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그의 파괴 시학은 시집 『聖 타즈마할』과 『너무 아름다운 병』 에 잘 드러나 있다. 고대 무굴제국 왕비의 묘지인 타지마할을 시인은 죽음의 집에서 광기가 낳은 탐미주의 공간, 야만적 죽음의 욕망으로 채워진 허상의 위조공간임을 드러낸다. 이런 부정과 파괴의 정신이 안으로 깊어져 내면화된 것이 병(病)이고 이 치유 불가능한 병은 현대문명에 대한 시인의 분노, 욕망,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이 깊고 아픈 병을 통해 시인은 황량한 인간 내면의 폐허를 목격하고 자신 또한 영원한 시간 속의 찰나적 존재고 꿈의 환영(幻影)임을 뼈아프게 자각한다. 그러니 병은 자아의 존재와 세계의 실상을 자각케 하는 아름다운 병이다.
이 불치의 병의 번뇌에 사로잡힌 채 시인이 도착하는 곳은 속초 바다다. 함성호 시의 파괴공학 반대편에 어머니로 표상되는 가난한 유년과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고향 또한 폐허로 그려진다. 이 폐허의 바다에서 그는 몽환적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고 그곳이 세상의 끝, 죽음의 귀착지라는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 죽음의 폐허지에서 그는 생명의 물소리를 듣고, 다시 잉태의 성지로 재탄생시킨다. 즉 함성호 시에서 공간은 계속 공간을 바뀌어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집은 몸을 바꾸어 새로운 집으로 환생한다. 하나의 상처 공간이 또 다른 색깔과 문양의 상처 공간으로 변주된다.
언젠가 그는 말했다. "모든 집은 상처였다"고. 집과 무덤은 주거공간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산 자의 집과 죽은 자의 집, 세계는 늘 집과 무덤의 동거지고 이 혼종의 공간에서 시인은 죽음을 자연의 신성한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삶은 죽음을 반복한다. 이 생
아스가르드의 화석 - 함성호(1963∼ )
신의 명상에서부터 흔들리는 숲
저 나무의 명상까지
빈 들판은 얼마나 오랫동안
꽃의 만발을 생각해왔던 것일까?
(새는 자신의 몸에 대해 얼마나 골몰했길래
저렇게 공기처럼 가벼운 날개를 가질 수 있었을까?)
물은 둥근 몸에 대해
별은 빛에 대해
데이지꽃은 자신의 중심에 대해
죽음의 의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끝내
우리는 이 가설의 체계를 엿볼 수 없으리
이 광기와, 냉혹한 아름다움의 비밀을
이 차가운 공유의 역설을
존재하지 않지만 가득 차있는 이것을
시간은 낡은 깃대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자연에는 禮가 없으니
눈부시게 반짝이는 저 바다의 비늘을 보라
사막이 꾸는 꿈과
바람이 물을 밀어 결을 거스르는 무늬를
나는 너의 가설이다
내가 환하게 핀 한 그루 사과나무의
다섯 장의 꽃잎에 대해 생각할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