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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9.13 16:56:49
  • 최종수정2023.09.13 16:56:49

이정균

시사평론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빼앗겼던 청주읍성 탈환을 기념하는 청주읍성 큰잔치가 지난 2011년부터 해마다 열린다. 1592년 4월 13일(이하 음력) 부산포 앞바다에 나타난 왜군들이 파죽지세로 북상해 6월 23일 경 청주성도 왜적에게 짓밟혔다. 방어사 이옥이 지키던 청주성은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에게 점령당했고, 제5군 후쿠시마 마사노리에 이어 휘하 장수 하치스카 이에마사가 청주성을 장악했다.

*** 의·승·관군 연합 최초 읍성탈환

청주성 탈환전은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호서지방 최초의 의병장 중봉 조헌, 임진왜란 시기 최초로 승병을 조직한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청주 복대리(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에서 의병 출정식을 가진 화천당 박춘무, 방어사 이옥의 관군 등이 연합하여 벌인 전투다. 조헌은 7월 4일 공주 곰나루에서 의병 1천600여 명과 함께 하늘에 빌고 깃발을 세워 분발한 후 8월 1일 청주성 전투에 나섰다. 기허당 영규대사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 수백병을 규합해 청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화천당 박춘무는 청주 출신으로 중봉 조헌 등과 함께 토정 이지함의 문인이었다. 박춘무는 청주에서 7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부모산에서 병법을 훈련하며 병장기를 가다듬은 후 청주성 전투에 앞장섰다. 방어사 이옥은 청주성을 빼앗긴 뒤 연기 방면으로 물러났다가 의승병과 함께 청주성 탈환 연합작전에 참전했다.

1592년 8월 1일 새벽, 조헌의 의병과 영규대사의 의승들은 청주성 서문을 공격하고 박춘무의 의병들은 남문을 공격해 온 종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왜군들이 청주성 안에서 항전했으나 조선 연합군의 포위 공격에 거의 함락될 즈음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의병과 승병들이 사다리를 걸치고 공성전을 전개하며 성곽을 오르려는 순간 검은 소나기가 천지를 덮어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갈 수 없게 됐다. 방어사 이옥은 북문을 지키기로 하고 의승병들은 청주성 서쪽 야산으로 이동해 왜적의 동태를 살피며 밤을 보냈다. 8월 2일 새벽 의병과 승병들이 청주성 재공격을 개시했으나 왜군들은 불을 피우고 깃발을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죽은 왜적의 시체를 불태운 뒤 북문을 통해 도주하고 말았다.

왜군들이 청주성을 황급히 빠져 나가느라 성안 창고에는 곡식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의승장들은 이 곡식을 청주민들과 의승병들에게 나눠 주자고 주장했으나 방어사 이옥과 관찰사 윤선각은 왜적이 다시 청주성을 점령할 수 있다며 불태워 버렸다. 관군은 무능력해도 군량미가 있었지만, 관군이 지키다 빼앗긴 청주성을 의승병들이 탈환해 곡식을 확보했음에도 불태워 버려 의승병들은 식량을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만 했다. 이런 차별 대우를 받고도 청주성 탈환에 이어 곧바로 금산 전투에 나섰다가 8월 18일 조헌의 의병 700여 명과 영규대사의 의승 300여 명이 전멸했다.

청주성 탈환은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가고 한양 도성마저 왜군이 점령했지만 아직 조선의 곡창지대 호남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호남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인 청주성을 조선 연합군이 회복했다는 의미가 크다. 또한 임진왜란 초기 왜군에게 연전연패하던 상황에서 의병, 승병, 관군이 연합해 벌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 역사적 사실대로 정리 필요

그러나 청주성 전투가 임진왜란 최초의 읍성 탈환 전투 승리일 수는 있으나 임진왜란 시기 육상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가 맞는 지에는 이견이 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1592년 5월 16일 조선 육군 부원수 신각이 해유령 전투(양주 전투)에서 왜군 70명을 전멸시켰고, 1592년 5월 24일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이 정암진 전투에서 왜장 안코쿠지 에케이의 남강 도하를 패퇴시켜 왜군 제6군의 호남진출을 포기하게 만든 승전도 있다. 1592년 7월 8일 전라도절제사 권율 장군, 동북현감 황진 등의 관군이 이치(梨峙) 전투에서 고바야카와의 왜군을 격파함으로써 왜군 주력부대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했다.(이치 전투의 시기에 대한 다른 학설 있음) 1592년 7월 8일 웅치(熊峙) 전투에 이은 7월 9일 안덕원 전투(웅치전투로 묶어서 칭하기도 함)에서는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이정란 등이 웅치를 지나 전주성으로 쳐들어오는 왜군을 격퇴시켜 전주를 지킬 수 있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전라도 한 도가 이 싸움으로 인해 보존되었다'고 평가했고, 권율 장군은 웅치전투의 공이 행주대첩의 공보다 크다고 했다.

청주성 탈환의 의미가 반드시 육상전 최초의 승리여야만 빛을 발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는 것이 자부심을 퇴색 시키지도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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