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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중

전 단양교육장·소설가

책을 읽다 번역가 박여진 씨의 글을 만났습니다. 경남 하동을 거닐다 박경리 작가를 생각하며 대하소설 '토지' 속에 얽혀 있는 무수한 인연들을 떠올리게 된 그는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인연에 대한 생각을 나직하게 읊조렸더군요.

'인연은 흔적을 남긴다. 어떤 인연은 사소하고 작게 시작했다가 무럭무럭 자라 굳건한 뿌리를 내리기도 하고 어떤 인연은 상처를 내고 흉터를 남기기도 한다. 껌이 엉겨 붙은 머리칼처럼 가망 없이 얽힌 인연도 있고, 유쾌하고 반짝였지만 별것 아닌 이유로 빛이 바랜 인연도 있으며 실망과 지겨움에 구겨진 인연도 있고, 너무 당연해 함부로 대했다가 후회로 멍든 인연도 있다. 더러는 소중하고 애틋하게 지키고 싶었지만 더 이상 내 시간과 공간에 머물지 않게 된 인연도 있다. 연(緣)은 마음먹은 대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탄탄하게 맺어지기도 하고, 애를 쓸수록 지치고 복잡하게 얽히기도 하며, 너무 엉성해서 조금만 당겨도 툭 끊어지기도 한다.'

찰진 묘사 때문에 잠시 책에서 시선을 떼어냅니다. 책을 읽다 느닷없이 만나게 된 '인연'입니다. 인연하면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이 생각나기 마련이지요. 과거 교과서 속에서 만났던 작품이기 때문에 줄거리마저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아사코와의 만남과 헤어짐에 얽힌 추억을 소재로 인연이란 말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 주었던 작품입니다.

아사코의 뺨에 입을 맞추고 반지와 동화책을 선물로 주고받은 첫 번째의 만남, 신발장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의아해 하는 아사코의 태도를 보여주는 두 번째 만남, 그리고 시들어가는 백합 같은 아사코와 악수도 없이 절만 하고 헤어지는 세 번째 만남. 이처럼 어떤 상황에 대해 '그 정도를 점점 약하게 하거나, 작게 하거나, 낮게 하는' 점강적인 글쓰기 방법으로 전개한 작품은 제목인 '인연'과 잘 맞닿아 있습니다.

인연(因緣). 불가(佛家)에서 유래된 낱말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생기하거나 소멸하는 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보고, 생멸에 직접 관계하는 것을 인이라고 하며, 인을 도와서 결과를 낳는 간접적인 조건을 연으로 구별하는데, 실제로 무엇이 인이고 무엇이 연인가를 확실히 구분하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인연은 '인과 연'과 '인으로서의 연'의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이 양자를 일괄해서 연이라고 하며, 인연에 의해서 사물이 생기하는 것을 연기(緣起)라고 하고, 발생한 결과를 포함해 인과라고 합니다. 인연, 연기, 인과는 불교 교리의 가장 근본적인 사고방식인데, 반드시 인(因)에서 과(果)로 가는 시간적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동시적인 상호의존관계와 조건도 의미합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전생에 지은 업으로 인해 금생의 어떤 인물로 태어났다는 '인과'나 '윤회사상'의 일부가 된 인연은 '삼국유사'에 두루 실려 있습니다. 한 가지의 예로 '효선(孝善)'에 실린 '대성효이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를 보면 불국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김대성이 전생에 무밭 세 개를 보시한 공덕으로 후생에 재상집에서 태어났다는 인연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인연은 한국인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구비문학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공양미 3백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에 뛰어들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심청전'에서처럼 일반 민중들의 도덕률을 형성하는데 일조했던 것이지요.

필자가 책을 읽다 느닷없이 만나게 된 '인연'이라는 단어를 오래도록 붙잡고 늘어지게 된 것도 하나의 작은 인연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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