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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중

전 단양교육장·소설가

코로나의 위세가 사그라지지 않아 모두가 우울한 명절을 보낸 뒤끝입니다. 소슬한 바람이 전깃줄을 울립니다. 여전히 나들이를 할 때면 옷깃이 여며집니다. 입춘을 넘겼다지만 아직 봄은 멀었습니다. 가만히 창밖의 풍경을 바라봅니다. 먼발치에 헐벗은 나목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문득 가난하던 어린 시절의 명절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니 정확히 그 시절의 추억이 아른거립니다.

5·16 군사혁명 이듬해인 1962년의 설날쯤으로 기억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였지만 모두가 마음만은 부자로 살던 먼 산골의 두메 마을에도 어김없이 명절이 찾아왔습니다. 마침 밤사이 서설(瑞雪)이 내려 평소 탄진(炭塵)으로 그득했던 검은 산하는 은백색으로 가득 찼습니다.

명절이 되면 아이들이 먼저 들뜨기 마련입니다. 일 년에 두세 번을 먹을까 말까한 고깃국으로 오랜만에 배를 불린 까까머리 소년들은 아침 해가 떠오르자 끼리끼리 모여 이웃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라가 근대화의 물결을 타기 이전이어서 집집마다 가난이 어둠처럼 깃들어 있었기에 세뱃돈을 주는 어른은 없었습니다.

모두는 한결같이 덕담으로 세뱃값을 대신했습니다. 그렇게 서너 집을 순례했을 때였습니다. 골목길에서 손에 세뱃돈을 든 환한 얼굴의 동급생을 서넛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이 돈 담임 선생님께서 주신 세뱃돈이다."

아이들의 손에서는 지폐 한 장씩이 자랑스럽게 나풀거리고 있었습니다. 옳다구나 싶어 우리는 바삐 선생님의 댁을 향했습니다. 처녀였던 담임 선생님은 집이 멀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휴일 당직이라도 맡았던 것인지, 귀향을 하지 않은 채 자취집에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 섞여 바삐 걸음을 옮기며 나는 내게만 특별히 도톰하게 주어질 세뱃돈을 기대하며 빙그레 미소 지었습니다. 그러한 자신감은 서너 달쯤 전인 어느 가을날에 있었던 일에서 연유했습니다.

토요일 오후, 친구들 몇과 학교 근처의 공터에서 땅뺏기 놀이를 하다 선생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쁜 걸음으로 달려가니 함께 들판을 가자고 하시더군요. 의아했으나 숫기 없는 시골 소년이었기에 머릿속을 궁금증으로 가득 채운 채 묵묵히 뒤를 따랐습니다.

은혜로운 햇살과 황금빛의 은은함이 가득한 들판에 다다르자 선생님은 수줍게 피어난 들국화의 꽃잎을 따자고 하시더군요. 한참을 곁을 따르며 들국화의 꽃잎을 쓸어 담다 그 의도가 못내 궁금해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베갯속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들국화의 꽃잎으로 베갯속을 채우면 꽃향기가 은은하게 풍겨나 달콤하게 잠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날 두 시간 이상을 봉사한 대가로 선생님은 학용품을 사라며 석 장의 지폐를 주셨습니다. 그런 내게 다른 친구들보다 많은 세뱃돈이 내리리라는 짐작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댁으로 들자 선생님은 당시 공무원들이 즐겨 입던 고동색 코르덴상의와 코르덴바지 차림으로 우리를 맞으시더군요. 아랫목에 정좌한 선생님께 우리는 내려질 지폐를 생각하며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세뱃돈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서너 마디의 덕담만이 건너왔을 뿐입니다.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진 가슴으로 선생님의 댁을 나서며 우리는 다른 아이들이 더 쫓아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그랬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면서도 못내 아쉬워 입맛을 쩝쩝 다셨습니다.

오십여 년도 훨씬 지난 시절에 겪었던 그 소중한 기억은 어둠 속의 바다를 밝히는 등대처럼 내 가슴속의 한편에 오롯이 자리해 고스란히 추억 한 잎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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