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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인문학 - '어디갔어, 버나뎃(Where'd You Go, Bernadette)'

내가 궁금해지는 영화
'이젠 아이들도 다 컸으니 모든 일을 내려놓고 실컷 놀아야지.'

  • 웹출고시간2022.04.25 15:18:18
  • 최종수정2022.04.25 15:18:17

안소현

지역발전연구소함께 대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마음껏 만나자.'하고 지내기를 일 년.

처음에는 너무 신났다.

주체할 수 없는 자유와 쏟아지는 약속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레임.

그러나 순간순간 찾아오는 허전함과 무기력감, 슬슬 몰려오는 불안함은 마음 놓고 놀지도 못하게 했다. 무료함과 새로운 인간관계에서 오는 당황스러움 속에서 나를 다시 내 자리로 돌려놓은 소중한 영화가 있다.
2020년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Where'd You Go, Bernadette)'.

처음엔 주인공이 케이트 블란쳇이라서 끌렸다.

영화 속 그녀는 쭈빗거리거나 뻘줌해 하지 않고 언제나 자연스럽고 우아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녀는 덜렁대고 안절부절못하고 몹시 사람을 가리는 우리의 이웃 같은 소박함으로 다가왔다.
◇원작 소설과 감독과 완벽한 캐스팅

뉴욕타임즈 84주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설 '어디 갔어, 버나뎃'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으며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작가인 '마리아 셈플' 특유의 유쾌하고 개성 있는 스토리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영화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3부작 시리즈를 18년에 걸쳐 제작한 연출력과 작품성에 신뢰를 얻은 베테랑이다. 또한, 촬영 기간만 12년이 소요된 대장정 프로젝트 <보이후드>로도 유명하다. 수많은 편지와 이메일 등 문서로 이뤄진 소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각색 자체가 도전이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많았는데, 너무 겁먹지 말고 캐릭터들과 중심 이야기만 전달하겠다"고 밝힐 정도였다. 촬영지인 피츠버그 교외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저택을 찾기까지 2년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사회성 결핍의 까칠한 여주인공역의 케이트 블란쳇은 소설 속에서 '버나뎃'이 튀어 나왔다고 믿을 만큼 작가와 감독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캐릭터를 디테일하게 탐구한 여배우와 감독과 제작진의 노고가 곳곳에 스며들어서 한층 재미가 더하다. 특히 영화를 볼 때 작가가 선물한 선글라스와 케이트 블란쳇이 직접 만든 헤어 스카프를 눈여겨서 보길 바란다.
◇영화 시노십스

주인공 버나뎃 폭스는 한 아이의 엄마이자 IT 사업가의 아내로 예민하고 이웃과 교류하기를 거부하는 중년여성이다. 커다란 저택에서 살고 있지만, 손 볼 곳이 많은 집은 그녀를 닮았다.

전동공구를 능숙하게 다루고 거친 일도 척척 해내는 '버나뎃'은 불면증과 예민한 성격으로 힘들다. 사실 그녀는 최연소 '맥아더 상'을 수상한 천재 건축가였으나 자신의 수상작품이 도시계획으로 철거되자 크게 상처를 받고 건축일을 그만둔 것이다. 저명한 여성 건축가가 공들인 자신의 과업이 쓰레기로 취급당하자 결혼을 선택해서 한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요즘 이슈화되는 '경력단절 여성'인 것이다. 외출할 때마다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헤어 스카프와 썬글라스를 착용하고 다녀서 까칠한 사회 부적응자 같다.

사사건건 간섭하는 옆집 여자 '오드리'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남편에게 고자질하는 비서 때문에 조용히 살고 싶은 '버나뎃'은 너무나 괴롭다. 그녀는 유일한 희망이자 친구인 딸 '비'의 졸업선물로 계획한 남극 가족여행을 준비하면서 황당한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버나뎃'이 국제 범죄에 휘말리고 FBI 조사가 시작되자 자신의 대화상대인 가사 도우미가 범죄조직에 연루되었음을 밝혀낸다. 남편은 아내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정신 상담과 치료를 강행한다. 조용히 살고 싶은 '버나뎃'의 소망과는 다르게 주변은 매일 소란스러워지고 그녀의 까칠함은 폭발한다. 그녀는 혼자서 남극을 향해 떠난다. 의도했던 가족여행은 아니지만 딸, 남편을 남겨두고 남극으로 홀로 향한 '버나뎃'은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고 예전의 열정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젊은 시절 건축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주목받는 삶을 살았지만, 결혼과 육아로 자신의 전문적 역량과 열정을 내려놓았던 결정이 어려움의 원인이 됐음을 알게 된다.
남극에서 진행되는 건축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과거의 열정을 되찾는다. 그녀를 찾아 남극으로 온 사랑하는 가족들과 재회하는 장면에서 가슴 뭉클하다. 마치 내가 쓴 한 편의 에세이처럼.

가족을 위해, 아니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잠재성을 감추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이 영화를 꼭 추천한다. 나의 짜증과 일상의 권태로움이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해서가 아닐까.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Life designer'이다. 일을 잠시 쉬었다고 경력단절은 될 수 없다.

다른 경험으로 경력이 더 화려해질 뿐.

사람들 속에서 만남 많은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보석처럼 반짝이는 인연이 꼭 있다.

프로필 사진 한 장 찍으려고 수 백장의 셀카를 찍듯이

소중한 사진 한 두 장을 건진다면, 나머지는 지워도 아쉽지 않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를 때가 있다.

내가 무엇를 잘하는지 모를 때도 있다.

이것저것 해 보면 분명히 심장 뛰는 일이 생긴다.

D.H.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단어처럼.

나이들면서 알게된 연태고량주 맛처럼.

이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궁금하다.

'버나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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