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내 가슴엔 잔잔한 파문이 일었지요. 그래요. 첫사랑이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 느낌과 비슷한 점이 있는 미묘한 녀석을 발견한 거죠. 나의 청춘 시절은 주인공 없는 편지쓰기를 많이 하였답니다. 몇 명의 지인에게 손 글씨로 쓴 편지를 수없이 보냈죠. 엽서와 우표 값을 만만치 않게 지불하였죠.
그대는 나에게 편지쓰기의 어떤 느낌이 첫사랑과 비슷하냐고 물을 겁니다. 답장 없는 엽서를 정성스레 치장하며, 편지가 상대에게 도달할 때까지의 설렘과 순수함이죠. 하나 더 있다면, 머릿속 기억을 지우개로 지우기 전에는 존재할, 내 젊은 날의 감성 어린 기억의 흔적이죠.
청춘의 시절엔 늘 시간만 되면 FM에서 흐르는 음악을 즐겨들었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음악방송에 매료되어 듣는 것도 모자라 우편엽서를 쓰기 시작했어요. 엽서에 정성스레 마른 꽃을 붙이고 좋아하는 음악의 제목을 깨알같이 적었죠. 그리곤 그 엽서를 들고 우체통을 찾아갈 때면, 가슴에 무언가 가득 찬 것처럼 뿌듯했지요.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어요. 제발 내가 원하는 음악을 듣게 해달라고.
그 시절엔 라디오 DJ가 연인인 양 그의 목소리를 기다렸지요. 언제 방송될지 모르는 그날을 기다리며, 목 놓아 하루하루를 보냈던 적도 있었죠. 마침 내 엽서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소개되는 날, 정말 하늘을 날 듯 신이 났답니다. 그 기쁨은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음악 소개가 뭐 별거겠습니까. 요즘은 DJ 얼굴이 보이는 라디오 방송에 청취자를 유혹하는 많은 상품을 내걸고 있지만, 참여자 수가 적은 듯싶어요. 요즘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동영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손안에 휴대전화가 있잖아요. 조금만 눈을 돌리면 내가 원하는 음악 정보를 알 수 있으니 굳이 보이지 않는 라디오에 매달릴 일이 없어진 거죠.
그대여, 어디 그뿐입니까? 좋아하는 친구나 지인에게도 편지를 참 많이 보냈지요. 지금도 그들을 만나면, 내가 보낸 편지와 엽서를 간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심 내 풋풋한 시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러운 면도 없지 않아요. 빈 종이에 시(詩)를 빼곡하게 적어 내려가던 내 모습이 떠오릅니다. 적어도 지금의 청춘보단 감성이 메마르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시절 나의 편지지에 단골로 등장한 시(詩)는, 서정윤의 <홀로서기>와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이해인의 <해바라기 연가>이었지요. 지금도 가끔 입안에 읊조리는 구절, "내 생애가 한 번뿐이듯 나의 사랑도 하나입니다. … 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내 불치의 병은 사랑. ……." 열정의 시(詩)를 암송하며, 시(詩)를 적는 행위는 훗날 나를 문학인으로 거듭나게 했던 거죠.
요즘은 손 편지가 낯설게 느껴지는 시대죠. 젊은이들은 어쩌면 우표를 붙인 편지를 받아 보고 시대를 거슬러 오르는 사람이라고 놀릴지도 모르죠. 늘 컴퓨터 화상에 글자를 메우니 그렇기도 합니다. 나도 가끔 생일 카드나 답장을 짧은 편지로 답하는데, 내 마음대로 글씨가 되질 않고 삐뚤거려요. 두어 번은 연습해야 보아줄 정도랍니다. 역시 손으로 쓴 편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앉아 상대를 진중히 생각할 여유를 주는 것 같아요.
그대여, 내 청춘의 시절은 봄날처럼 스쳐가고 중년의 나이에 서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네요. 첫눈 내리는 날 만나기로 했던 둘만의 장소, 그 집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그 집에 놓아두었던 음악 CD플레이어와 이어폰이 그녀에게 전해집니다. 서로 오해했던 일들이 하나씩 풀리고, 둘은 각자 자신의 길을 걸어가지요.
그녀는 이어폰을 꽂고 창밖 바다에 시선을 둡니다. 지난 날 들었던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며,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추억에 잠깁니다.
이은희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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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대학교 경영대학원졸업.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04년 월간문학 등단.
2004년 제7회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수상. 2007년 제13회 제물포수필문학상 수상. 2010년 제17회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2012년 제17회 신곡문학상 본상 수상 외 다수.
저서로,『검댕이』,『망새』,『버선코』,『생각이 돌다』수필집 출간. 한국문인협회, 계간 에세이포레 편집위원,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충북여성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주)대원 상무이사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