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로 해장국을 먹고 있노라니, 옆테블에서 웃음소리가 요란하다. 아들 며느리 손자들과 함께 가족여행을 온 노부부가 보였다. 아들 며느리 손자는 즐거운 표정으로 행복한 웃음 속에 아침 식사를 기다린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들의 맨 끝자리에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노부부의 표정은 무표정이다. 마치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내 눈에는 측은지심으로 다가왔다. '아~ 저 모습이 바로 꿔다놓은 보릿자루'란 말이 꼭 맞는 말인 듯싶었다. 가족들은 그 노부부에게는 관심도 없다. 아들 며느리도 제 자식들만 예뻐 물고 빤다.
아마도 노부부도 저 아들을 기를 때 저렇게 깊은 사랑으로 키웠으리…. 그들은 묵묵히 우두커니 앉아 식탁만 내려다보면서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노부부의 침묵이 흐르고 있다. 어쩌면 가족여행을 따라온 걸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보 우리는 자식들과 여행하지 말자!"라고 남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우리가 저 모습이라면 얼마나 처량 맞고 비참할까 싶어서였다. 언젠가는 우리도 귀찮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아니 어쩌면 우리도 이미 뒤퉁스런 존재가 되어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리라.
하루해가 지도록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나의 인생도 그들과 다를 것 없는 늙음으로 돌입해 있거늘 무엇이 다르겠는가. 늙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회에서, 가족에게서 따돌림당하는 일들이 빈번한 시대가 되었으니 누구나 늙어가는 이들은 황혼기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노인은 가족에게서 서서히 뒤 퉁 거리가 되어가는 것이니 서글퍼도 침묵으로 참아야 할 것이리. 흐르는 세월 속에 자연스러운 나이테로 맞이하는 순서가 아닐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괴강 매운탕 집은 여전히 붐볐다. 원조 매운탕 집은 말 그대로 도떼기시장 목로식당처럼 시끌벅적한 불안한 자리에 앉았다. 앞쪽으로 또 한 가족이 보였다. 그들은 딸 사위 외손자들과 여행 중이었다. 할아버지 건너편으로 딸인 듯싶은 젊은 여인이 "아버지, 맛있는 것 어머니에게 자주 사달라고 하세요."라며 애처로운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잠깐이지만 혼자된 친정아버지와 새어머니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아버지 옆에 앉아있는 조금 젊은 여인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내 눈에 비쳤기 때문이다.
그 손자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희 아빠와 희희낙락이다. 오직 딸만은 아버지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이승을 떠난 그녀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는지 눈물을 훔친다. 그녀의 친정아버지도 새어머니도 그 딸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식탁만 바라다보고 있다. 그들 또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보였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란 말의 유래는 조선 시대 10대 왕 연산군 때 일이다.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하자 몇몇 신하들은 거사를 모의하게 되었는데 박종원이라는 사람 집에 모이게 되었다. 약속된 사람이 전부 모이자 성희안 이라는 사람이 말을 시작했다. 각자의 역할 분담을 하고 궁궐에 집결하는 시간을 확인하기까지 한쪽 구석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성희안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람 수를 세어보았는데 놀랍게도 사람 수가 한 사람 더 많은 것이었다. 깜짝 놀란 성희안은 머리끝이 쭈뼛해져서는 귓속말로 옆에 있는 박원종에게 말을 했다. "큰일이요 여기 염탐꾼이 한 사람 침입을 하였소." "대체 누굴 보고 하는 말이오?", "김 대감 어깨너머 있는 사람이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우리 얘기만 엿듣고 있소" "사람 수도 한 명 더 많은 걸 보니 틀림없는 염탐꾼이오." 박원종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이번 거사에 쓰려고 옆집에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였다고 한다. 어둠 속이라서 보릿자루를 사람으로 오인 한 것이고 더군다나 누군가가 갓을 벗어 올려놓은 모습이 흡사 사람으로 보인 것이었다. 그 뒤로 어떤 자리에서 있는 둥 없는 둥 말없이 그저 듣고만 있는 사람을 가리켜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라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후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없이 우두커니 앉아서 듣기만 하는 사람이나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없이 무심코 앉아만 있는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이니 이번에 내가 만난 두 노부부는 영낙 없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요즘 나도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있다. 더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는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 다짐한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뻔히 알던 단어들이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다. 한계를 느끼는 서글픈 인생이 되어 간다는 사실에 무척 울적하다.
인생이란 그렇게 종당에는 누구나 혼자서 외로움을 맞이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늙어지면 풍경도 사람도 재빨리 내 곁에서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이리니,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늙음과 외로움은 내게 더욱 다가온다. 이젠 내 삶의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그러기에 외로움의 영토만 점점 넓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깊은 겨울 속에서 '나는 외롭다.'라고 외치는 것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는가. 언젠가는 자식들 앞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김정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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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문화공로상 수상
△법무부 전국교정수기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청주예술공로상
△제7회 홍은문학상 수상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여성문인협회 회장역임
△1인1책 펴내기 운동 프로그램 강사, 청주시민신문 편집위원
△저서로는 세월속에 묻어난 향기, 41인 명작품 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