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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우

시인, 충북대 국문과 교수

내 고향은 서울이다. 아니, 서울이라고 말해왔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내 약력을 적을 때 나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서울이라고 답했다. 태어난 곳이 고향이라면 내 고향은 서울이다. 나는 서울 상도동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다. 열 평 남짓한 흙벽돌집이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는 용대리에 있었다. 개척단에 가입한 아버지는 단원 몇 명과 함께 강원도 인제에서 터전을 물색하고 있었다. 인제 읍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하추리 분교가 있고, 여기서 어른 걸음으로 산길을 한 시간 정도 걸어가면 능금덕이 나온다. 아버지는 능금덕에 우리의 터전을 마련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고향이라면 내 고향은 능금덕이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집을 팔아 능금덕으로 들어왔다. 내가 네 살 되던 해에 서울로 다시 이사를 왔으니 능금덕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집 옆 개울에서 형과 가재를 잡다가 형이 가재에게 손가락을 물려서 다급하게 아버지를 찾던 일, 고양이 밥그릇에 있는 말라붙은 밥알을 떼먹는 형이 미련스러워 보여 "야, 네가 쥐 잡냐· 고양이 밥 먹게" 하며 야단쳤던 일, 작은 누나와 밭에 나가서 놀다가 팥알을 몇 개 주워서 손에 쥐고 오면 흘릴까봐 귀에 넣고 왔는데 나중에 빠지지 않아서 곤욕을 치렀던 일, 옆집 귀님이가 구운 옥수수를 먹으며 군침을 삼키는 형과 나를 놀리던 일, 외할아버지 생신에 갔다 온 엄마가 부엌으로 난 문 앞에 말없이 서 있는 귀님이에게 빈대떡을 한 장 주었던 일, 빈대떡을 받고도 꼼짝 않는 귀님이에게 엄마가 아까워하지 않고 한 장을 더 줘서 보내던 일, 능금덕에 살았던 때를 떠올리면 이런 몇 가지 단편적인 사건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머리에 남아있는 기억이 기억의 전부는 아니다. 취나물을 삶을 때 나는 냄새가 낯익어서 의아했는데 나중에 아버지에게 물으니 능금덕 살 때 취나물을 삶아서 장에 내다 팔곤 했다고 한다. 능금덕 우리집이 있던 자리에서 보면 멀리 한석산이 보이고, 아침이면 구름이 마을로 올라오곤 한다. 해발 800M에 자리 잡은 산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내가 그렇게 산을 좋아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삼십 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은 유격 훈련장으로 변해있었다. 누나와 나는 눈앞에 펼쳐진 낯선 풍경에 허탈해할 겨를이 없었다. 마을이 이렇게 변하는 사이에 할머니 묘가 어찌 되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누나가 기억을 더듬어서 겨우 할머니 묘를 찾아냈는데 묘 옆에 깨진 병이며 과자 봉지 같은 쓰레기가 묻혀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군인들이 유격 훈련을 받고 나서 무덤인지도 모르고 쓰레기를 묻어놓고 간 것 같았다. 무덤 주위를 대충 정리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절을 했다. 몇 년 뒤 아버지와 함께 이곳을 다시 찾고서야 비로소 지난번에 누나 말만 믿고 쓰레기 더미에다 절을 하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할머니 무덤은 유격장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수록, 고향이 내 기억에서 멀어질수록 고향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고 고향에 대한 기억이 소중해진다. 이번 여름방학에도 나는 고향 주변을 맴돌았다. 사람들이 좋다는 곳을 다 돌아다녀 봐도 내 고향만큼 좋은 곳을 찾지 못했다. 내 고향 마을이 그대로 있었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향 마을의 한 귀퉁이에 터를 잡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 고향은 안드로메다에 있는 용대가리 별이다. 지구인들이 사는 파란구슬별까지 230만 광년 떨어져 있다. 내가 이 먼 곳까지 어떻게 왔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파란 구슬별에 있는 대한민국에 처음 왔을 때 365일이나 되는 많은 날 중에서 딱 하루를 정해서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는 난리를 연출하는 것을 보고 정말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추석만 되면 물가가 치솟고 택배회사들은 경황없이 바빠진다. 고속도로가 막히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이곳 사람들은 고생을 사서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건 부러운 일이다. 그러니 제발 부탁인데 내 앞에서 고향 가는데 여덟 시간이 걸렸다느니, 열 두 시간 동안 차에서 죽을 고생을 했다느니 하며 엄살들일랑 떨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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