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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여름의 추억 - 어머니의 손 글씨

  • 웹출고시간2017.06.28 15:20:00
  • 최종수정2017.06.28 15:20:00
[충북일보] 딸을 출가시키게 됐다며 기뻐하던 친구의 혼사에 가려고 봉투에 '축 화혼'이라고 썼다. 인쇄 돼 나오는 축의금 봉투도 있고 스탬프로 대신 찍어도 좋으련만, 나는 시대를 거스르듯 굳이 손 글씨를 고집한다. 손 글씨를 쓸 때 마다 어머니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초대장을 보내온 이를 떠올리며 나름대로 정성을 담고자 하는 뜻에서다.

나의 손 글씨는 빼어나게 잘 쓴 게 아니라서 막상 결혼식장 접수대에 봉투를 내놓을 때면, 세련된 컴퓨터 글씨에 주눅이 들지만 동글동글한 내 손 글씨가 좋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펜글씨를 쓰기 시작할 때다. 아버지께서는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이고 얼굴이다"고 하시며 또박또박 천천히 쓰는 습관을 기르면 좋은 글씨체가 된다고 하셨다. 신기 하게도 육남매 중 외동딸인 나를 제외한 우리 형제들의 필체는 곧은 정자체로 모두 비슷하다.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어 명필소리를 듣던 식구들의 닮은꼴 글씨를 보면 글씨에도 집안 내력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다.

필체가 좋으시던 아버지는 내가 결혼한 후에도 종종 편지를 보내주셨다. 그 덕분에 가끔 글쓰기를 해보는 습관이 길러졌다. 어머니의 글씨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라곤 다녀 본적도 없고 어깨너머로 간신히 한글을 터득하여 문맹소리를 면하셨던 어머니의 글씨는 당연히 난필이었다. 그때 본 어머니의 글씨가 아직도 눈에 가물거린다.

해병대에 입대했던 셋째오빠가 월남전에 파병 되었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고 잠 못 이루며 우시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슬픈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도 슬프고 아팠다. 당시는 통신 수단이래야 라디오로 베트남의 전쟁소식과 한국군의 치적을 듣는 것 외에 가끔 편지를 주고받을 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청룡부대에 같이 갔던 남주동 사람 김 병장이 전사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던 중에 오빠한테서도 연락이 끊기자 살아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우리가족들은 식구수대로 편지를 쓰기로 했다.

글씨는 전혀 쓸 줄 모르시던 어머니께서도 애타는 모정을 글로 띄워 보내기로 하고 하루는 온 가족이 안방에 모여 편지를 썼다. 철부지 나는 배를 깔고 방바닥에 누워 어머니 곁에서 글을 썼다. 겨우 안부를 물어보는 글 이었을 텐데 누가 볼세라 손으로 가려가며 진지하던 기억이 추억의 모퉁이로 돌아간다. 아버지께서는 제일 먼저 편지를 써 놓으시고 어머니의 글씨를 도와 주셨다. 나이 쉰에 처음 연필을 잡은 어머니의 손이 떨린다.

애 끓는 심정을 아는지 짤막한 몽당연필도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파르르 떤다. 처음 보는 어머니의 글씨에 내 마음도 두근거리며 덩달아 떨렸다. 누런 갱지위에 서두로 "아들 아"자를 쓰기로 하신 어머니는 연필 끝에 수없이 침을 바르시며 한참 시간을 끌다가 이응자를 간신히 그렸다. 자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발발 떠시며 한참을 머뭇거리셨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아들을 위해 결코 포기 하지 않으시던 어머니의 표정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한나절쯤 지나서야 어머니의 편지는 완성 되었다. 진액을 쏟은 어머니의 글씨가 누런 공책에서 상형문자처럼 춤을 춘다.

"아들 아…." 아버지가 불러 주시는 대로 한자 한자 혼신을 다해 겨우 쓴 어머니의 그림 글씨는 당연히 둔필이었지만 어머니의 편지 덕분인지 오빠에게서 살아있다는 답장이 왔다. 어머니는 얼마나 기쁘셨던지 1학년짜리 내동생의 국어책을 놓고 밤마다 아버지와 글씨연습을 하셨다. 호롱불아래 어머니의 글씨연습을 위해 운을 띄우듯 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들리는듯하다.

마침내 오빠가 귀국하고 무사히 군복무를 마칠 때까지 느리고도 힘에 겨운 어머니의손 편지는 계속 써 보내셨다. 글꼴이야 서툴렀지만 어느덧 어머니의 필체도 동글동글 무르익어 갔다. 지금의 내 글씨체가 아마도 어머니의 글씨체를 많이 닮은듯한데 내 딸아이들의 필체 또한 나와 비슷한걸 보면 글씨도 유전이 되나보다.

글씨도 나처럼 나이를 먹는지 써놓고 보면 예전만 못 하다. 습작을 한답시고 초고를 써놓고 보면 내 필체는 정갈하고 예쁜 글씨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엔 나도 모르게 악필이 된다. 그럴 때마다 또박또박 편지를 쓰시던 어머니 모습과 식구들 풍경이 떠올려진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고 가르쳐 주시던 아버지의 따듯하던 마음과 어머니의 또렷한 손 글씨가 아로새겨진다.

박영희 프로필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강

효동문학상 작품공모 대상수상

에덴약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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