래로 이어지는 말티고개를 오르는 길은 자전거, 바이크 동호인들 사이에서 12 굽이 와인딩 코스로 유명하다.

정상부 북쪽에는 주변 산을 걷는 말티재 꼬부랑길이 조성됐고, 남쪽에는 집라인과 숲체험 휴양마을이 설치돼 있다.
보은군에 있는 속리산 숲체험마을에는 다양한 형태의 숙박공간이 있다.

백두대간 보은속리산 깊은 산골에 위치한 숲 체험휴양마을은 건축부터 운영까지 속리산의 특성을 살린 친 환경휴양마을이다.

속리산의 곳곳에 자리한 봉들의 이름을 따서 숙박공간을 만들었다.

진입도로를 포장하고 물놀이장, 다목적 잔디광장을 추가 개설하는 등 시설 보완이 이뤄지며 이용객도 꾸준히 늘고 있는 곳이다.

속리산 숲체험 휴양마을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가면 국립속리산말티재자연휴양림이 있고 우측 위쪽으로 가면 솔향공원 스카이바이크, 속리산테마파크 모노레일, 전통가옥을 살필 수 있는 솔향공원 등이 있다.

힘들이지 않고 속리산의 매력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솔향공원스카이바이크는 거의 발을 굴리지 않고 돌아볼 수 있도록 전동형태로 만들었다.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운영하는 속리산 집라인도 있다.

대상시설은 집라인(8코스 1천683m), 모노레일(866m), 스카이바이크(1천600m), 스카이트레일이다.

속리산은 몇 년 만에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휴양의 산이라는 말에 걸맞게 마음이 편하다.

속리산이라는 이름은 속세로부터 떠나온 산이라는 뜻이며 은혜를 갚는다는 보은이라는 의미처럼 궁합이 어울리는 곳이다.

또한 체험활동 및 산책로들이 잘 돼있어 힐링하기 좋았다.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9월이다. 여름휴가를 떠나지 못했다면 충북 보은 속리산 숲체험휴양마을에서 치유와 힐링을 느껴보실 것을 추천한다.

/ 충북 누리소통망 서포터즈 최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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