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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풍길 Ⅲ - 부모산에서

도시의 삶과 때가 묻어있는 이곳에서 지친 마음 다독인다

  • 웹출고시간2013.03.03 18:33:3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가끔 도시의 삶이 '고뇌의 등신불'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누더기 같은 일상의 덫에 걸려 숨막힐 것 같은 삶, 그리고 구린내 나는 복잡다단한 굴레를 훌훌 벗고 싶은 열망에 몸서리치도록 탈출의 꿈을 꾸지 않았나요. 이렇게 가슴 죄어오는 심상함에 지쳤을 때 당신은 어디에서 힘을 얻는지요.

사람들의 취향과 입맛이 제각각일테니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지만 나는 산과 바다와 들과 계곡, 말 그대로 대자연을 벗 삼으며 밀월여행을 즐깁니다. 그리고 대자연에서 만난 각양각색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일상이 힘겨울 때마다 하나씩 튀어 오르곤 합니다. 가벼운 등목으로 새로운 활력을 찾곤 합니다.

지난 주말에는 꽃샘추위 속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을 부모산 정상에서 만났습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도시의 벽을 뚫고 불끈 솟아오르는 순간, 나는 '아, 일출!'이라며 외마디 탄성을 질렀습니다. 하얗게 숨죽이고 있던 산과 들과 도시의 풍경이 하나 둘 그 속살을 드러내고, 구석구석 햇살이 쏟아지는 황홀경을 한참이나 넋을 잃고 지켜보았습니다. 나는 태양의 자궁에서 잉태된 등신불처럼 온 몸이 화끈 달아올랐지요. 이처럼 대자연은 나의 삶을 고민하고 성찰하게 만듭니다. 삶의 희망과 기쁨이 다시 피어나고, 지친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나는 오늘도 회색도시 위로 떠오르는 희망의 순간과 마주하기 위해 들길을 건너고 강가를 지나 산길을 오릅니다. 올 겨울 산길은 유난히 희고 눈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눈이 두툼하게 쌓여 오름의 길이 잘 보이지 않아 헛디디거나 미끄러진 적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설경과 뽀드득 뽀드득 상쾌한 걸음의 마디 마디가 나의 심장소리보다 더 맑게 용솟음치곤 했지요. 벌거벗은 나목이 북풍한설에 맞서 침묵으로 자신을 지켜내는 것을 보면서 각다분한 삶의 이야기에 쉽게 상처받고 다투며 욕망만을 쫓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때로는 부끄러움에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때로는 숲속에 있는 것 자체가 사치라는 생각도 합니다. 눈꽃으로 도열해 있는 산봉우리에 다다르면 더욱 그러하지요.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부모산은 청주의 관문입니다. 가로수터널과 소풍같은 마을과 가르마 길의 논두렁 밭두렁이 심드렁한 방랑자를 맞이합니다. 산 정상에 오르니 이곳의 전설이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먼저 살았을까, 아니면 성을 먼저 쌓았을까. 성을 쌓게 된 연유는 무엇이며 이곳만의 아픈 이야기는 무엇일까. 신화와 전설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 내밀함을 알 수 있겠지요.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부모산은 231m의 낮은 산인데 주봉마을 뒷산이라고도 하며 아양산, 악양산, 아미산 등으로 불리었습니다. 청주에는 동과 서로 두 개의 큰 산이 있는데 동쪽에 우암산이, 서쪽에 부모산이 있는 것입니다. 늘 안개가 낮고 길게 깔려 있어 이따금 신비스러움이 끼쳐오기도 하는데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마을 주민들은 부모산에 성곽을 짓고 피신을 하였습니다. 안개에 덮여 있기에 몽고군의 노략질을 피할 수 있었답니다. 한 번은 성안으로 피신한 주민과 말들이 식수난에 죽을 지경이었는데 갑자기 성안에 샘물이 솟아났습니다. 백성들은 그 은혜가 부모와 같다하여 부모산이라고 했답니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또 다른 전설이 있는데요, 임진왜란 때 이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킨 박춘무 장군이 이 산을 탈환한 뒤 의병들과 머물고 있었습니다. 번번히 박춘무에게 패한 왜장 구로다(墨田長政)는 이 산에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사방에 걸쳐 포위한 뒤 식량보급을 차단했습니다. 박춘무와 의병의 항전이 길어질수록 식량과 물이 부족하여 아사자가 생기는 등 큰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나의 땅, 나의 형제, 나의 이웃이 왜놈들에게 짓밟히다니…. 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박춘무는 눈물을 흘리며 소나무 아래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박춘무에게 호령을 합니다. "일어나거라. 여기서 쓰러지면 푸른 산, 맑은 들녘, 그리고 저 많은 생명들은 어찌할 것이냐. 다시 피는 꽃처럼 아픔을 딛고 일어나거라. 그리고 진격하거라!" 박춘무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머리맡의 소나무를 뽑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거대한 우물이 생기더니 시원한 물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의병들은 용기백배하여 항전했고 당시 내륙 최초의 승전보를 울리게 되었답니다. 지금도 부모산에는 모유정이라는 우물이 있고 상처 많은 소나무가 있는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아픔인지 모유정의 마르지 않는 샘물은 알 것입니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주봉마을을 따라 오르다보면 연화사蓮華寺가 있지요. 고려시대에는 연월사라고 했는데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이후 1920년쯤 복원하였습니다. 당시 스님 한 분이 부모산 일대에 연꽃으로 만발한 풍경이 꿈에 나타났다 하여 연화사로 개칭하였답니다. 주변에 고목이 되어 버린 벚나무와 대웅전의 단청이 단짝이 되어 오가는 사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부모산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의 길이는 1,135m에 달하며 바깥벽의 높이는 6~10m, 안쪽벽의 높이는 2~5m, 성벽의 너비는 7m 내외의 견고한 석축입니다. 이 일대에 백제시대의 회백색 연질토기편, 고구려 계통의 붉은색 격자문 토기편, 신라시대의 화청색 경질토기편이 함께 출토된 것으로 보아 백제 때 처음 축조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산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긴 호흡 몇 번 해 보세요. 멀리는 상당산성과 우암산의 정기가 끼쳐올 것이고, 청주시내가 한 걸음에 달려올 것이며, 가로수길과 오송과 오창과 크고 작은 산길 들길 시냇물길이 정처없는 나그네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낮은 산이라 건방 떨었더니 내려가는 길을 놓쳤습니다. 방황 끝에 마을의 골목길로 하산하는데 아낙들이 뒤꼍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네요. 장독대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고,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저 흑갈색 옹기들 앞에서 수다 떠는 아낙들의 모습이 참으로 맑습니다. 진솔하게 빚었기에 편안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들숨과 날숨으로 추운 날에도 발효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 마뜩합니다. 깨끗한 가슴으로 사랑을 담아낸 아낙들의 마음은 또 어떻겠습니까. 배부른 독엔 술이 익고 장독에 장이 익고 있겠지요. 어머님이 장독대에 정화수 떠 놓고 백일기도를 하던 옛 생각이 났습니다.

ⓒ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마을 입구에는 낮은 저수지가 있는데 가로수터널을 뚫고 달려온 바람이 논길을 따라 여기까지 달려오더니 길옆에 매달려 있는 시래기를 들볶고 있습니다. 논두렁 사이에 뱀꼬리처럼 길게 뻗어있는 냇가의 갈대도 줄거리만 쓸쓸하게 남았습니다. 나는 그 낮고 느리고 오래된 길을 앙큼상큼 걸었습니다.

자연은 하나같이 야위어 보이지만 그 속을 침잠하노라면 봄이 오는 소리, 대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중동靜中動이라고 하지요. 봄은 이처럼 요란스럽게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딛고 자박자박 옵니다.
글 변광섭(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에세이스트)

그림 강호생(화가·충북미술협회장)

사진 홍대기(사진가·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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