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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인문학 -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할 때

조용히 그림 감상하듯이 보는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 웹출고시간2021.06.21 18:15:04
  • 최종수정2021.06.21 18:15:04

안소현

정치학 박사 / 지역문화커뮤니티 '함께' 대표

[충북일보] 하늘이 유난히 파란 어느 날 오후. 콧등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후덥지근하다.

'여름이 오는구나.' 몸도 마음도 지쳐버리고 기대하던 인간관계에서 느껴지는 적잖은 실망감.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나 할까하고 나선 길엔 짙은 초록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여름이 찾아와 주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길게 늘어선 숲길을 걷는 듯 착각을 들게 만드는 심호흡 같은 영화를 소개한다. 2019년 1월 17일 국내에 개봉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믿는 주인공이 선택한 영화는 믿을 수 있다.

어쩌면 '키키 키린'이라는 여배우의 영화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키키 키린은 영화'앙:단팥이야기'를 통해서 처음 만났다. 여배우 같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일반인이라는 착각을 들게 했다. 그 후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 '빛나는,' '어느 가족' 등의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를 보게 되었고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은 그녀의 연기를 더 돋보이게 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은 2019년 9월 15일 그녀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찍은 마지막 작품이 되어서 더 의미가 있다. 그녀는 영화에서 주인공인 적이 별로 없다.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인생을 요점정리 하듯 아름다운 유작을 선물해 주고 영원히 가슴 속에서 힘들 때 마다 외쳐준다. '쉬어가라.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를 들어라. 현재 내 주위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물건들의 소중함을 잊지 마라. 어려움은 그 자체로도 소중하다. 억지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어 진다. 그 날 그 날 행복을 느껴라.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좋고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바람 불면 불어서 좋고, 일일시호일.'
◇공감각의 극치: 온 몸의 세포가 깨어나고 모든 감각을 자극한다.

일본 내에서 초판 이후 17년 동안 40만부 이상 판매된 모리시타 노리코의 스테디셀러 '일일시호일' 원작 에세이가 영상으로 만들어졌다. 마호로 역전 광소곡(2014), 빛(2017)이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오모리 다츠시'감독의 수묵담채화 같은 영화이다. 스크린을 통해 가득 채워진 한 컷 한 컷이 작품이다. 물이 흐르는 영상을 보면 소리가 들린다. 예쁜 다과를 보면 침이 꿀꺽한다. 선생이 차를 정성스레 내리면 숨소리도 내지 못한다. 벚꽃이 화면으로 펄펄 날아다니면 볼이 간지럽다. 영화는 모든 예술적 도구와 감성을 집합시킨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소리만 들어도 그림이 그려지고, 그림만 봐도 향기가 난다. 다다미방의 벽에 '일일시호일'이라는 붓으로 쓴 액자를 오프닝 크레딧으로 하는데 그 순간 눈을 감으면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고 나를 위로하고 지친 심장을 어루만져 준다. 공감각의 묘미는 눈과 귀와 심장을 후련하게 해 준다. 찻 수건을 접는 법. 차 마시기 전의 다과는 감독의 미적 감각을 돋보이게 해 주고 색감은 우리 인생의 추억들을 말해 주는 듯 선명하다.
◇힘든 시기를 치유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다케다 선생의 대사는 인생의 지침 같다.

10살의 노리코(쿠로키 하루)가 부모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이라는 영화를 보러 가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재미가 없었다는 독백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다음 장면은 그녀가 대학에 입학한 봄으로 시간이 훌쩍 흐른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무료한 일상에 대한 대화 중에 어머니는 사촌인 미치코(타베 미카코)와 함께 다도를 배울 것을 권하고 다도를 가르치는 타케다(키키 키린)선생을 찾아가게 된다. 벽에 있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을 보고 궁금한 듯 서로의 표정을 확인한다. 다케다 선생은 제자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남쪽에서 훈풍이 불어온다'고 전하고 대한절기 무렵에는 '매화 향이 온 천지에 퍼진다'라고 겨울의 혹한을 극복한 매화를 미화시킨다. 그리고 다도를 통해 인생의 지혜를 터득하고 그것이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일일시호일)이라고 말해 준다. 절차와 형식이 어려워서 차의 기본동작에 대한 의미를 물어보니 선생은 미소를 지으며'의미는 몰라도 된다. 그냥 그렇게 한다.'고 대답한다. 차를 탄 후에 주걱을 급하게 털자 '털지 말고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라. 다구가 무거우면 가볍게, 가벼우면 무겁게 들어라. 형태를 만들어 거기에 마음을 담아라. 바른 자세로 앉아서 한 호흡 쉬어라. 머리로만 생각하지 말고 몸의 움직임을 따르라는 메시지를 대사의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생의 지혜를 차 수업을 통해서 터득하는 감독의 메시지를 절묘한 순간에 전달한다. 입동이 되자 등장한 차 끓이는 화로는 인생을 잘 모르는 20대 제자의 불안, 방황, 고민들을 은근하게 녹여주는 느낌이다. 차 끓이는 화로의 등장은 내가 안고 있는 고민들을 끓여서 공기 중에 증발시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다. 미치코는 무역회사에 다니다가 안정적인 결혼을 하고 노리코는 출판사 입사시험에 떨어지고 오랫동안 사귀었던 남자로부터 배신당하고 급작스럽게 아버지를 죽음을 마저 조용히 감내한다.
◇지금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다음'은 어쩌면 안 올지도 모른다.

24절기 같은 인생의 흐름을 조용히 이겨내면서 차 수업에 정진하는 노리코는 여름 장맛비소리가 가을 비소리와 다르다는 감지하고 벽에 붙은 폭포라는 글씨를 그림으로 읽어내고 물소리가 온 몸에 베어드는 느낌을 경험한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애달픈 심정을 위로하듯이 분분히 휘날리는 벚꽃 잎, 노리코의 손등을 덮는 다케다 선생의 따뜻한 손, 절제되었지만 다정한 목소리. 바닷가를 배경으로 서 있는 아버지를 향해 노리코는 '고맙습니다.'라고 울면서 외친다. 나이 든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관심을 바쁘다는 이유로 뿌리쳤던 슬픈 기억, 자신의 철없는 행동에 대한 후회로 가슴이 먹먹해진 노리코. 슬픔을 위로하는 다케다 선생은 매화꽃을 바라보며 제일 추울 때 피는 꽃도 있다고 말하며, 걱정이라 여기지 않는 자는 지혜롭다고 다독이고, 이제 곧 봄이 올 거라며 차 마시기 전에 내놓는 '움틈'이라는 이름의 과자를 슬며시 내어준다. 우수 무렵의 화면은 봄꽃을 터트리며 영화의 절정을 이룬다. 다케다 선생의 스승이었던 시노다 선생의 기일 다도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날, 다케다 선생의 제자인 유미코는 차 대접은 차의 완성이며, 그것은 곧 생애 한 번 뿐의 만남이기 때문에 지극한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 멀쩡했던 친구가 오늘 갑작스럽게 사라질 수 있다. 마치 노리코의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뜨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만나면 내일 헤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만나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리코의 독백은 세대를 이어준다.

젊음은 곧 나이 듦을 경험하고 나이 듦은 또 다른 젊음에게 가르침을 준다. 노리코는 '세상에는 금방 알 수 있는 일과 금방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금방 알 수 있는 일은 그냥 지나가게 두면 되지만, 금방 알 수 없는 일은 살아가면서 깨달으면 된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깨닫는 매일 매일은 좋은 날이 되는 것이다.'오감을 동원해 온몸으로 그 '순간을 맛본다. 여름에는 찌는 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를. 매일이 좋은 날이란 그런 뜻이던가.

나이 든 선생은 젊은 제자에게 지혜를 전해주고 젊은 제자는 차 수업을 하는 40대로 나이 들어간다.

◇잔상이 오래도록 남아서 인생의 지침이 되는 영화가 있다.

2019년 한 해 동안 수 없는 영화를 보았다. 보고 감동을 받은 영화포스터를 모아 둔다.

영화포스터를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문득 멈추게 되는 포스터.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같은 일을 매번 반복하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해 주었다.

매일 마시는 차가 매일 다르다. 무슨 일을 오래도록 하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가르쳐준다.

지루함 보다는 묵묵함을 나태함 보다는 여유로움을 가지게 한 영화였다.

모두 고민과 갈등을 하며 살고 있다. 한 편의 영화가 늘 주어지는 일상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찾아 온 다면 이 또한 행운이다. 천천히 가도 좋다. 마음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면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일이든.

마음의 위로가 필요한 시기.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하다면 조용히 그림 감상하듯이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을 감상하길 꼭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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