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끝난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우리가 자주 접했던 말 중의 하나는 '도덕성 검증'일 것이다. 그리고 불법적 재산형성이나 각종 사생활 문제 등과 관련된 도덕성 논란에 휩싸여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후보자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도덕성 문제는 특정 계층의 성인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점점 연령이 어려지는 학교폭력 문제나 청소년 범죄의 심각성은 우리 사회의 도덕성 문제가 우려해야 할 수준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 타인에게 공감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할 것을 북돋우고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언행을 피할 것을 강조한다. 어린 시절부터 도덕성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성 위기가 분명해 보이는 이 상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도덕성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써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고, 이런 구분에 따라 행동하며,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언행을 했을 때 스스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경험하는 것까지 포함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콜버그(L. Kohlberg)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판단을 분석하여 도덕성 발달을 3수준 6단계로 설명하였다. '전인습적 수준'에서는 외부에서 부여한 규칙이 중요하고, 도덕성은 행위의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 힘이나 권위에 복종하되 처벌을 피하는 것이 주된 동기로 작용하는 '처벌과 복종 지향 단계'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그리고 동등한 거래인지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도구적 쾌락 지향 단계'로 구분된다. '인습적 수준'에서는 좋은 인간관계 및 사회적 질서 유지가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 작용한다. '착한 아이 지향 단계'에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타인을 기쁘게 하고 돕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법과 질서 지향 단계'에서는 법과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며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서는 규범이나 법을 따라야 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후인습적 수준'에 이르면 도덕 판단은 개인의 내적 원칙에 의한 선택이 되며, 보편타당한 원리로써의 정의에 근거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된다. 법과 질서는 존중하지만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이 그보다 우선임을 아는 '사회계약 지향 단계'와 보편적인 윤리적 원리를 토대로 스스로 규정한 도덕적 정의와 원칙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윤리적 원리 지향 단계'로 구성된다. 도덕성은 연령이나 인지 수준과 관련이 있어 단계적으로 발달하는데, 나이가 어린 아동이나 청소년은 보통 1, 2단계에서 판단하고, 대부분의 성인은 3, 4단계까지 도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탁월한 성취를 이뤘음에도 비양심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옳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되면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다. 법적 처벌이나 타인의 비난이 없더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반면, 자신이 정의롭고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과 당당함을 느낄 것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은 도덕관념을 가지고 태어나며 도덕성은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타고난 도덕성이 잘 발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 말로 아이가 진정한 성공과 행복에 이를 수 있게 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다양한 관점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타인이 느끼는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인 것 같다.
사람들을 처음 만나게 되면 서로의 MBTI 유형을 묻거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유형을 추측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얼마 전 참여했던 대학 신입생 OT에서도 MBTI는 자기소개에 빠지지 않는 필수 항목인 것처럼 보였다. 수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정해진 16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이나 또 너무 대중화되어버린 탓에 오남용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MBTI가 무엇을 측정하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떤 유형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MBTI의 기반이 된 이론은 칼 융(C. G. Jung)의 심리학적 유형론으로, 이는 정신과 의사로서의 임상경험과 학문적 동반자였던 프로이트와의 갈등, 다른 이론가들과의 대립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학설이다. 융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입장이나 관점, 가치에 대한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발생하고 결국 편견과 오해, 논쟁이 생기게 된다고 설명했다. 융은 사람들의 마음은 각기 다르지만 몇 가지 특징적인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고 제안하며 심리학적 유형을 태도와 기능의 차이로 설명한다. 우선, 태도는 개인이 내적 또는 외적 세계에 대해 관심과 에너지를 투여하는 방향성에 따라 외향성과 내향성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기능은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의 네 가지로 분류되는데, 사고와 감정은 합리적 기능, 감각과 직관은 비합리적 기능이라고 구분한다. 이 중 사람들이 그나마 가장 쉽게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는 특성이 바로 외향성과 내향성의 차원인데, 그만큼 오해가 많은 영역이기도 하다. 흔히 외향적인 태도는 활발하고 사교적인 사람의 태도를, 내향적인 태도는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인 태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이 개념의 일부만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우연히 외향적인 사람과 내향적인 사람이 좋아하는 소설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대화가 깊어짐에 따라 이 두 사람은 자신들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외향적인 사람은 주로 작가의 명성, 유명한 비평가의 평론, 유서 깊은 문학상 수여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내향적인 사람은 그 소설에 대한 자신의 느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내향적인 사람은 작가의 유명세나 수상 여부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에 집중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그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좋아하는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실 이 두 사람은 모두 적극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외향형은 관심이 외부를 향하며 외부세계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관여하는 반면, 내향형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데 적극적이어서 외부 세계로 인해 자신이 침범당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을 뿐이다. 즉, 외향형은 에너지와 주의집중의 방향이 외부로 향해 있고, 내향형은 자신의 내적 생각이나 경험에 집중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융은 이 두 가지 태도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 같으며, 보통 사람도 쉽게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다르다고 보았다. 사회는 외향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극적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폭넓은 대인관계를 형성하며 활발한 사회활동을 잘 해내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고 비사교적으로 보이며 별 주장이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 내면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은 외적 기준이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집중하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다면, 그리고 자신의 장점과 한계를 적절히 인식하고 있다면, 그 누구보다 활기 있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내향적인 사람일 수 있다.
어느새 2월의 끝자락이니 곧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 다가온다. 누군가는 새 학교, 새 학년, 새 친구를 만나게 될 생각에 기대와 설렘으로 부풀어 있을 것이고, 낯선 환경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에 대해 걱정과 불안이 한 가득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익숙한 장소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새 출발을 한다는 건 일종의 도전이 될 수 있으며,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긴장과 부담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린이집을 졸업한 후 새로 입학한 유치원 가기를 거부하여 상담을 하게 된 아이가 있었다. 형제 중 맏이였던 그 아이는 영리하고 또래에 비해 의젓한 편이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잘 적응할 거라고 믿었지만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아침마다 여기저기 아프다는 핑계를 댔고, 나중에는 심하게 떼를 쓰거나 울면서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를 달래기도 하고 혼을 내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늘 신이 나서 어린이집에 가는 두 살 어린 동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이가 집에만 있은 지 두 달여가 지났을 때 어머니는 아이가 초등학교는 제대로 다닐 수 있을지 걱정이 몰려왔고, 결국 병원을 찾게 되었다. 사실 아이는 평소에도 다양한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보여 왔다.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무서워하여 8층 아파트를 계단으로 다니고 싶어 했고, 거실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기 위해 휴대용 가스렌지를 켜면 불이 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했다. 아이는 분리불안장애로 진단을 받아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분리불안장애는 어린 아동에게 흔히 나타나는 불안장애의 한 유형으로, 아이의 타고난 기질, 부모의 양육행동, 그 외의 다양한 인지행동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발생하는 심리적 장애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언제 불안을 느끼는 것일까· 보통 뱀이나 멧돼지 같은 위험한 동물을 만나거나 자칫 하면 크게 다칠 수 있는 높은 절벽을 오를 때, 혹은 중요한 시험이나 면접을 앞두고 있을 때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실제로 위험하거나 위협적인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정상정인 반응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위험이 없는데도 불안을 느끼거나 혹은 위험의 정도에 비해 지나치게 과도한 불안을 느끼는 경우, 그리고 불안을 유발한 위험요인이 사라졌음에도 불안이 계속되는 경우, 이는 정상적인 불안과 구별되는 병적인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불안은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도록 돕는 기능을 갖고 있다. 늦은 밤 홀로 길을 가는 중에 자신을 뒤따르는 발소리가 들린다면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거나 도움을 구하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불안은 우리가 위험을 피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게 하는 적응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불안반응이 부적절하게 작동하게 되면, 우리는 과도하게 긴장하고 걱정하며 불필요할 정도로 주변을 경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고통과 불쾌감을 수반하고, 적절한 학업수행이나 사회생활, 직업수행에 손상을 초래한다. 불안은 어떤 면에서 카페인과 유사한 것 같다. 적정량의 커피는 정신을 맑게 하고 집중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수면을 방해하는 등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마찬가지로 적당한 수준의 불안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과도한 불안과 긴장은 우리를 혼란 상태에 빠지게 한다. 혹시 지나친 불안 때문에 '불안'하다면, 이는 그 불안의 원인을 찾아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는 신호일 수 있다.
인간의 성장과 발달에 관한 오래된 논쟁점 중의 하나는 '유전이냐 환경이냐'의 문제이다. 즉,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후천적인 환경적 영향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물음이다. 인간의 다양한 속성 중 비교적 답이 명백해 보이는 영역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키나 얼굴 생김과 같은 외양에는 유전이 더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정서, 성격, 인지 능력, 신체 또는 정신질환과 같이 우리가 주목하는 대부분의 인간 특성은 유전과 환경이 상호작용하여 발달하며, 그 특성에 따라 유전과 환경의 상대적 영향력이 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지적 능력은 어떤 과정을 통해 발달하는 것일까? 타고난 지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부터 지적 자극이 풍부한 교육환경에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할까? 일찍이 영국의 철학자인 존 로크(J. Locke)는 아기는 소위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빈 석판(tabla rasa)'으로 태어나고, 출생 이후의 경험을 통해 세상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나간다고 보았다. 따라서 독특한 한 개인으로 성장하는 데는 부모의 교육과 훈련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정말 아기는 백지상태로 태어나 후천적인 경험을 통해 빚어지는 그런 존재일까? 어린 아기를 보면 로크의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한 듯 여겨진다.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지내고, 돌봐주는 어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먹고 자고 우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아기는, 어찌 보면 참으로 무력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기는 생래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과학자로 태어난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바로 아동의 인지발달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심리학자로 평가받는 피아제(J. Piaget)이다. 그는 자신의 어린 자녀들의 성장 과정을 직접 관찰한 결과 아이들은 자신의 경험과 주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적극적, 능동적으로 세상에 대한 지식을 발견하거나 구성해나간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따라서 아동 스스로 탐험하고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동 자신이 모순이나 오류를 발견할 때 지적 발달이 일어나므로 먼저 가르치거나 지시하기보다 스스로 원리를 알아내게끔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아이들은 경험과 세상을 이해하는 인지적 장치 또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인간의 지적 발달은 무(無)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특정 지식은 매우 쉽게 그리고 빨리 습득할 수 있게끔 진화해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 특정 지식에는 구어적 의사소통, 사물에 대한 기초지식, 사람에 대한 이해 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생후 3, 4개월 즈음이면 형태와 색깔에 근거하여 사물을 분류할 수 있고, 6~8개월 정도가 되면 1+1=2, 2-1=1과 같은 간단한 수학적 원리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타인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는 능력 역시 매우 어린 시기부터 발달하여 대략 18개월 정도가 되면 타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고, 점차 마음과 행동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타고난 지식이 전부는 아니다. 초기의 지식을 정교화시키고 더 성숙한 지식체계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수적일 것이다. 어쩌면 아기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아기가 느끼고 지각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 아기는 불완전하지만 작은 과학자로 태어난다!
매년 이 즈음이면 생각나는 학생이 있다. 불안과 학업의 어려움을 주호소 문제로 상담실을 찾아왔고, 자격증 시험을 두 달 정도 남긴 시점이었다. 아무리 쉬운 시험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시험'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누구나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고,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이었기에 그 학생의 부담감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학생은 불안감뿐만이 아니라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신체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두통과 소화불량, 구토, 어지럼증, 반복되는 위경련 등 몸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지만, 막상 병원에 가면 특별한 이상은 없고 신경성인 것 같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공부는 고사하고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조차 점점 어려워졌고, 결국에는 시험을 치르지도 못한 채 휴학을 하고 본가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렇게 한 가지 이상의 신체적 증상을 고통스럽게 호소하거나 그로 인해 일상생활이 심각하게 방해받는 경우 '신체화 장애'를 고려해볼 수 있다. 신체화 장애를 갖는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다양한 신체 증상을 호소하며, 특정 신체 부위의 통증부터 막연한 피로감까지 그 증상은 다양하다. 또한, 심각한 의학적 질병과 상관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자신의 신체증상을 매우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며 병원을 비롯한 여러 의료기관을 반복적으로 방문하는 경향이 있다. 신체증상과 건강에 대한 염려가 지나쳐 과도한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하면서 일상생활을 제대로 꾸려나가는 것이 어렵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신체화 장애의 경우 다양한 증상을 설명할 수 있는 특정 신체적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증상의 발생과 유지에는 심리적 원인이 작용하는 것으로 추정되곤 하는데, 신체화 증상을 억압된 감정의 신체적 표현이라고 보는 관점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감정은 적절히 표현되어야 하는 내적 동기인데, 감정이 지나치게 억압되면 그 감정이 다른 경로 즉, 신체를 통해 더욱 강하게 표현된다는 것이다. 신체화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내적으로 불안, 죄의식, 우울, 분노, 적대감 등의 부정적 감정을 갖고 있지만, 이를 좀처럼 인정하거나 표현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상담의 첫 번째 목표는 몸의 고통과 관련된 내적 갈등이나 부정적 감정을 자각하고 수용하며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된다. 앞에 언급했던 학생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학업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모범생이었기에 어머니의 질책과 압박을 묵묵히 견뎌내며 나름 공부에 충실하고자 했지만,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한계에 도달했고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신체적 고통에 모든 것이 멈춰버리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 학생이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과 분노, 학업에 대한 부담감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몸과 마음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몸에 병이 나면 마음이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반대도 가능해서 마음이 아파지면서 몸에도 이상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병에는 목적 의미가 담겨있는 경우가 있다. 마음은, 특히 부정적 감정은 회피할수록 그 세력을 더 키워나가며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알아주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감정인 것 같다. 어쩌면 분명한 의학적 원인 없이 몸이 힘들고 자꾸 여기 저기 아플 때, 이는 마음을 들여다보라는 신호일 수 있다. 내면의 힘든 마음이 그 부정적 위세를 과격하게 드러내기 전에 미리 잘 알아주고 어루만져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스트레스'라는 말을 한다. 직장에서는 과도한 업무나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돌아와서는 밀린 집안일이나 가족과의 의견충돌, 또는 대출금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학생들은 학업이나 시험 때문에 또는 친구 관계의 문제로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이외에도 미세먼지나 교통체증, 층간 소음처럼 이제는 익숙해질 법한 일상적인 일들도 우리를 꽤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스트레스를 만병의 근원이라고는 하지만, 하는 일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경험하며 스트레스가 우리 삶의 일부분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스트레스가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어쩌면 스트레스는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예를 들어, 등산로에서 갑자기 멧돼지를 마주치는 것과 같은 위급상황에 직면하면, 스트레스는 이 긴박한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일종의 화재경보기 역할을 함으로써 멧돼지에 맞서 싸우거나 또는 재빨리 도망칠 것인지를 매우 신속하게 결정하고 대응 태세를 갖추도록 만드는 것이다. 한편, 일상에서의 적당한 불안감이나 압박감, 긴장감은 우리로 하여금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부담감을 느낀다면 열심히 공부할 것이고, 불어난 체중 때문에 짜증이 난다면 야식을 줄이거나 운동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잦은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자신의 대인관계 패턴이나 의사소통 방식을 점검해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이 편안하고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상태라면, 우리는 아무런 준비나 노력을 하지 않게 되며 이런 경우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적정 수준의 스트레스는 우리의 삶에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즉, 좋은 스트레스는 시계 바늘을 되돌리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도한 스트레스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우는 어떨까· 처음에는 나름의 방식을 동원하며 대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는 치명적인 손상이 발생하게 된다. 늘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경계 태세를 갖추고 생활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대처 에너지는 고갈될 것이다. 대개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로 두통이나 소화불량, 근육통, 불안이나 무력감 등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스트레스를 피할 수는 없다.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부정적인 생활 사건은 늘 발생하기 마련이며, 또한 무언가를 성취해내고 새로운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에는 스트레스가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스트레스가 있고 없고보다는 스트레스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또 어떤 방식으로 관리하며 대처해나가느냐가 핵심일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스트레스 대처법을 갖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자거나 매운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운동이나 게임, 술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개인의 특성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한 스트레스 해소법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습관적 혹은 자동적으로 적용하는 스트레스 대처방식이 과연 건강하고 효율적인지는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안경으로 세상을 본다. 내가 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사람이 보는 세상이 동일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인터넷 상에서 '원피스 색깔'과 관련해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원피스 색깔에 대해 '흰 바탕에 금색 줄무늬'라는 의견과 '파란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라는 의견으로 나뉘었고, 같은 사진임에도 사람마다 색을 다르게 인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다. 그 논란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해답은 생각나지 않지만, 이러한 현상은 각자의 경험에 근거하여 뇌가 색을 다르게 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하며 따라서 자신이 보는 것이 늘 정답은 아닐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비교적 분명해 보이는 물리적 자극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상대적으로 모호한 사람의 행동이나 사회적 상황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더 다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공이나 실패,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다툼이나 갈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나 주변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 원인을 밝히려고 동기화되어 있는데,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귀인(歸因, attribution)이라고 한다. 귀인은 자신이나 타인의 행동 혹은 특정 사건의 원인을 추론하는 과정을 지칭하며,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이후의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 특정 행동이나 사건에 대해 귀인 과정을 경험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유사한 인과적 설명을 적용하는 경향성인 저마다의 귀인양식(attribution style)을 갖고 있다. 귀인양식은 원인의 소재(원인을 개인의 내부 혹은 외부로 귀속시키는 경향성), 안정성(변화 가능성에 대한 신념), 통제 가능성(개인이 원인을 통제할 수 있는 정도에 대한 신념)의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요한 시험에 실패했을 때 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하고(내부 귀인), 앞으로도 시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며(안정적인 귀인), 결과가 자신의 노력 여부와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통제 불가능 귀인) 경우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시험을 잘 보지 못한 이유가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 평소보다 문제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여기고(외부 귀인), 다음번에는 잘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며(불안정 귀인), 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을거라고 믿는(통제 가능 귀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자를 비관적 귀인양식이라고 하고, 후자를 낙관적 귀인양식이라고 한다. 시험의 실패라는 동일한 부정적 사건에 대해 누군가는 심리적 괴로움을 적게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은 물론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반면 자신의 능력 부족에 괴로워하며 노력해도 달라질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에 자기와 세상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되고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Epictetus는 "인간은 객관적 현실에 의해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견해에 의해 고통받는다."고 말한 바 있다. 어찌보면 우리의 행복과 고통은 '각자의 눈' 즉, 현상에 대한 주관적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안경을 쓰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삶과 세상을 다소 장밋빛의 렌즈로 보고 있을까? 아니면 어두운 회색 렌즈로 보고 있을까?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거나 혹은 스스로 정한 기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갖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키가, 혹은 명석하지 못한 두뇌나 수줍은 성격이 마음이 들지 않는 부분일 수 있고, 또 누군가는 가난한 집안 형편이나 내세울 것 없는 형제들이 못마땅한 부분일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이 가진 것이 남들보다 못해 스스로를 낮추어 평가하는 마음을 '열등감'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가끔 열등감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을 통해 감추려고 하거나 과장되게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열등감은 우리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나쁜 것일까? 열등감은 연약한 인간에게 자연이 준 축복이며, 열등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열등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해나가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바로 알프레드 아들러(A. Adler, 1870-1937)이다. 아들러는 잦은 병치레로 몸이 허약했고,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못해 단순 기술을 배워보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또한 형에게는 질투를, 어머니의 사랑을 빼앗아 간 동생에게는 부러움을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격려를 통해 학업에 열중하게 되었고, 결국 명문대에 입학하여 바라던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아들러는 자신의 경험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열등감은 인간에게 보편적이며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보게 되었다. 또한, 열등감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기지 않고, 그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즉 사람들은 열등감을 극복하고 보상하는 과정에서 삶의 목표를 세우고 생활양식을 형성해가면서 개인적인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나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나치게 열등하다고 평가하거나 또는 열등함을 숨기려 삶의 도전을 회피한다면 그 마음은 열등콤플렉스가 되어 건강하게 적응하고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을 손상시키게 된다. 열등감을 극복하는데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중요하다. 열등감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과도한 홀대를 받거나 혹은 지나친 과잉보호로 열등감을 심화시키는 환경에서 성장한다면 그 열등감은 엉뚱한 방향을 향하게 된다. 이런 경우 자신의 능력을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가하고 자신이 항상 우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월콤플렉스에 빠지기 쉽다. 자존감이 낮거나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내담자를 만나면 "좋아하는 사람의 단점을,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의 장점을 찾아보라."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대부분은 100% 좋은 면만 혹은 나쁜 면만 갖고 있는 사람은 없으며, 이는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자신의 장점과 강점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동시에 단점과 약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다면, 그리고 부족한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수 있다. 자신의 열등한 면을 인정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지만,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현재 자신의 부족한 면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단점과 약점을 개선하고 보완하고자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충분히 건강하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8월도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렀다. 여전한 무더위에 선선한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여름이 가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여름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운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한참이 지나야 다시 맞이할 수 있는 여름 휴가 때문인 것 같다. 장마나 태풍 같은 날씨가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성수기에 꼭 휴가를 가야할까? 하는 망설임이 들 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휴가를 계획하며 기다린다. 한여름의 휴양지에서 달콤한 휴식을 즐기고 있거나 평소에 하지 못했던 좋아하는 취미활동에 몰두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 혹은 마음이 맞는 사람과 낯선 여행지를 거니는 장면을 떠올려보는 것은 일상의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견뎌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잠시나마 해야 할 일을 내려놓고 '그냥 놀 수 있는' 휴가는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시간인 것 같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놀이하는 것만 '놀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러나 놀이는 아이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호이징아(J. Huizinga, 1872-1945)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호모 루덴스(Homo Ludense)'의 개념을 소개하며, 인간의 중요한 본질은 '놀이'라고 제안했다. 즉, 놀이는 인간의 본성으로, 어린 아이만 하는 것도 아니고 성인이 시간이 남아돌 때 하는 하찮은 활동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가벼운 마음으로 놀이를 즐기고 언제든 자유롭게 놀이를 그만 둘 수 있지만, 인간은 놀이할 때 총체적으로 몰입하는 존재가 되어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호모 루덴스는 효용성, 생산성, 노동의 가치에 밀려 평가절하되어왔던 놀이를 관심의 중심으로 가져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놀이는 무엇일까? 우선 놀이는 그 자체가 목적이며 과정 지향적인 행위이다. 특정한 목표가 있더라도 그 목적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면 놀이가 될 수 있다. 외부의 압력이 작용하는 일과 달리 놀이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또한 놀이에는 즐거움이 따른다. 놀이는 다양한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정서는 즐거움이다. 놀이를 하면서 경험하는 즐거움과 재미는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 아마도 놀이에 빠져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놀이는 융통성을 갖는다. 놀이를 통해 어느 정도는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비현실성은 특히 아이들의 놀이에서 두드러진다. 마지막으로 놀이는 그 자체로 치유적 힘을 갖고 있다. 이완과 몰입, 즐거움과 재미라는 긍정적 정서는 심신의 안정과 회복탄력성을 높일 수 있다. 남들 다 가는 휴가철이 아니어도 좋을 것 같다. 조금은 일찍 퇴근한 저녁 시간이나 주말을 활용해서라도 우리는 놀 수 있다. 혼자 좋아하는 영화를 보거나 운동을 즐기는 것, 평소 시간이 없어 가지 못했던 곳에 가보는 것이나 창조성을 발휘하여 요리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겠다는 특별한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선택하여 즐기며 몰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모든 활동은 놀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다른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서로의 표정과 행동을 살피고 말투와 뉘앙스를 들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에 비해 문자로 소통을 하고, 다양한 이모티콘을 활용하여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훨씬 익숙하고 편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렇게 된 데는 아마도 어느새 나와 한 몸이 된 듯한 스마트폰의 영향이 있을 듯 하다. 스마트폰을 쓰는 경우 상대방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간단히 정리해서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을 통해 전달할 수 있기도 하고, 특히 다소 곤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을 붉힐 만한 불편한 상황을 피할 수 있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를 통해 서로의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히 나눌 수 있는 기회 자체가 감소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때로는 일상이 너무 바빠 찬찬히 대화를 나눌 시간이 부족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마주 앉아 있기는 하지만 각자의 전화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면 반드시 시간이 없어 대화하지 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화는 사전적으로는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또는 그 이야기'를 뜻하는데, 언어적·비언어적인 방법으로 의미를 만들어 내고 공유하는 방식이며 사람들 간의 상호교류와 친밀감 형성, 갈등 해결의 주요 도구가 된다. 실제로 심리학자이자 부부·가족치료사인 존 가트만(J. Gottman)은 부부를 이혼에 이르게 하는 것은 사실 성격 차이가 아니라 대화방식의 문제 때문이라고 제안하며, 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하는 네 가지 부정적인 의사소통방식(비난, 경멸, 방어, 담쌓기)을 규명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효율적 의사소통의 특징은 무엇일까? 관계에 도움이 되는 의사소통 요인은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경청(敬聽)이다. 경청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귀담아 듣는 것으로, 말의 내용뿐만 아니라 말하려는 의도, 심정 등을 주의 깊게 정성 들여 듣는 태도를 의미한다. 즉, 한자 표현에도 나타나 있듯이 눈(目)과 귀(耳)와 마음(心)으로 상대방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경청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말하는 이야기의 내용을 파악하고 몸짓, 표정, 음성 등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며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심층적인 의미와 감정을 감지하여 이해한 바를 공감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코로나19를 겪어내며 우리는 다양한 비대면 대화방식을 활용하고 그 유용성을 경험하였다. 일정 부분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그 편리함이나 효율성에 있어서 긍정적인 측면 역시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직접 대면하여 대화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거나 혹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조차도 대면 의사소통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서로 얼굴을 마주한 채 눈빛을 주고받고 표정과 몸짓을 읽어가며 대화할 때 그리고 호흡과 말투, 침묵에 귀를 기울이며 대화할 때, 서로의 속마음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진심을 주고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노키즈존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찬반 입장이 팽팽함에도 노키즈존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키즈존은 왜 생겨난 것일까? 과거에 비해 아이들이 너무 제멋대로인 탓일까? 아니면 어른들이 너무 옹졸해져서 더 이상 아이다움을 이해하지 못해서일까? 한 번 기분이 나빠지면 주변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화를 내고, 특히 엄마에 대한 반항이 극심하다는 이유로 상담실을 찾은 아동이 있었다. 유치원에서는 또래와의 다툼이 잦고 산만함이 지나쳐 선생님께 혼나는 날이 많았고, 집에서는 조금이라도 훈계를 하려 들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내던진다고 했다.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한밤중에라도 마트에 가야 했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길거리에 드러누워 발버둥을 쳐댔으며 한 번 드러누우면 트럭이 와도 꼼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겨우 7세였지만, 엄마는 가끔 아이가 무섭게 느껴질 정도라고 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웠음에도 아이가 여기저기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며 속상해했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극진했다. 엄마는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었다. 유기농 식자재로 아이만을 위한 음식을 해먹이고, 집안을 장난감으로 가득 채웠으며, 수백 권의 동화책을 읽어주었다고 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었고, 비싼 교육비를 들여 유명하다는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있었다. 좋은 환경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이 아이에게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마도 이 아이는 자기통제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 같다. 자기통제란 정서나 행동을 효율적으로 조절하는 능력으로, 유혹을 떨쳐내고 충동을 억제하며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즉각적인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과 관련된다. 자기통제의 초기 형태는 주로 안전과 관련되거나 친구들과 함께 있는 상황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전자를 만져보고 싶지만 "뜨거워. 만지면 안돼."라는 엄마의 말에 호기심을 억누르고, 장난감을 갖고 싶지만 "다른 사람의 장난감을 빼앗으면 안돼."라는 선생님의 말에 친구가 줄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아이는 이 세상에는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고, 자신의 원하는 대로 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더 바람직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통제하는 방법을 배워나가게 된다. 자기통제력은 연령의 증가와 함께 서서히 발달한다. 아주 어릴 때는 어른이 행동을 규제하고 한계를 설정해주어야 하지만, 점차 어른의 규칙을 내면화하면서 일정 연령이 되면 직접적인 지시 없이도 어느 정도는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자기통제력에서의 개인차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자기통제력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양육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즉, 따뜻하고 애정적이지만 동시에 제한설정이 명확한 훈육방식이 핵심인 것이다. 부모는 분명한 행동의 기준을 갖고, 이 기준을 아이에게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규칙은 합리적이어야 하며, 충분한 대화와 설명을 통해 아이가 규칙을 지켜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아이가 규칙이나 제한을 어겼을 때는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부모의 태도를 권위 있는(authoritative) 양육방식이라고 한다. 자녀가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워 무작정 애정만을 쏟는다고 해서 건강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애정과 적절한 통제를 함께 제공해줄 때, 즉 부모에게 따뜻함과 엄격함이 공존할 때, 자녀는 자율적이면서 예의 바른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5월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등이 있어 부모님과 자녀, 그리고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우리는 일생 동안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지만 아마도 부모님만큼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자들은 생의 초기 부모와의 관계는 이후 그 사람이 맺게 되는 다른 인간관계의 원형이 되며, 정서·사회적 발달은 물론 정신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부모와 자녀 간 '애착'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영국의 정신의학자 볼비(John Bowlby)였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부모를 잃은 아동들을 관찰하면서 모성 결핍이 아동에게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발견하였고, 주양육자(주로, 어머니)와 아이 간의 강력한 정서적 유대감을 애착이라고 정의했다. 생의 초기 돌봄의 중요성은 1960년대 루마니아에서 실시된 고아원 아동에 대한 대규모 연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좋은 음식과 잠자리가 제공되는 시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격리되어 자란 아이들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성장해서도 다양한 문제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에게는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민감하고 따뜻한 돌봄을 제공하며,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과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이다. 인간의 아기는 매우 나약한 채로 태어나 오랜 시간 누군가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없다면 위험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주양육자와의 정서적 유대 형성은 아기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군가와 애착을 형성하게끔 선천적으로 프로그램 되어있으며, 아기는 '울기, 미소짓기, 매달리기, 부르기' 등의 다양한 행동을 통해 양육자를 자신의 곁에 두려고 한다. 관심과 돌봄을 끌어내기 위한 아기의 행동을 양육자가 민감하게 알아채고 적절하게 반응해준다면, 아기는 양육자에 대한 안정 애착을 형성하게 된다. 아기는 "내가 힘들면 언제든지 엄마가 나에게 와줄 거야. 엄마는 나를 보호하고 도와줄 수 있어."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양육자와의 안정애착은 아기가 주변 세상을 탐험하는 동안 '안전한 기반'이 되어주며, 동시에 세상의 거친 파도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되돌아와 위로와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의 역할을 한다.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한 아기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적극적으로 세상을 탐색해나갈 수 있고, 감정 조절이 원활하며, 주변 사람들과도 편안한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모든 아기가 안정애착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어서 대략 3분의 1 가량의 아기는 불안정 애착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안정적인 애착은 양육자가 아기에게 반응하고 조율해가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달하는데, 이 과정이 빗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양육자가 정신적 어려움이나 심각한 재정적 또는 관계적 문제를 겪고 있는 경우 아기의 신호에 민감하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심각하게 냉담하거나 비일관적인 상호작용 방식이 일정 기간 이상 지속된다면, 아기의 '누군가를 사랑하게끔' 미리 준비된 프로그램은 쇠퇴하게 된다. 양육자가 반드시 생물학적 엄마일 필요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주양육자가 엄마로 국한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가 아니더라도 무기력한 아기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살펴줄 수 있는 어른이 꼭 필요하다. 모든 아기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너야. 너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나에게 소중해."라고 진심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가질 자격을 갖고 있다.
눈처럼 하얀 털을 가져 '(백)설기'라는 이름을 지어준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다. 입양 당시 1㎏도 안 되는 몸무게의 작은 솜뭉치 같던 강아지는 어느새 7세가 되었고, 이 나이는 사람으로 치면 대략 40대 중반을 넘어서는 것과 유사하다고 했다. 나보다 빠른 시간을 사는 강아지의 건강이 걱정되어 동물병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건강검진도 하고, 이것저것 몸에 좋다는 건강보조제도 챙겨 먹이게 되었다. 강아지가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셀 수 없이 많다. 까맣고 동그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서 묻어나오는 나에 대한 애정과 집착, 꼭 안았을 때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과 꼬순 냄새,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 때 누구보다 먼저 나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꼬리를 치며 매달릴 때의 격한 반가움, 쌀쌀한 밤이면 코로 이불을 들추고 겨드랑이 속으로 파고드는 영리함, 산책길에서 보여주는 건강함과 호기심, 길에서 만난 고양이나 비둘기를 위협하는 허세 가득 찬 용맹스러움까지. 직장과 가정일로 바쁘고 때로는 힘겨운 일상 속에서 강아지는 잠시 현실의 걱정거리와 짐을 잊고 순수한 사랑과 기쁨을 경험하게 해주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강아지를 키우면서 늘 행복감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강아지는 기쁨을 주는 것 이상의 책임감과 부담감을 지워주는 존재인 것 같다. 입양한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을 때 강아지한테 금기라는 포도를 삼켜 한밤에 응급실에 데려간 적이 있다. 약을 먹여 억지로 구토를 하고 축 늘어져 있던 강아지를 보며 실수로 포도를 떨어뜨린 나 자신을 원망하며 속상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강아지와 함께 사는 것이 참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다. 나만 바라보는 시무룩한 눈길을 뒤로 한 채 출근길을 나설 때, 바쁜 업무에 치여 놀아달라며 치대는 강아지를 밀쳐낼 때, 퇴근이 늦어 그 좋아하는 산책을 다음 날로 미뤄야 할 때, 빨갛게 부어오른 귀를 뒤늦게 발견했을 때. 말로 하기 어려운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보험적용이 안 되는 병원비나 나에게 들이는 것보다 훨씬 더 비싼 미용비로 인한 경제적 부담은 차치하고서도 말이다. 반려동물 인구 1천500만 시대에 접어들면서 반려동물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많은 심리학적 연구가 실시되고 있다. 반려동물과의 상호작용은 긍정적 정서나 삶에 대한 의욕을 증진시키고 스트레스나 외로움, 우울 같은 부정적 정서는 완화시키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한, 반려동물은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 습관 형성을 촉진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체적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렇게 반려동물이 정서적 교감 및 애착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사람들의 신체적, 심리적 건강에 기여하는 현상을 '반려동물효과(Companion animal effect)'라고 한다. 인간과 반려동물과의 관계는 한층 더 가까워지고 있다. 반려동물을 단순히 애완동물로 여겼던 시기도 있었으나, 현재 대부분의 반려동물 입양가족은 반려동물을 '가족' 또는 '가족이나 다름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반려동물에 대한 학대나 방치, 유기에 관한 뉴스를 접하게 되면 생명이 있는 존재에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안타깝고 화가 나 차마 기사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강아지가 딱 한 마디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묻고 싶은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네가 있어 참 좋은데, 너도 나랑 함께 사는 것이 행복하니?"라고 묻고 싶었다. 온전히 나만 바라보는 그 눈망울은 "엄마와 함께 살아서 행복해요. 나에겐 엄마가 전부에요"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누군가에게 세상의 전부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면서도 무거운 일이다.
흥부 놀부, 콩쥐 팥쥐, 신데렐라, 백설공주… 우리에게 익숙한 이 이야기들에는 선과 악을 분명히 드러내는 인물이 등장한다. 선한 주인공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착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악한 인물의 괴롭힘에 의해 상당한 고초를 겪는다. 결말은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선한 주인공은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악한 인물을 벌을 받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런 식의 옛이야기들은 '인과응보'나 '권선징악' 같은 교훈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러한 전통적인 해석 방식에서 벗어나 옛이야기를 새로운 관점에서 분석하고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 왔다. 그 중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민담이나 전래동화를 통해 인간 정신의 보편성을 말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들은 인간 정신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종종 특별한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을 접하게 된다. 자신에게 해를 입히거나 손해를 끼치지 않음에도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나름 싫은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 이유 이상으로 그 사람이 싫은 것이 대부분이다. 왠지 모르게 그 사람이 못마땅하게 여겨지고 말이나 행동에 화가 나기도 하여 그 사람과의 만남을 꺼리게 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그림자'의 투사라고 설명하며, 그림자는 나의 일부이지만 평소 의식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나'라고 정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 지향점을 갖고 살아가는데, 그 과정에서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 특성들은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기 쉽다. 내 것이지만 내가 인정하지 않는 내 특성들이 억압되면서 그림자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억압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지고 그 힘은 커지며 자신의 세력을 드러내려고 애를 쓴다. 놀부나 팥쥐, 못된 계모와 나쁜 언니들은 사실 선한 주인공과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흥부와 콩쥐,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의 분신일 수도 있는 것이다. 분신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분신은 자신을 알아달라고 끊임없이 주인공을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적 관점에 의하면, 괜히 불편하고 껄끄럽게 여겨지는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내 그림자를 갖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못할 때, 우리는 투사라는 심리적 기제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나의 그림자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비난하고 혐오하게 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비슷한 분류의 사람들 간의 갈등은 대개 그림자의 투사로 인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무언가를 추구하며 사는 한 그림자는 나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그림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융은 그림자를 살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 출발점은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며, 내가 비난하고 있는 그 특성이 혹시 내 안에도 숨어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스스로 나쁘다고 여겨왔던 것들을 직접 실행에 옮겨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매사에 겸손하고 타인을 위하는 삶을 살아왔다면, 때로는 제멋대로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혹은 만사에 최선을 다하며 완벽주의적인 삶을 추구해왔다면, 가끔은 흐트러지고 나태한 생활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활해본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림자는 그늘에 가려져 있어 부정적일 뿐 햇빛을 받으면 긍정적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과정이기는 하지만, 마음속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소화시켜 나간다면, 우리의 정신은 그만큼 확장되고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은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내 아이에게 최고의 것을 주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의 공통된 바람일 것이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를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헌신하며 다방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것이 최선일까? 정답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시대와 문화, 또는 개인이 처한 현실에 따라 양육관이나 교육관은 달라지고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알아야 하고 갖추어야 할 것은 많겠지만, 아마도 그 시작점은 '내 아이의 타고난 성향을 잘 이해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각 개인의 타고난 성향을 기질이라고 말한다. 기질은 생물학적 기초 및 유전적 요소를 갖는 타고난 반응 경향성으로, 시간이나 상황에 걸쳐 비교적인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개인적 특성을 일컫는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 모여있는 신생아실에서 우리는 다양한 기질을 접할 수 있다. 어떤 아기들은 아주 작은 움직임이나 온도 변화도 민감하게 알아채고 큰 울음으로 반응하는가 하면, 배가 고프거나 옆자리의 아기가 아무리 큰 소리로 울어도 별다른 반응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아기가 있다. 환경적인 영향에 거의 노출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타고난 기질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기질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자극에 대해서도 다른 정서를 느끼고 또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타고난 성향대로만 사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부모의 양육방식과 성장하면서 경험하는 환경에 의해 또는 자신의 노력에 의해 기질이 표현되는 범위나 방식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타고난 기질에 부모의 양육이나 환경적 영향이 덧붙여져 형성된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우리는 성격이라고 지칭한다. 타고나길 거북이처럼 속도가 느리거나, 작은 위협에도 쉽게 겁을 내며 가시를 세우는 고슴도치 같은 아이가 있을 수 있다. 또한, 한 번 화가 나면 주변을 압도하는 사자 같은 아이도 있는가 하면, 얼룩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도 있을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기질 자체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느냐에 따라 기질의 발현은 달라질 수 있고, 적절히 조절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믿음을 갖고 기다려준다면, 아이는 조금 늦더라도 끝까지 완주해낼 수 있을 것이고 까칠한 아이는 자신의 성향을 잘 살려 섬세하면서도 신중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감정과 행동을 적절히 조절하는 방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다소 과격한 아이는 용감하고 리더쉽이 강한 아이로, 활동적인 아이는 대담하고 열정적인 아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의 타고난 기질을 무시한 채 부모가 바라는 대로 혹은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모습대로만 아이를 키우려고 한다면, 아이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또 부모와 같은 중요한 사람들에게 그 모습 그대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며, 삶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아이들만을 위한 생각할거리는 아닌 듯 싶기도 하다. 우리 어른들도 때로는 나의 본성을 잘 인식하고 실현하고 있는지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있다. 성공하기 위해,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기 위해 또는 사회생활을 잘 해내기 위해 가면과도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특별한 이유 없이 주변 사람들과 자꾸 부딪친다면 혹은 일상이 부쩍 무기력하고 힘겹게 느껴진다면, 혹시 진짜 내 얼굴을 잊고 있거나 감추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