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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2.07.12 18:14:5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옛말에 홍수보다 가뭄이 낫다고 했다. 물난리가 나면 다 떠내려가고 남는 게 없지만, 가뭄 뒤에는 작황은 좋지 않지만, 과일들은 훨씬 맛이 좋기 때문이니 그나마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애태우는 가뭄 덕분인지 올여름의 수박 참외는 참으로 달고 맛있다.

104년 만의 극심한 가뭄으로 물왕 저수지마저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지경이었다. 두 달 동안이나 목마르게 비를 기다리는 온 국민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토록 애태웠던 가뭄이 불과 비 내린 지 4일 만에 해갈되고 집중폭우로 이젠 비 피해가 속출되어 기상이변에 따른 재난에 속수무책이란다. 일기만은 오로지 하늘의 뜻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무능력함으로 자연의 위력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7월은 아침저녁 스쳐 가는 실바람에 소녀의 향기 같은 치자꽃 향이 있어 좋다. 초여름에 피는 꽃 가운데 하얗고 탐스러운 꽃송이는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 다가가면 향기가 은은해 오래도록 기억되는 꽃이 치자다.

아무리 공을 들여도 꽃이 피지 않을 것 같아 베란다 한쪽 구석에 처박아 놓았더니 너무도 서러웠던지 치자 꽃 한 송이가 살포시 피어있다. 나름 주인에게 충성하고 싶었나· 엊그제 조상님 산소를 대대적으로 사초하고 해갈될 장마를 기다리며 애타는 내 마음에 단비 소식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까 싶어 더욱 반가웠다.

제주에서는 치자나무 하얀 꽃은 장마를 알리는 꽃이라고도 한단다. 치자 꽃은 장마가 시작될 때 피어 장마가 끝날 때 진다고 하였으니, 치자꽃을 바라보며 간절한 마음으로 장마를 보내달라며 하늘을 우러르며 애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어여쁜 꽃을 피우기 위해 밤새 아픈 고통을 참아냈을 탐스러운 하얀 치자 꽃이 대견하다.

김정자 약력

△'한국수필'로 등단

△청주시문화공로상 수상

△법무부 전국교정수기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청주예술공로상

△제7회 홍은문학상 수상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여성문인협회 회장역임

△1인1책 펴내기 운동 프로그램 강사, 청주시민신문 편집위원

△저서로는 세월속에 묻어난 향기, 41인 명작품 선집
잽싸게 거실에서 잘 보이는 곳으로 치자 화분 두 개를 나란히 옮겨놓았다. 마음의 평정을 찾기엔 적당하다. 무한정 곱게 핀 하얀 치자 꽃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헤 아릴 수 없는 꽃 몽우리 들이 소담스럽게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꽃들이 모두 피면 우리 집 전체가 청아하고 고귀한 맑은 향이 가득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 차 살며시 입맞춤도 해본다.

우리 집의 꽃치자는 키가 30㎝ 정도로 작고 아담하다. 어젯밤 활짝 핀 순백의 치자 꽃이 눈이 부시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속울음으로 인내하였을까. 뽀사시한 꽃잎에서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내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토록 어여쁜 순백의 치자꽃은 열흘가량 개화하여 잔치를 벌인 후 꽃이 질 무렵에는 연미색으로 변하더니 진한 황백색으로 변한다. 황백색의 꽃잎은 이내 떨어지고 만다. 검었던 내 머리칼이 하얗게 세듯 치자꽃도 짧은 개화 기간마저 버거워 쉽게 지치는 모양이다.

내가 시집왔을 때 앞마당에는 열매치자나무가 있었다. 열매 치자는 키가 약 2m까지 자란다. 꽃은 흰색으로 가지 끝에서 한 송이씩 피는데 홑꽃잎이 6장, 꽃잎이 지면 9월경에 양 끝이 뾰족한 육각형의 열매가 담홍색으로 익는다. 그 시절, 명절에 전을 부칠 때면 달걀과 치자 물을 섞어서 노란색으로 예쁘게 물을 들여 전을 부쳤다. 가을이면 수확한 담홍색 치자를 실에 꿰어 추녀 끝에 매달았던 풍경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치자가 열매 치자와 꽃 치자나무 두 가지 있다는 것을 근년에야 알게 되었다.

꽃만 피워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치자를 천엽(千葉) 치자, 꽃 치자라고도 한단다. 일찍이 조선 시대 초기 문신인 강희안은 '양화소록'에 치자의 네 가지 아름다움에 대해 '첫째, 꽃 빛이 희다. 둘째, 향기가 맑다. 셋째, 겨울에도 낙엽지지 않고 윤기나는 싱싱한 푸른 잎이 있다. 넷째, 황금색 물감으로 쓰이는 열매가 있어 꽃 중의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극찬했고, 술잔같이 생긴 열매가 나무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해서 '잔치(梔)'에 '나무 목(木)' 자를 붙여 '치자 목'이라고 했다고 읽었다.

우리 집 거실에 있는 꽃만 피우는 치자 꽃은 소담스럽다. 백장미처럼 고귀함을 지녀 화려하고 아름답다. '치자꽃 향기는 어느 꽃보다도 신선하고 사탕처럼 달콤하고 선녀의 날개처럼 부드럽다.'라고 많은 작가는 치자꽃 향기를 그렇게 찬양한다지만, "겹치자 꽃이 홑 치자 꽃보다 훨씬 예뻐요." " 홑치자 꽃 피는 나무가 진짜 치자지. 겹치자 꽃나무는 열매도 안 달리잖아."라며 말씨름들을 할만도 하다. 열매치자나무의 꽃잎은 홑꽃잎이지만, 아름다운 열매를 남겨주니 더욱 위대하지 아니한가.

유년시절, 약이 귀하던 때다. 다리를 뼜을 때 어머니는 치자열매를 곱게 가루로 빻아 밀가루에 개어 아픈 부위에 붙여주셨던 기억도 난다. 치자열매는 그 색이 영롱하고 아름다워서 요즘은 색다르게 치자 물로 담홍 빛깔의 옷을 만들어 입는 사람들이 있어 고풍스럽다. 나는 오래전부터 치자향내를 닮은 신선하고 달콤한 향수를 현관 거울 앞에 뚜껑을 살짝 열어놓는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꽃만 피었다 지는 꽃치자 나무가 안쓰럽다. 어쩌면 그 속절없음이 인간의 생과 다를 바 없지 아니한가. 그저 꽃만 바라보며 극찬만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마는 치자꽃! 하지만 사람에게는 없는 향기로운 삶의 치자꽃 여정이 한없이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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