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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1.08.24 13:34:26
  • 최종수정2021.08.24 13:34:26

김규완

전 충청북도 중앙도서관장

창덕궁 후원 여덟 번째 정자 취규정을 뒤로 하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니, 창덕궁 후원 중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보존 상태가 좋은, 조선 정원의 진수를 보여주는 옥류천 지역이다.

경주 포석정지처럼,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워 놓고 그 술잔이 자기 앞에 오면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위해 만들어진 유배거(流杯渠)의 옥류천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정자(취한정, 농산정,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가 어우러져 있는 정자의 보고(寶庫)다.

옥류천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정자는 취한정(翠寒亭)이다.

소나무가 많아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정도로 서늘했다 하여 '푸르고 서늘하다'는 취한(翠寒)으로 이름 붙였고 옥류천에서 물을 마시고 나오다가 잠시 쉬던 숙종과 정조가 그 경치를 시로 노래한 곳이기도 하다.

취한정을 지나 작은 돌다리를 건너니, 일반적인 정자와는 달리 온돌방과 마루와 부엌을 갖춘 살림집 형태의 농산정(籠山亭)이 있다.

왕이 옥류천으로 행차했을 때 음식이나 다과를 준비했던 곳인데, 기록에 의하면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수원 화성에서 열어 드리기 전, 어머니를 모실 가마꾼들의 가마 메는 연습을 후원에서 시키고 수고한 관원들에게 이곳 농산정에서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농산정 앞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슬슬 걸어 다닌다'는 뜻의 소요정(逍遙亭)이 있는데, 정자에 앉으니 소요암(逍遙巖)과 옥류천(玉流川)이 나를 보고 웃어주는 듯 하다.

소요암에는 '玉流川' 이라는 인조의 친필과, 이 일대 경치를 읊은 숙종의 오언절구 시가 새겨져 있다.

소요암 아래 넓고 평평한 너럭바위에 둥글게 파인 홈을 따라 샘물이 돌아 흐르고는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숙종은 이 작은 폭포를 보고 비류삼백척(飛流三百尺)이라 은유적으로 표현했고, 순조는 옥류천에 있는 정자 중에서 유상곡수의 아름다움이 있는 소요정의 경치가 으뜸이라고 했다.

옥류천 북쪽으로 태극정(太極亭)과 청의정(淸·亭)이 있다. 태극정은 왕이 수신하는 장소였고, 청의정은 후원에서 유일한 초가 정자다. 임금이 농사를 지어 가을걷이를 마치면 그 볏짚으로 이 정자의 지붕을 이었다고 한다. 땅을 딛고 하늘을 향하는 마음을 담아 바닥은 사각으로 하고 지붕은 원형으로 지었다.

중국 최초의 자전(字典) '설문해자'에서는 亭(정자 정)자를 '백성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라 했고 우리 국어사전에서는 정자(亭子)를 '경치가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해 지은 집'으로 풀이하고 있다.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는 休(쉴 휴)자처럼 사람(人)이 정자(亭)를 만나면 그곳에 머물며(停: 머무를 정) 경관을 벗삼아 쉬게 마련이다.

정자는 사람과 자연을 맺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창덕궁 후원에 여러 정자를 지은 것은, 백성들과 가까워지고 자연처럼 부정이 없는 맑고 깨끗한 정치를 펼치고 싶은 조선 왕실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자연의 경치를 빌리는 차경에는 원경을 정원의 일부로 삼는 원차(遠借), 가까운 곳의 자연 풍광을 빌려 쓰는 인차(隣借), 높은 산악의 경치를 정원에 포함시키는 앙차(仰借), 낮은 곳에 전개되는 경치를 정원화하는 부차(俯借) 등이 있다.

도심 속 동천(洞天) 창덕궁 후원을 소요(逍遙)하며 각각의 정자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고 나니 조상들의 지혜와 가르침이 잘 익은 홍시처럼 가슴에 뚝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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