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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완

전 충청북도 중앙도서관장

"오늘은 커피 내기로 하지?"

"술 내기로 하자!"

"아니, '지는 사람이 먹고 싶은 거' 내기로 하자."

커피 애호가 병산과 대주가(大酒家) 동문은 만나자마자 바둑판부터 끌어당겼다.

과묵한 형근이 가운데 앉아 심판을 보고, 다섯 살 아래 동생 천근은 바둑 선생인 병산의 옆에 앉아 눈을 반짝거렸다.

1928년생 동갑내기 친구인 시인 신동문, 화가 윤형근, 철학자 민병산 세 사람은, 50년대 후반 고향 청주에 있던 시절에 하루가 멀다 하고 형근의 전셋집(우암산 자락 도지사 관사 아래)에 모여 의기투합했다.

영원한 맞수였던 두 사람의 기력은 아마 4단이었는데, 민병산은 후일, 《설국》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바둑 소설 《명인(名人)》을 번역하기도 했다.

1960년 화가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한 윤형근의 상경으로 서울에서 다시 뭉친 '청주의 삼총사'는 시와 그림과 철학(文美哲)을 논하며 일생의 친구로 지냈다.

청주에서 주성초, 청주여상, 청주여고 교사를 지냈던 윤형근은 한국 단색화의 거장이 되었다.

조각가 최종태는 그를 "충청도 사람이면서 고구려적인 기상이 있었다"고 평했다.

1973년 모 여고 입시 비리를 문제 제기 했다가 옥살이를 하기도 했던 그는 1980년 12월 파리로 떠났다가 2년 후에 돌아왔다.

민병산은 파리의 친구에게 한시를 써서 보냈다.

'건곤불로 만성천(乾坤不老 萬星天: 하늘과 땅은 늙지 않으며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떠 있다)'

윤형근 사후 11년이 지나,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상 처음으로 그의 개인전(2018.8.4.~2019.2.6.)이 열렸다.

친구들과 고향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신동문 시인의 '신동문 문학관' 건립 여부가 수년째 시시비비 중임을 안타까워 하며, 그의 미발표 시 <사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이토록 무위(無爲)한 세월 속에서 결코 스스로를 잊지 못하고 푹 ㅡ 한숨을 쉬고 하는 것은 그대로 당신을 잊지 못하는 탓입니다'

영락없는 '충북의 선비' 민병산은, 대부호의 장남이었으나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혼인도 하지 않고 어떤 직장에도 매이지 않고 오직 독서와 집필 그리고 나름의 서체(호롱불체)로 글씨를 쓰며 살았다.

2020년에 열렸던 <조선ㆍ근대 서화전>에는 김정희, 이황, 한호, 허균, 흥선대원군, 오세창, 이응노 등의 서화가와 함께 그의 서화 작품이 전시되었다.

60년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명동과 관철동을 거쳐 인사동의 존경받는 대부(代父)로서, '인사동의 디오게네스'로 불리며 무소유의 철학을 실천했던 그의 괴나리봇짐 속에는, 붓글씨가 적힌 한지와 아이들에게 나눠 줄 과자가 항상 들어 있었고, 많은 이들이 마음을 편히 쉬기 위하여 그리고 배우기 위하여 그를 찾았다.

역사 속에 사라져버리고 잊혀진 위인들의 평전을 새로 발굴해서 쓰는 것을 평생 소원으로 삼았던 그는, 지인들이 마련한 회갑연을 하루 앞둔 1988.9.19. 환갑 총각으로 눈을 감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던 많은 여인들은 스스로 밤을 새워가며 장례를 도왔다.

파렴치한(破廉恥漢)들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때에,

가을 나뭇잎같은 두 내외가 선생의 서거 33주기를 앞두고

발산공원에 있는 '민병산문학비'(2000년)를 찾았다.

옆에는 절친 '신동문시비'(2005년)도 함께 서 있다.

"철학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온갖 기쁨 가운데서도 가장 고상한 즐거움이다.

철학의 본령은 진리를 바라는 마음의 기갈에서 꾸준히 탐구하고 노력하는 데 있는 것이다.

진리는 직접 우리에게 황금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기타 지위나 명예를 주지는 않지만 그 대신 남이 빼앗지도 못하고 세상의 변천에도 동의하지 않는 깊은 인식의 행복을 베풀어 줄 것이 틀림없다.

'철학'은 결코 전문가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철학이야말로 만인의 것이며,

모든 사람이 제각기 철학가이다"

- 민병산 유고집《철학의 즐거움》에서

문학과 미술과 철학이 한꺼번에 피어나던, 지금은 '충북문화관'이 된 옛 도지사 관사에, 세 사람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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