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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풍길Ⅷ - 연풍에서

하늘 아래 첫 동네, 맑은 볕이 쏟아진다

  • 웹출고시간2013.04.07 15:58:4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숲'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늑해진다. 기억 속의 어느 풍경이 애틋하게 떠올라 숲 속으로 뛰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숲이라는 말이 아름답고 유순하게 들리는 이유는 누구나 그곳에서의 기억을 하나씩 품고 살아가기 때문이며, 숲에 들어서면 도시의 각다분한 삶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을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의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숲으로, 들로 발걸음을 옮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기억이 아니어도 좋다. 어떤 이에게는 가난하지만 순수한 열정으로 살았던 이야기를, 또 다른 이에게는 보물찾기와 숨바꼭질처럼 동심의 세계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사랑과 이별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기억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 이런 기억이 없으면 또 어떤가. 지금 그곳으로 달려가 욕망의 때를 토해내고 숲속의 악동과 춤을 추며 노래하고 새로운 대지의 기운에 몸을 기대면 되는 것을….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연풍이 그런 동네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수식어답게 그 속은 깊은 오지 같지만 다가서면 포근한 고향의 숲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품 같기도 하며,

시인의 집이라도 짓고 오달지고 마뜩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무엇보다도 연풍은 나만의 생명을 키우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빛으로 조용히 반짝이는 햇살과 성경과 은빛물살 같은 내밀함이 있는 곳이다. 신화와 전설과 역사와 신앙과 사람들의 때묻지 않은 삶이 고스란히 스며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숙부께서 내게 그토록 무겁던 입을 열었다. 우리 집안이 눈물겹도록 가난했던 터라 당신께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독학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구두닦이에서부터 신문배달, 중국집 배달원, 공사판 막노동 등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눈만 뜨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그렇지만 당신께서는 단 한 번도 가난을 탓하거나 좌절한 적이 없었다. 젊은 시절은 고난과 역경의 나날이었지만, 그럴수록 내면의 세계는 더욱 강건해지고 흔들림이 없이 질주했다. 마치 장미는 가시가 있기 때문에 아름답듯이 당신의 삶도 가시밭길을 온 몸으로 품으며 살아가니 장미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당신이 오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다 큰 아들 셋이 있는데 그들에게 돈이나 재산, 명예와 직장 같은 현란한 그 무엇을 줄 수 없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이 땅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때문에, 밤낮없이 기도하며 써 내려간 하나님의 말씀을 자식들에게 한 질씩 가보로 물려줄 것이고,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는 보관함을 멋지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사건을 시작으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그 순간까지 고난의 14장면을 표현한 그림과 성경책을 빼곡하게 옮겨 적은 수십 권의 노트 꾸러미를 주셨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고심 끝에 나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이형만 선생의 아들이자 전수자인 이광웅씨를 만났다. 나전장이란 나무로 짠 가구나 기물 위에 아름다운 전복과 조개껍질을 갈아 문양을 오려 붙이고 완성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씨는 옻칠과 자개기법으로 제대로 된 성서함을 만들어보겠다며 6개월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재료를 구한 뒤 12번이 넘는 칠작을 해야 하며, 그 위에 조개껍질로 예수님의 고난 14장면을 하나하나 오려붙이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6개월이 흘렀지만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1년이 돼도 소식이 없었다. 도무지 궁금하고 답답해 전화를 했더니 각각의 면마다 다른 장면들을 꼼꼼하게 담아야 하고, 그 과정 역시 난이도가 높고 조심스러워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단다. 성서함은 다시 1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3개의 성서함마다 자개로 각기 다른 장면의, 십자가 고난의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자개 작업에는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자른 뒤 기하학적 문양을 만드는 끊음질과 얇은 판 모양의 자개로 곡선 무늬를 표현하는 줄음질 기법 모두 동원되었다. 예수님의 마음까지도 읽을 수 있는, 그 시대의 숨막혔던 순간의 미세한 떨림이 느껴질 듯한 착각을 불러올 정도의 정교함과 신비로움을 담았다.

작가는 성서함을 건네주면서 두 번 다시 이 같은 작품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주문한 사람의 뜻이 너무 숭고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작품이 나올 경우 이 작품의 가치가 크게 손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로마교황청이나 천주교 박물관에 가져가더라도 소중한 작품으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했다.

갑자기 집안 얘기를 꺼낸 것은 연풍이 천주교 성지이기 때문이다. 연풍은 아래로 문경새재와 이화령, 위로는 괴산과 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산속의 마을이라서 교인들이 은거를 하거나 이동할 때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1801년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을 탄압했던 이른바 신유박해 이후 교인들은 은거할 곳이 필요했는데 연풍도 그런 곳이었다. 탄압의 불길은 더욱 거세졌고 이윽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처형됐는데 추순옥·이윤일·김병숙·김말당·김마루 등도 이곳에 은거하다 처형당했다. 한국 천주교 103명의 성인 중 한 사람인 황석두(1811~1866)의 고향도 이곳이기 때문에 카톨릭에서는 연풍을 성지로 정하고 성역화 사업을 하였다. 연풍초등학교 옆의 향청鄕廳을 매입해 이 일대를 신앙의 보금자리로 만든 것이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연풍향청은 조선시대 지방관의 행정을 보좌하기 위해 '유향소'라는 이름으로 설치했으나, 1489년(성종 20년)에 향청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고 지방관의 감독하에 운영되었던 자문기관이었다. 이곳에서는 풍기문란을 단속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세금관리와 인재추천 등의 업무를 맡았었다. 세월이 지나 경찰서 주재소와 지서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3년 3월부터 천주교 연풍공소로 사용하고 있다.

잘 다듬어진 성지를 한 바퀴 돌고 나오니 초등학교 운동장의 우람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이 구술치기와 고무줄놀이를 즐기고 있다.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풍경을 품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수옥정 폭포에 다다랐다. 20m 높이의 수직절벽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웅웅거린다. 젊은 남녀들은 절벽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쏟아지는 폭포의 짜릿함을 즐긴다. 햇살이 물살과 함께 합궁을 하더니 눈부시게 부서진다. 나그네도 부서지는 물살에 마음을 맡겨본다. 그 속에 있는 나도 하나의 풍경이 되는구나. 무량하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하산하는 길에 각연사를 들렀다. 오름의 길은 계곡에 포위돼 있다. 거침없이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살과 솟아나는 새순과 숲속의 악동들의 지저귐이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서두르지 말라, 욕심내지 말라, 일의 노예가 되지 말라, 그리고 자만하지 말라며 내게 말을 건넨다. 비로전 풍경에 매달려 앙탈을 부리던 봄바람도 사미승의 목탁구멍 속으로 꼬리를 감춘다. 대웅전 앞에 서니 나는 외롭지도 않고 헛헛하지도 않았다. 백일몽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맑은 기운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야겠다.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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