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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칼럼니스트

완당 김정희 선생의 아호는 500여 개에 이른다. 아호를 연구하는 한 학자의 논문을 보니 추사의 새로운 호가 더 찾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일반은 '추사'를 아호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선생의 '자(子)'다.

당시에 글이나 편지에 이름을 먼저 쓰고 자를 쓰는 예가 있었는데 이를 잘못 이해한데서 온 오류였다. 필자도 율곡 선생의 진묵 동호문답(東湖問答)의 첫 장을 고증했을 때 '이이 숙헌(李珥 叔獻)'이란 표현을 보았다. 숙헌은 바로 이이의 자였던 것이다.

추사는 평소에도 중국 명인들의 시 구절을 적어 친구나 후학들에게 주길 즐거워한 것 같다. 얼마 전 추사의 작품 대련을 고증하면서 특별한 아호를 찾았다.

중국에서 만든 고급 세금지에 종서로 쓴 대련인데 내용은 봄을 맞는 선비의 고고함을 나타낸 글이었다. 그런데 왼쪽에 기명을 보니 아호가 '금당(琴堂)'이었다. 완당이 아호를 금당이라고 썼다니 매우 흥미로웠다.

금(琴)은 사대부의 풍류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악기다. 둔탁한 것 같으면서도 웅장한 거문고소리는 선비들의 올곧은 심성을 상징한다. 풍유가객 백호 임제는 거문고를 어깨에 메고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명기들과 시주를 경쟁하기도 했다.

청주 미원 옥화대에 은퇴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산 조선 중기 학자 서계 이득윤은 거문고의 달인으로 기록 된다. 거문고에 심취하여 평생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완당이 금당이라고 지은 아호는 풍류의 소산인가. 필자는 이 아호를 완당이 언제 이렇게 썼으며 왜 지은 것인가에 대해 궁금증을 갖기 시작했다.

어느 신문의 글에서 한 문인이 '금호(琴湖)'라는 호를 풀이 했는데 눈에 번쩍 들어왔다. 즉 추사는 30대 후반 대사헌등 국가 중요 요직을 지낼 때 지금의 서울 금호동에서 살았으며 이를 계기로 '금호'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완당의 아호를 연구한 한 학자는 경주김씨 일가의 전답이 있던 충남 당진 '거문들'에서 연유를 찾았다. 아호는 지역이름을 인용하여 짓는 경우도 있는데 거문고 '금(琴)'자를 차용했다는 것이다,

두 설이 일견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필자는 금당의 '금(琴)' 자를 다시 생각했다. '琴'은 중국의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책에 보면 '금(琴)은 금(禁)으로 흉을 피하는 것'으로 해석 되며 '백호통(白虎通) 권1 하 10항'에서는 '나쁜 것을 억지하는 바른 사람의 마음(琴以禁也 以制止淫邪,正人心也)'이라고 나오는 것이다. 금(琴)은 '금(禁)'과 동일 음으로 해석한 것이다.

완당은 정의감에 불타 있었으며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폐해를 절감한 시기였다. 세도정치로 인한 탐관이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완당은 충청도 홍주지방에 암행어사로 나가 세도정치를 등에 업은 탐관오리 김우영을 추상같이 징계하고 봉고 파직했다. 이 사건이 완당을 8년간 제주도에 영어의 몸이 되게 한 보복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주도에 위리 안치 된 선생은 친구들이나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마저 자신의 이름을 쓰지 못했다. 이름과 아호를 숨겨야 했던 것이다.

완당은 스스로 나쁜 것을 배척하고 바른 사람의 마음을 갖고자 했던 것이다. 아, 조선은 이런 진정한 학자요 스승을 10년간 귀양 보내고 억압하며 고도에 가둬놓고 탄압했다.

부패한 정치, 탐관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국회가 또 김남국의 해괴한 처신으로 모두 도둑놈이란 의혹을 받게 됐다. 국회의 위상은 어디로 사라지고 비호하는 무리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악한 것을 배척하고 바른 마음을 갖는다'는 완당의 '금당(琴堂)' 정신을 정치인들도 되씹어 봐야 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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