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에는 빨간 색깔을 보면 혐오감까지 들었는데 그렇게 변해가는 내 마음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음식도 먹고 싶은 것이 생각 날 때는 그 음식이 내 몸에서 필요로 한 것처럼 나에게 다른 색깔보다 빨간색이 점점 필요함인가? 요즘은 그 강렬한 색을 바라보면 힘이 빠진 내 체력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지 힘이 불끈 솟는다. 그리고 희망이 다시 솟는다.
나이 들면서 빨간색이 좋아지는 것은 기본 에너지장인 빨간색이 주는 열정을 얻고 싶어서 란다. 우리 몸에는 일곱 개의 에너지 장이 존재하고 햇빛 파장과 같은 색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라색은 정수리에 있어 영혼, 정신적 자아, 무한의 지성과 연결되고, 옅은 보라색은 이마에 위치한 눈이며 창조적 구상의 중심이란다. 파란색은 목에 위치하여 갑상선 에너지의 중심이 되고 소리를 통한 창조적 표현과 진지한 역할을, 초록색은 심장에 자리하여 사랑과 조화, 균형을 이루는 색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 모든 색깔이 내 몸에서 꼭 필요로 하는 색이리라.
'마음이 유쾌하면 종일 걸을 수 있고, 마음이 괴로우면 십리 길도 지친다.'란 말처럼, 유쾌한 마음으로 나의 인생길을 쉬지 않고 걸었다. 하지만 때로는 슬픔으로 때로는 뼈아픈 고통을 맛보며 인생의 쓴맛도 겪은 것이 얼마던가. 그럴 때는 내 빛깔은 온통 검은 빛깔로 비춰 졌을 것이다. 그런 때는 우울의 늪에서 헤어날 수 가 없었다.
요즘 빨간색을 선호할 때마다 우리 곁을 떠난 천재 화가가 생각난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그의 강렬한 그림만큼 유난히 빨간색을 좋아했다.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대표작인 '태양을 먹은 새'는 하늘을 날아올라 우주를 삼키고 싶은 심정의 표현을 과감하게 표현한 빨간 색상에 대한 사랑을 읽을 수가 있다고 평론가는 말했다.
그 분을 생각하면 왜 이렇게 슬픈 추억으로 다가오는 걸까. 운보(雲補)는 7세에 장티푸스를 앓게 되어 청신경을 완전히 잃어 영원한 침묵 속에 갇혀 살았다. 소리를 잃어버린 운보는 침묵의 세계에 갇힌 자신의 아픔을 평생 그림으로 말했다. 우리 집 거실에는 청록 산수 한 점이 걸려 있는데 웅장하게 그린 산 그림이다. 평생 어린이처럼 순박하고 씩씩하게 살아간 그의 생애처럼 맑고도 힘이 넘쳐서 살아있는 듯 깊은 산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그림 속에도 그의 정열적인 붓놀림이 빨간색으로 다가온다.
그분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게 되었던 때는 1990년대쯤이다. 운보(雲補)는 늘 눈매가 예리하고 풍채가 좋아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내면에는 늘 종교적이었고 막내딸은 수녀님이 되셨다. 내가 사는 고장에 그분이 산다는 사실에 몇 사람이 뜻을 같이한 사람이 모였다. 우리 고장에서 처음으로 청각장애자 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 시절만 해도 활력 넘치는 젊은 때이니 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뜨거웠다.
우리는 그분의 그림을 한 점씩 소장하기로 하고 은행에 단체적금을 들면서까지 모두 참여하여 모인 기금으로 청각장애자 협회에 도움을 주는 일을 그분을 통하여 하였다. 누구를, 그것도 장애인을 돕는다는 뿌듯함도 느꼈다. 연중행사로 매년 설에는 고운 한복을 입고 그분을 방문하여 세배를 드리고 윷놀이를 벌이곤 하였는데 참으로 소년처럼 즐거워하시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한국 미술사에 큰 어른이었지만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장인이라는 남다른 아픔이 늘 함께했다. 그분은 언제나 빨간 양말을 신었다. 임종 시에도 운보(雲補)라고 수놓아진 빨간 양말을 신고 있었단다. 그렇게 빨간색 인생의 빛깔로 88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김정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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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문화공로상 수상
△법무부 전국교정수기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청주예술공로상
△제7회 홍은문학상 수상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여성문인협회 회장역임
△1인1책 펴내기 운동 프로그램 강사, 청주시민신문 편집위원
△저서로는 세월속에 묻어난 향기, 41인 명작품 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