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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균

시사평론가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다음달 1일이 음력 4월 13일로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시작된 지 431년 되는 날이다. 일본의 혼란기 100년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수습하고 통일을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된다. 도요토미가 조선에 요구한 것은 정명가도(征明假道·명나라 정벌을 위해 조선의 길을 빌림)였다. 조선 조정은 말만 무성할 뿐 아무런 대비도 없었다.

*** 대비 없이 당한 전쟁

도요토미는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구로다 나가마사(흑전장정),시마즈 요시히로(도진의홍) 등 다이묘들을 제1군에서 제9군까지 편성해 15만8천7백여 명의 육군 정규군 병력과 수군, 후방 경비, 지원부대를 포함하여 총 20만여 명을 조선 침략에 동원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마침내 1592년 4월 13일 아침 병선 700척에 나눠 타고 대마도를 출발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 왜적이 오후 5시 경 부산포에 침입하면서 기나긴 임진전쟁이 벌어졌다. 왜적은 조선으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파죽지세로 북상을 거듭하여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의 군사를 전멸시킨다.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던 신립 장군마저 패배하고 순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4월 30일 개성을 향해 한양 궁궐을 떠났다. 선조는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몽진했다. 평양마저 함락되자 선조는 6월 22일 명나라 요동으로 망명 갈 것을 선언했다. 명나라가 망명을 허락했으나 대신들의 극구 만류로 실제 망명이 이뤄지지는 않았다. 임금도 임금이 아니었고, 나라도 나라가 아니었다.

다행히 이순신 장군의 남해안과 서해안 제해권 장악, 조선팔도의 의병활약, 명나라 군사 참전 등으로 왜적이 수세에 몰리다가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가 사망함에 따라 극비리에 왜군에게 일본으로 철수 명령이 내리게 된다.

임진전쟁 7년은 조선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다. 먹을 게 없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많았다고 하니 그 참상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정유재란 시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다른 지방에 비해 피해가 적었던 호남지방을 계획적으로 짓밟은 왜적에 의한 참화를 필설로 다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전국토가 황폐화하여 경작 가능 농지의 3분의 2가 쓸모없는 땅으로 변했고, 조선의 사상자는 최대 1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일본이 끌고 간 조선 백성 피로인(被虜人)도 10만여 명이나 되는데 일본에 남겨져 노비생활을 하거나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규슈 나가사키, 중국 마카오 등지의 노예시장을 통해 유럽으로 팔리어 갔다. 조선 피로인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들 노예시장의 노예매매 가격이 폭락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기 왜적이 조선 반도를 거리낌 없이 유린한데는 전쟁에 대비하지 않은 조선의 허약한 국방력과 이러한 국방력을 가능케 했던 임금과 조정은 물론 조선 사회 엘리트였던 주류와 비주류 양반 집단의 총체적 무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이란 나라가 왕조국가였던 만큼 위기 시대에 봉착한 임금의 용렬함과 미련한 혜안을 가장 먼저 질타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비록 제한적이나마 끊임없이 왕권과 신권의 상호 견제가 작동했던 조선의 정치 시스템 상 조정 신료와 양반사회에도 임금 못지않은 책임이 있다. 임금을 필두로 한 조선의 지도층들이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눈이 어둡고 특히 왜구로 지칭되는 도적떼가 득실거리는 왜국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추세를 활용하여 신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괄목할 변화를 이룬 걸 들여다보지 못했다. 일본을 섬나라 왜놈들이라며 깔보는 게 다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1천여 명이 죽임을 당하는 기축옥사에서 보듯 그저 패를 갈라 싸우며 죽고 죽이는 데는 뜨겁게 전력을 다했지만 이같은 열정을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보전하는 힘으로 승화 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맞닥트린 게 임진왜란이다.



*** 오늘의 성찰 주문하는 임진왜란

2023년의 한국과 일본, 그리고 주변국들과의 국제적 역학 관계는 어떠한가. 일본을 증오하고 욕하는 것만으로 조선 시대보다 더 현명하게 대처하는 걸까. 재일교포 장훈씨는 평생 한국 국적을 지키며 일본에서 활약한 전설적 야구선수다. 그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제까지 일본에 '사과하라' '돈 내라' 반복해야 하나요? 부끄럽습니다. 그때는 센 놈이 약한 놈 먹고 사는 시대였고 우린 약해서 나라를 뺏겼죠. 절대 그렇게 당하면 안 됐는데… 이제는 우리도 프라이드(자부심)를 갖고 일본과 대등하게 손을 잡고 이웃 나라로서 가면 안 되겠습니까." 공감한다. 우리에게 임진왜란은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역사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고 넓은 성찰을 주문하는 실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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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기업 돋보기 5.장부식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

[충북일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 국내 시장에 '콜라겐'이라는 이름 조차 생소하던 시절 장부식(60)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는 콜라겐에 푹 빠져버렸다. 장 대표가 처음 콜라겐을 접하게 된 건 첫 직장이었던 경기화학의 신사업 파견을 통해서였다. 국내에 생소한 사업분야였던 만큼 일본의 선진기업에 방문하게 된 장 대표는 콜라겐 제조과정을 보고 '푹 빠져버렸다'고 이야기한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에게 해당 분야의 첨단 기술이자 생명공학이 접목된 콜라겐 기술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분야였다. 회사에 기술 혁신을 위한 보고서를 일주일에 5건 이상 작성할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던 장 대표는 "당시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 기업으로 선진 견학을 갔다. 정작 기술 유출을 우려해 공장 견학만 하루에 한 번 시켜주고 일본어로만 이야기하니 잘 알아듣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장 견할 때 눈으로 감각적인 치수로 재고 기억해 화장실에 앉아서 그 기억을 다시 복기했다"며 "나갈 때 짐 검사로 뺏길까봐 원문을 모두 쪼개서 가져왔다"고 회상했다. 어렵게 가져온 만큼 성과는 성공적이었다. 견학 다녀온 지 2~3개월만에 기존 한 달 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