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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완

전 충청북도 중앙도서관장

오후에나 비가 온다는 예보를 믿고 7시를 막 지나 집을 나섰다.

차창에 몇 방울 비꽃이 떨어지더니 호남고속도로에 들어서서는 사방에 비안개가 자욱했다.

첫 번째 휴게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루비가 포슬포슬 내리기 시작한다.

잠자는 개구리를 깨우고, 꽃이 피기를 재촉하고, 어서 씨를 뿌리라고 말해주는 봄비를 일비라고 하지만, 나는 각우(覺雨:깨우다,깨닫다)라 부르고 싶다.

이 비가 그치면 착한 농부는 조상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밭갈이 단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 황토의 들판에 세 알씩의 씨앗을 넣어 줄 것이다.

한 알은 하늘의 새가 먹고, 한 알은 땅 속의 벌레가 먹고, 남은 한 알은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비 올 때의 운전은 속도도 늦추고 더 주의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안전할 것이라는 나름의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담양의 죽녹원과 메타세콰이아 가로수길을 거쳐 소쇄원에 도착할 때까지도 봄비는 넉넉히 내렸다.

대봉대, 오곡문을 지나 제월당(霽月堂) 마당에 들어서니 당호(霽:비 갤 제)를 따르기라도 하듯 비가 그쳤다.

돌계단 위로 두 칸의 시원한 대청마루, 쌍창 뒷문이 만든 두 개의 커다란 액자 속에, 한 곳에는 하얀 매화가, 다른 곳에는 노란 산수유가 가득 피었다.

대청마루에 올라 저 아래 대나무 숲에서 이는 청량한 바람과 광풍각 앞으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맹자》'진심·상'을 펼쳐본다.

도응의 물음에 맹자가 대답한다.

"순임금이 천자일 때 아버지 고수가 살인했다면 사법관인 고요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붙잡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순임금은 고수의 형 집행을 막지 않겠습니까?"

"순임금이 어찌 막겠는가. 직책으로서 받은 바가 있으므로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순임금은 어찌해야 합니까?"

"순임금은 천하 보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몰래 고수를 업고 바닷가로 가 거쳐하면서 죽을 때까지 혼연히 즐거워하며 천하를 잊을 것이다."

물 맑고, 시원하며 깨끗한 원림(園林)이란 소쇄원은 조선시대 양산보가,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를 당해 죽게되자 현세적인 꿈을 접고 은둔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곳이다.

자신의 기회주의적 행태를 시중(時中:시의時宜를 따라 행동함)의 도리라고 변명하는 어떤 관료들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여수로 간다는 말에 해설사로 일하는 여류 시인이 예술의 섬 장도를 적극 추천했다.

하루에 두 번씩 다리가 잠겨 육지가 되기도 하고 섬이 되기도 하는 매력의 섬 장도는, 숙소의 커튼을 걷어 젖히니 에머럴드 바닷길을 10분만 걸어가면 당도할 눈 앞에 있었다.

섬 언덕 카페에서, 국내·외 유수의 음대를 나온 여주인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차를 마시던 동행인의 눈시울이 바다에 비친 저녁 노을처럼 붉어졌다.

피아노 치는 바리스타는 창밖에서 듣고 있던 소녀와 애완견을 위해 쇼팽의 《강아지 왈츠》를 선사했다.

여수는 밤바다도 좋고 낮바다도 좋다.

물 고운 여수(麗水)는 마음도 곱다(麗心).

2,260m의 현수교 이순신대교를 벅찬 가슴으로 건너고, 광양을 지나 섬진강 매화마을로 향하는 길에서는 차도 사람도 느릿느릿했다.

창문을 통해 들락거리는 길가 매화들의 향기를 들이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 초입에 지역 주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으니 편하게 주차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앞쪽으로 섬진강이 흐르는 백운산 자락 33만 제곱미터(10만여 평)에 백매, 홍매, 분홍매가 만발이다.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섬진강을 건너 온 나무들 모두가 매화가 되었나보다.

수줍어하는 새색시 매화 앵매(·梅)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거리니 꽃속의 벌이 앵앵거린다.

벌은 꽃술에 젖고 나는 암향에 취한다.

섬진강 굽어 보이는 곳에서 생전에 두 번째로 도수매를 보았다.

1960년대 10대의 순수 학생이 한센인들과 살겠다며 금도(禁島)의 섬 소록도를 찾았다.

오랜 설득 끝에 두 손을 붕대로 꽁꽁 묶은 자치회 총무는 그를 데리고 중앙공원으로 갔다.

"이것은 50년 된 매화야. 꽃이 거꾸로 드리워져 피는 도수매(倒垂梅)야.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축축 늘어져서 수양매 또는 능수매라고도 하지. 이 놈은 여느 매화들같이 하늘을 향해 가지를 벌리지도 태양을 향해 꽃을 피우지도 않지만, 아래를 향한 깨끗한 꽃과 그윽한 향은 우리 한센인의 마음을 대변해 주지."

매화마을 뒤편에 산소 두 기가 매화 속에 파묻혀있다.

수십 년 전에 후손들을 위해 매화를 심고 가꾼 조상들일 것이다.

내려오는 길가에서 매화분을 팔고 있는 초로의 노인을 만났다.

정성 들여 키운 매화가 2만 원이라고 했다.

단원 김홍도는 그림 사례비 3,000냥 중 2,000냥을 주고 마음에 드는 매화를 샀다고 했는데 낙화유수같은 격세지감이다.

60이 넘어 느즈막에 질탕하게 매화 구경을 했다.

며칠만에 돌아오니 화병의 매화가 떨어지고 시들했다.

떠나기 전에 맑은 물로 갈아주었는데 이제 그 소임을 다한 것이다.

아내가 찍은 사진이 내 것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그만큼 더 젊고 순수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늙음이란 도둑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든다고 했던가.

거울을 보니 나의 부족함이 느껴졌고 사진을 보고 나이 들었음을 알았다.

흐르는 세월을 화장으로 가릴 일도 가식으로 막을 일도 아니다.

아이들은 좋아하고 어른들은 싫어하는 섣달그믐날처럼 세상사 다 양면성이 있는 법이니까.

젊은 사람에게는 용기가 있듯이 늙은 사람에게는 빛나는 지혜가 있을 것이다.

조식이 산천재에 남명매를 심은 이유를,

이황이 매화를 혹애(惑愛)한 까닭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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