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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 조반상을 받으신 아버지는 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때 나는 아버지의 소망을 다 알면서도 엉뚱한 말로 늙으신 아버지를 어렵게 했다.

"아버지, 어디 편치 않으세요?"

"아녀."

"그럼 무슨 일 있으세요?"

"아녀, 몸이 왜 이렇게 근질근질한지 몰러. 오늘 바쁘냐?"

이쯤에서 얼른 아버지 속내를 알아차린 체 한다.

"그럼 유성이라도 가실래요?"

결국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유성 온천으로 떠난다. 아버지는 유성 온천을 참 좋아했다. 아버지는 혼자서 어린 아이처럼 물놀이도 하시고 탕에 들락날락하면서 따뜻한 물을 즐겼다. 연세가 높기 때문에 뜨거운 물에 힘이 부치실 지도 몰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는 듯 마는 듯 아버지를 지켰다. 적당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되면 슬쩍 밖으로 나온다. 아버지는 바로 따라 나오시면서 못내 섭섭한 표정이었다. 온천이 끝나면 점심은 간소한 것을 좋아하셨다. 비싸고 맛있는 것은 불편해 하고 때로는 정말 화를 내시기도 했다. 그냥 온천을 하고 싶으면, '온천가자'하고, 조금 비싸더라도 '맛있다.'하며 당당하게 받을 일이지 뭘 그리 우물쭈물하실까? 나는 그게 참으로 못마땅했다.

사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심부름이 죽도록 싫었다. 어린 소견에도 별일 아닌 일로 심부름을 시켰다. 가령 한 십리쯤 떨어진 마을로 담배 심부름을 보낸다든지, 한밤중에 '달무리가 생기면 내일 날씨가 어떨까'를 이웃에 사는 당숙 댁에 가서 물어 오라든지 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켰다. 아이들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 평소 소신이었나 보다. 그러시던 아버지께서 장성한 자식은 어려워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 예로 잡지나 언론에 예절에 관한 글이나 궁중비화를 투고하실 때 워드프로세서 파일로 제출하고 싶어 했다. 아들이 만들어 드리는 것을 편집하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으면서도 쉽게 말씀하지 못했다. 그냥 잠깐이면 될 것을 말이다.

아버지는 중요 무형 문화재인 종묘제례가 왜곡되어 시행되고 있는 것을 고증을 거쳐 완벽하게 재현하셨다. 그래서 종묘제례가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재로 지정받는데 디딤돌이 되었다. 또 일제 강점기에 땅에 묻혀버린 사직대제를 문헌 고증을 거쳐 복원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다. 아버지의 제자들이 찾아오면 그런 분을 모시고 사는 것이 얼마나 영광이냐고 나를 부러워했다. 그래도 내게는 그냥 아버지였다. 그래서 아버지가 계신 것이 든든하기도 했지만, 모시고 사는 일이 늘 즐거운 일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무게를 느낀 적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자식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모습이 나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내가 석사 학위 논문을 준비할 때 조선왕조실록에서 많은 자료가 필요했다. 실록이야 도서관에 가서 찾으면 되겠지만, 그 방대한 자료에서 내게 필요한 것만 발췌해서 정리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아버지께 여쭈었는데, 필요한 모든 자료를 복사해서 형광펜으로 색칠을 하고 색인목록까지 작성하여 건네 주셨다. 그리고 고소설을 연구하려면 연려실기술을 참고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당시 팔순을 넘은 아버지가 형광펜을 쓴 것도 신기하고, 신학문 근처에도 못 가신 분이 고소설 연구의 조언까지 해 주시는 것이 더욱 놀라게 했다. 실제로 고전소설 윤지경전을 연구하면서 연려실기술이 얼마나 많은 참고가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아버지께 죄송해서 번역까지는 운도 떼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주면서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심부름을 시키던 자식을 왜 그렇게 어려워했을까? 부모님은 자식에게 어떤 무게를 느낄까? 생전에 어머니는 시골에서 나오실 때마다 묵나물을 비롯한 각종 먹을거리를 봉지 봉지 담아오셨다. 며칠 묵었다 가셔도 될 일을 앉자마자 돌아갈 일 먼저 걱정하던 어머니도 자식의 무게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장에 나올 때고 들어가실 때고 나를 태우러 차를 가지고 오라고 당당하게 말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어려워했을까?

이방주 약력

청주출생, 1998년 '한국수필' 신인상, 충북수필문학상(2007),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내륙문학 회장 역임,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현대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집 '축 읽는 아이', '손맛', '여시들의 반란', 편저 '윤지경전' (주식회사 대교), 공저 '고등학교 한국어', 현재 충북고등학교 교사

아들이 학교를 마치고 다시 집에 머물게 되었다. 비워 놓았던 아들 방에 그의 체취가 그득하게 들어찼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들을 보면 혹시 엉뚱한 것에 빠지지 않나 하고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그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발소리를 죽이며 방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아내는 아들을 위하여 생선을 굽고 해장국을 끓였다. 아내는 종종 내게도 아들을 위해서 양보할 것은 양보하도록 종용했다. 그즈음 우리 부부는 아들에게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때로 아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 정보화 시대에 밝은 눈을 빌려야 한다. 싫어하지도 않는데 그때마다 눈치를 보며 입을 떼기가 무겁다.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아내는 나보다 더 어려워하는 것 같다.

언젠가 아내에게 그런 무게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아내도 동감이었다. 아들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빨리 성혼하여 분가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홀가분하게 벗어나는 것만도 아닐 것이다. 부모님이 그랬다. 내가 가정을 이룬 후에도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가슴에서 당신의 자식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거워하셨던 것 같다.

얼마 전 아들이 독립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아직은 잘 모르지만 아버지가 느끼던 무게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성혼하면 벗어날 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도 생각하기에 따라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될 것이다. 이제 조용히 기다릴 일이다. 무게가 행복이 되고, 내게 기쁨이 되어 줄 날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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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