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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인문학 - '환상의 빛'

남겨진 자들의 신음

  • 웹출고시간2022.11.07 15:01:06
  • 최종수정2022.11.28 10:08:40

안소현

지역발전연구소함께 대표

10월 29일 토요일 오후부터 TV 뉴스 보도 내용을 보면서 예감이 좋지 않았다.

실외에서 마스크 착용이 해제되고 축제를 즐기려고 거리를 활보하는 화사하고 밝은 얼굴의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그래, 너무 우울했어. N포 세대, Hell 조선, Neet족이라는 오명으로 얼룩진 2~30대 청년들. 오죽하면 남의 나라 축제라도 즐기고 싶었을까?' '그나저나 저렇게 많은 인파가 거리 제한 없이 다니다가 내일부터 코로나 환자가 너무 늘어나겠어.' 이 정도만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저녁에 다시 본 뉴스 보도로 내 심장이 멎을 뻔했다. 까만 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 네 시 경에 잠을 청할 때까지 이태원 압사 사망자가 120명이 넘었다.

쓰러져 잠이 들었지만,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 '어떡해. 어떡해.' 나의 두 딸의 무사를 확인했지만, 그 누군가의 가족은 어떻게 살아갈까.

안타깝고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 죄인이 되었다.

꼬박 사흘을 앓았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팠다.

심장이 조이고 입이 마르고 며칠이 우울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상대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안과 공포로 다가온다. 더군다나 예기치 않은 죽음.

죽은 자의 아쉽고 슬픈 사연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통증을 준다. 가족과 친구들 마음은 얼마나 참담하고 비통할까. 남겨진 가족과 친구들의 망연자실함을 묵묵히 담아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1995년 영화 '환상의 빛: Maborosi, 幻の光'이 떠오른다.
◇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보건복지부 고위 관리의 자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1991)를 찍으면서 혼자 남겨진 그의 미망인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미야모토 테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죽음과 상실을 주제로 첫 장편 영화 '환상의 빛'을 만든다. 원작 소설은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은 서간 문학으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소설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은 1995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황금오셀리오니상)을 비롯해, 가톨릭협회상, 이탈리아 영화산업협회상을 수상한다. 또한 아시아 신인 감독의 등용문인 1995 벤쿠버 국제영화제 용호상을 수상해 세계 영화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외에도 로테르담,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국제영화제 등 다수의 영화제에 초청돼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 죽어서는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

어린 시절 뱃삯도 없이 고향 시코쿠를 향해 떠난 치매에 걸리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에 얽매여 사는 '유미코'. " 죽어서는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라는 말을 남기고 영원히 행방불명이 된 할머니를 붙잡지 못한 죄책감과 상실감은 살아가는 동안 그녀의 내면에 깊숙이 파고든다.
◇느닷없이 찾아온 두 번째 이별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종종 '유미코'의 일상을 혼란스럽게 하지만 '유미코'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 '이쿠오'와의 결혼 후 소소한 행복으로 조금씩 안정감을 찾아간다. 촉촉이 비가 내린 어느 날 아침. 우산을 들고 출근한 남편 '이쿠오'가 늦은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고 기찻길에 뛰어들어서 주검이 되어 돌아오는 비보를 듣는다.

아무 이유 없이 자살한 남편으로 남겨진 유미코와 갓난아기.

◇흐느껴 울지 않는 묵직한 울림의 무채색 동양화

할머니가 행방불명되었을 때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남편 '이쿠오'의 자살 소식에 눈물 대신 흐르는 창밖의 빗물.

슬픈데 울지 않는다. 화면이 온통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백열전구의 빛을 표현해 주는 오렌지색 조명과 푸른 바다. 무채색은 우울하지 않으며 오히려 아름답고 눈부시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린 빗줄기가 오후에 햇빛에 출렁이는 바다가 되어 넘실댄다.

아마 감독은 너무 슬퍼서 울 수 없는 마음의 크기를 넘실대는 바다로 표현한 듯하다.
◇또 다른 만남으로도 지울 수 없는 기억들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감독은 죽음 그 자체보다, 상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쿠오'가 죽고 몇 년이 지나 재혼을 했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과거의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았다.

◇롱 샷, 롱 테이크 기법의 엔딩 크레딧

하얗게 눈발이 날리는 누군가의 장례식에 간 '유미코'는 바닷가를 줄지어 걸어가는 긴 행렬을 따라간다. 어둠이 깔리는 노을 진 바닷가에 홀로 남아서 무언가를 불로 태운다.

재혼한 남편이 그녀를 찾아온다.

"나 있지 정말 모르겠어. 왜 그 남자는 자살을 했을까· 왜 철로를 걸어갔을까·

나는 그 생각만 하면 견딜 수가 없어." '유미코'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하소연한다.

"바다가 부르는 것 같았데. 아버지가 전에 배를 탔는데 홀로 바다 위에 있으면 저 멀리 아름다운 빛이 보였데. 반짝반짝 빛나면서 아버지를 끌어당겼데.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닐까·"
◇우리들의 상실에 대한 경험

우리도 살면서 '유미코'와 같은 상실을 경험한다.

가족, 연인, 친구 애완동물이나 애지중지하던 장난감들.

누구에게나 상실에 대한 경험이 있다. 잊은 척하고 살아갈 뿐.

아프고 그립고 목젖까지 슬픔이 차올라도 아닌 척하고 견뎌낼 뿐.

교문 앞에서 산 병아리가 어느 날 닭이 되고 그 닭이 저녁 밥상 위에 올라왔다.

엄마는 그 닭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어린 막내가 목젖을 보이며 울었다.

늘 어릴 수 있다면 슬픔 앞에서도 솔직해질 수 있다.

서른셋.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다.

다만 뚫린 심장으로 스치는 바람 때문에 시렸다.

어른이 되는 것은 가식적이고 애처롭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터널을 지나면서 살아가고 있다.

각자의 경험과 다른 크기의 잔상들로 아프지 않은 것처럼 살아내고 있다.

잔잔한 음악과 단조로운 색상은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고 주인공의 내면을 묵직하게 그려낸다. 울거나 격한 어조로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영화에 몰입하면 감정을 억눌러야만 살아갈 수 있는 남겨진 자들의 신음이 들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어떤 상처도 들키지 않으려는 잔잔한 일상이 애처롭다.

세월호에서, 핼로윈 축제에서 그리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듬어 주고 아픔에서 빨리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선택했다.

이 글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위로인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에게 찾아올 환상의 빛, 마음의 평안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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