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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1.06.17 16:18:51
  • 최종수정2021.06.17 16:18:51

장승구

세명대학교

조선 시대에는 남녀유별이 강조되어서 여성의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 이상으로 주체적 삶을 산 여성이 있어 최근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이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여성이면서도 남자 사대부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성리학을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이들은 조선 최고의 여성 성리학자이자 여성 선비(女士)로서 저술을 남겼다. 임윤지당의 아버지 임적은 충북 제천에서 은거한 적이 있고, 임윤지당은 청주의 옥화에서 살다가 신광유와 결혼하여 원주로 이주하였다. 아이도 하나 낳았지만 일찍 죽고 결혼한 지 8년 만에 남편도 죽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임윤지당은 당시에 남자들만이 하던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여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임윤지당은 인간의 본성은 남자나 여자나 차이가 없고 여성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남녀의 평등을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다. 여성이었지만 학문적 재능이 뛰어나 철학적 논설이나 역사 인물 논평 등 많은 글을 남겼다. 임윤지당이 73세로 세상을 뜨자 사후 3년 만에 그녀의 동생과 시동생에 의해 문집이 출간되었다. 조선시대에 여성으로서 문집을 남긴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임윤지당의 친정 오빠와 동생도 학자로 유명하다. 특히 둘째 오빠 임성주는 조선후기의 최고 성리학자였다. 임윤지당의 동생은 자신의 누님이 '여인들 중의 군자(女中之君子)'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임윤지당은 거울에 새긴 글(鏡銘)에서 "보름달 같은 얼굴에 맑은 태양 같은 결정. 추상같은 기질에 가을 강물처럼 맑은 정기. 마음에 사욕이 없고 밝아서 비추지 않은 것이 없네…. 아!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물건만도 못하구나. 사람이 그만 못한 것은 물욕에 가리운 탓. 무엇으로 가리운 것 떨치랴? 마음을 맑게 하고 사욕을 이길 것."(이영춘 역)이라고 하였다. 거울을 보면서도 외모의 아름다음 보다는 마음을 맑고 밝게 가꾸고자 하는 뜻을 품었던 것이다. 이런 임윤지당의 정신을 이은 또 하나의 여성 선비가 강정일당이다. 강정일당은 제천에서 1772년에 태어나 스무 살에 충주에 사는 윤광연과 결혼하였다. 강정일당은 생업에만 골몰하는 남편에게 학문을 하도록 권유하여 당대 유명 학자인 강재 송치규 문하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남편에게 학문을 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멘토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학문에 힘쓰고 남편을 대신하여 글을 짓기도 하였다. 살림살이가 워낙 어려워서 나중에는 과천과 서울로 이주하여 삯바느질 등으로 힘들게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학문에 힘썼다. 자식을 9명이나 낳았지만 모두 첫 돌 되기 전에 잃어버리는 크나큰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강정일당은 좌절하지 않고 운명을 받아들였다.

강정일당도 하늘로부터 받은 남녀의 본성은 차이가 없다고 보고, 여자도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성인이 되기 위해 13경을 두루 읽고, 역사와 자연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폭넓게 탐구하였다. 강정일당 부부는 조선시대에 살았지만 부부간에 서로 대등하게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가 61세로 세상을 뜨자 남편은 부인이 남긴 시문을 모아서 문집을 만들어 부인의 높은 뜻을 기렸다. 당시로서는 남편이 부인을 위해 문집을 만들어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강정일당의 삶과 학문이 뛰어나고 훌륭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윤지당과 강정일당은 여성 선비로서 봉건시대에 살면서도 가혹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고 주체적 삶을 살았다. 이들은 남녀의 본성이 동등하다고 보고 최고의 인간인 성인이 되고자 각고의 노력을 하여 지식인 세계에 놀라움과 감동을 주었다. 임윤지당과 강정일당 같은 선각자의 여성 권리 인식이 발전한다면 한국사회의 양성평등의식 수준도 한층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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