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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0.06.13 16:57:2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조혁연 대기자

"대개 들으니,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충성하여 부자·군신 사이에는 다른 도가 없는 것이다. (…) 아! 위태하였다. 다행히 숙부 수양 대군이 있어 기미를 알아 계책을 결단하여 대의를 부르짖었다. 네가 장문(將門)의 후예로 익히 병사(兵事)를 알았다. 인하여 전지 1백 50결·노비 15구·말 1필·백은 25냥·표리 1단을 주노니, 이르거든 영수하라".(단종실록)

단종이 계유정난 2등 공신인 곽연성(郭連城,·?~1464)에게 하교하는 내용로, 본문 중 '노비 15구'는 노비 15명, '표리'는 임금이 신하에게 주는 옷감을 일컫고 있다.

문장이 매우 화려함을 알 수 있다. 이를 '사륙변려체'라고 한다. 대구(對句)의 구성을 지니면서 수사적(修辭的) 미감(美感)을 많이 표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사장의 일종인 교서나 하교할 때 자주 사용된다. 단종은 이때까지만 해도 삼촌 수양대군의 최종 목표가 자기 자신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곽연성은 계유정난에 참가한 무신 중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계유정란 이전에 이미 무과에 급제, 현직에 있었다. 그는 이런 이력 때문에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갈 때 군관 자격으로 수행하게 된다. 그후 고향에 내려와 있다가 수양대군의 부름을 받았다.. 곽연성은 상중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계유정난 참여를 다소 꺼렸다. 이런 곽연성을 음성인물 권람(權擥·1416~1465)이 적극적으로 회유한다.

'권람이 곽연성을 보고 말하기를, "수양 대군께서 지금 종사의 큰 계책으로 간사한 도적을 베고자 하는데,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네를 부른 것이니" 하니, 곽연성이 말하기를, "장부가 어찌 장한 마음이 없을까마는 최복(衰服)이 몸에 있으니 명령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 구차히 사양하지 말고 큰 효를 이루라" 하였다'.(단종실록)

'최복'은 부모상을 당해 상복을 입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후 그는 무과중시에도 합격, 나름의 실력을 인정받는다. 무과중시는 일종의 승진시험으로, 10년마다 치뤄졌다. 한명회는 이런 곽연성을 적극적으로 견인했다. '청평군 곽연성을 평안도에 보내고, 우공을 의주 목사로 삼고, 이공을 숙천부사로 삼았으니, 모두 한명회가 천거한 자들이었다'.(세조실록)

곽연성은 우리고장 인물로, 세조 10년(1464) 졸했다. 실록은 그의 졸기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청평군(淸平君) 곽연성이 졸하였다. 곽연성의 자는 보지(保之)이고 청주(淸州)사람이었다. (…) 정난할 때에 상복(喪服)을 입고 집에 있으니, 임금이 사람을 시켜 불러서 공(功)이 있었으므로, 드디어 공신(功臣)이 되고 갑자기 대관(大官)이 되었으며, 임금이 매우 믿고 중하게 여기었다'.

그러나 성격은 다소 거칠었던 모양이다. 사관이 작심하고 비난하는 대목이 나온다. '군사들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혹독한 형벌을 더하니, 심지어 피패(皮牌)로 뺨을 때리고 나무 몽둥이로 머리통을 때리니, 군사들이 그를 시호(豺虎)처럼 무서워하였다'. '피패'는 가죽방패, '시호'는 승냥이와 범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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