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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칼럼니스트

고구려 정벌전쟁에 승리를 한 문무왕은 귀로에 지금의 충주에서 하루 묵는다. 왕은 욕돌역(褥突驛)에서 행궁을 마련하고 군사들을 위로 했다. 욕돌역은 지금의 충주시 변두리인 주덕인가.

이날 저녁 중원경 우두머리 대아찬(大阿飡) 용장(龍長)은 문무왕 앞에 미소년 능안(能晏)을 내세워 춤을 추게 했다. 소년이 추는 춤은 바로 가야무(伽倻舞)였다. 아름다운 춤이었을까. 감동을 받은 왕은 소년의 춤이 끝나자 친히 불러 가까이 하고 금잔에 술을 주며 치하한다.

용장은 왜 왕 앞에서 가야무를 추게 한 것일까. 따져보면 문무왕의 몸 속에는 가야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부친 무열왕의 부인은 바로 가야계 김유신장군의 동생 문희였다. 어린 시절 궁중에서 어머니의 춤을 보고 자란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 주덕은 철 산지로 가야인들이 많이 살았다. 동국여지승람 비고에 보면 매우 주목되는 기록이 있는데 충주가 바로 '임나국(任那國)'의 고지였다는 것이다.

'임나국'. 이 이름은 70여 년 동안 한, 일간 역사학자들의 논쟁거리가 아니었나. 일본 일부 학자들은 지금도 계속 한반도내의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 도대체 임나는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리고 여지승람은 충주를 왜 '임나국'이라고 기록한 것일까.

일본서기에는 임나국을 기록하면서 '백제 신라 땅과 인접하여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린다'고 했다. 자고 나면 신라 땅이 되고 그 다음날은 백제 땅이 되어 전쟁이 계속되는 접경임을 적시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감안하면 충주 주덕 땅이 가장 유력하다.

충주에 가야인들이 이주하여 산 것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이 시기 신라군의 주력부대는 경주 군대와 신라에 복속된 가야군사들이었다. 철기를 잘 다루는 가야인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상정 된다.

왜 진흥왕은 가야 집단을 중원경으로 이주 시켰을까. 바로 주덕일대에 산재한 철산지 때문이다. 주덕일대에 노지를 만들고 가야 철기장인들을 시켜 무구를 생산했다고 본다. 지금도 주덕일대 들판에서는 곳곳에서 야철 잔해인 슬러지들을 찾을 수 있다.

가야 악인 우륵은 가야금을 잘 탔다. 우륵도 가야이주 집단에 섞여 중원경으로 왔을 게다. 진흥왕은 새로운 정복지 충주를 순행 할 때 달천 하림궁에서 특별히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뜯게 한다. 망국의 음악이라고 반대하는 측근들의 간언을 외면하고 우륵을 충주에 살게 하면서 가야음악을 장려하는 특단의 대책을 지시했다.

우리 민족의 자랑인 가야금 선율이 1500년 연면히 계승되고 있는 것은 진흥왕의 공로다. 문무왕도 진흥왕을 계승하여 김유신장군을 포함한 가야세력을 특별히 우대했다.

고도 충주 중원경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가야계 신라 유적이 어느 지역보다 많다. 신라 삼국통일의 전초기지이자 왕도 서라벌 다음가는 부도(副都)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경북 고령 지역등 가야유적이 최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경남의 5개 가야고분군을 포함한 경북 1개, 전북 1개 등 7개 가야 고분군도 포함이 됐다. 기쁜 소식이지만 실지 우리역사에서 가야인의 삶과 문화 흔적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유적은 충주지역이다.

중원문화권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힘차게 추진해 볼일이다. 필자는 수년전 충북고위공직자에게 이 문제를 제안했다가 무안을 당한 일이 있었다. '우리가 힘쓴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해 보지도 않고 먼저 포기하는 자세야 말로 무기력증 아닌가.

진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돼야 할 지역은 충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문화권역이다. 가야금 음악 하나만 가지고도 세계적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 있다. 잘못하면 이마저도 다른 지역에 빼앗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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