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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신드롬 속 충북 가톨릭 비사

충주목사 이가환, 귀의-배교-再귀의-순교
진천 배티성지, '선참후계' 칼날에 20위의 무명묘
제천 황사영, 묘 발굴하자 관 위에 '막돌 십자가'
故최귀동, 주소 등짝에 붙이고 귀국 다리밑 선행

  • 웹출고시간2014.08.18 18:45:24
  • 최종수정2014.08.18 18:55:20

황석두 고향에 건립된 괴산 연풍성지이다. 그는 당시 조정이 천주교를 박해하자 농아 흉내를 내며 성경공부를 했다.

충주 순교 장소는 관아가 있는 성내동 일대로 4대 박해 동안 충주에서는 총 155명이 희생됐고 이중 충추 사람은 120명이었다.

충주지역 천주교와 관련, 당시 충주목사 이가환은 매우 기구한 역할을 한다. 그는 처음에는 반천주교주의자였으나 천주교인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도리어 설득당해 열렬한 천주교 신자가 됐다.

그러나 그 뒤 배교를 했고, 이후 1795년 충주목사로 오게 되면서 충주지역 천주교 신자를 심하게 탄압했다. 앞서 언급한 충주지역 첫 순교자 발생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직후 다시 심경 변화를 일으켜 천주교에 귀의했다가 1801년 이승훈 신부 등과 함께 순교하게 된다.

당시 조정이 배교를 한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임명한데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정조실록 19년 7월 25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가환을 특별히 충주목사에 보임하였다. (…) 이때 호서지방 대부분이 점점 사학에 물들어가고 있었는데 충주가 가장 심했으므로 특별히 가환을 그곳의 수령으로 삼아(…) 속죄하는 실효를 거두도록 한 것이었다."

즉 '이가환 당신이 천주교와 인연을 끊었다고 하는데 그럼 천주교인 탄압으로 그것을 입증해 보라' 그런 의도였다.

그러나 이가환은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진다"라고 할 만큼 조선후기 최고의 수학대가였다.

연풍성지에서 발견된 형구돌이다.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당기는 방법으로 교살했다.

진천 배티성지에서의 순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당시 흥선대원군 정권은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천주교 신자를 보면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포고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이런 포고령 속에서 포졸들이 진천 배티 일대의 비밀 교우촌을 급습했고, 그러자 신자들이 산등성이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포졸들이 산등성이까지 쫓아와 '선참후계'을 칼을 휘두르면서 그들은 희생됐고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채 곧바로 그 자리에 묻히면서 20위 무명 순교자묘가 생겨났다.

제천 배론성지는 '황사영 백서 사건'이 유명하다. 이는 황사영이 '박해받는 조선 천주교 신자를 조속히 구해달라'는 내용을 가톨릭 북경주교 '구베아'에게 보내려다 중도에 적발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황사영은 배론성지 토굴에서 길이 62㎝, 너비 38㎝의 흰 천 위에 한 줄에 110자씩 121행, 총 1만3천여자의 깨알 한자를 적었다.

백서 본문은 '서양배를 보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도록 조선에 압력을 넣어달라' 등의 내용이 있지만 서문은 매우 간절하게 시작된다.

'죄인 토마스(황사영 자신 지칭) 등은 눈물을 흘리며 본주교 대야(구베아) 각하께 호소합니다. 저희들은 마치 양떼가 달아나 흩어진 것처럼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 헤매면서 눈물을 머금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흐느낍니다. 괴로운 심정이 뼈에 사무쳐,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주님의 전능하심과 각하의 넓으신 사랑뿐입니다.'

지난 1980년 능지처참된, 황사영의의 시신이 담겨진 관이 양주 장흥면에서 발견됐다. 관 위에는 근처 막돌을 모아 만든 십자가가 놓여 있었다.

음성 꽃동네 하면 오웅진 신부를 많이 떠올리지만, '꽃동네 정신'의 출발점은 고 '최귀동' 할아버지다. 최 할아버지는 1910년 음성군 금왕면 무극리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한 여자와 결혼해 살던 중 징용을 당해 일본 북해도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다. 이후 고된 노동 때문에 탈출을 시도했으나 중도에 체포,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지능이 약화됐다.

그러자 일제는 그의 등에 주소가 적힌 꼬리표를 붙여 신의주로 가는 배에 실어 보냈다. 그가 병든 몸을 이끌고 무극 집으로 돌아왔을 때 고향에는 부모도 아내도 없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무극천 다리 아래의 거지 움막으로 그곳에는 시각장애인, 절름발이, 중풍에 걸린 노인, 정신질환자 등 18명이 낭인이 살고 있었다.

최 할아버지는 이때부터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동냥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거지가 거지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동냥을 하는 셈이 됐다. 그의 동냥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돈, 옷가지, 과일 등은 받지 않고 오로지 먹다 남은 밥만 받아왔다.

다리 밑에 있는 나머지 거지들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극성당으로 부임한 오웅진 신부는 이런 최귀동 할아버지를 발견했고, 그들을 위해 지은 작은 시설이 지금의 꽃동네로 발전했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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