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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0.12.20 17:44:3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코리안 특급' 박찬호(37)가 17년 동안의 미국프로야구(MLB)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새둥지를 틀었다. 박찬호는 미국 프로무대에서 영광과 좌절을 넘나드는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지난 1994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박찬호는 올 시즌까지 17시즌을 보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1년까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우완 강속구 투수로 자리매김한 박찬호가 미국 프로야구단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모두 469경기(선발 287경기)다. 그가 17시즌 동안 거둔 승수는 124승(98패)다. 124승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동양인 선수 가운데 최다승이다.

박찬호의 다사다난 했던 17년을 되돌아 봤다.

◇ 영광의 다저스 시절


박찬호는 1996년 다저스에서 중간계투로 풀타임 빅리거로 자리 잡았다.

그해 4월7일 시카고 컵스전에서 4이닝 동안 무실점을 기록해 메이저리그 첫 승을 따낸 박찬호는 이후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풀타임으로 한 시즌을 보내며 5승5패 평균자책점 3.64를 기록,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이듬 해부터는 본격적인 선발투수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박찬호는 1997시즌을 앞두고 '너클볼러'톰 캔티오티 등과 선발 경쟁을 벌인 끝에 팀내 5선발를 자리를 꿰찬 뒤 승승장구했다. 그해 다저스 선발 로테이션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14승8패 평균자책점 3.38의 단숨에 팀 내 최고 기대주로 각광을 받았다.

95마일(152km)을 넘나드는 불같은 강속구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커브는 박찬호의 전매특허로 자리를 잡았다.

박찬호는 1998년 15승9패 평균자책점 3.71을 기록하며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에 이어 아시아 투수로는 두 번째로 메이저리그에서 15승 이상을 기록했다.

그해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에 야구 국가대표로 선발된 박찬호는 당시 대회 결승전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해 승리투수가 되며 금메달을 따 병역혜택을 받아냈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시즌을 앞두고 힘을 뺀 탓이었을까 정규시즌 초반 고전을 면치 못하고 13승11패 평균자책점 5.23으로 부진한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1998년 후반기부터 다시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한 박찬호는 2000년 생애 최고의 해를 보내며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우완 강속구 투수로 인정을 받았다.

박찬호는 당시 아시아 투수로는 최다승인 18승(10패)을 기록했고, 평균자책점에서도 데뷔 후 최저인 3.27을 기록했다.

그해 내셔널리그 투수 가운데 9이닝 평균 6.89개의 안타를 내줘 리그에서 가장 적은 안타를 허용했던 박찬호는 217개의 탈삼진을 잡아내 리그 전체 2위에 올랐다.

2001시즌에도 영광이 계속됐다. 시즌 중반 허리 부상이라는 암초를 딛고 15승11패 평균자책점 3.50의 빼어난 성적을 올리며 팀 내 에이스 투수로 제 몫을 다했다.

1999년 후반기부터 빼어난 피칭을 선보인 박찬호는 2001년 올스타전에서 내셔널리그 올스타에도 선발되는 영광을 안았다.

◇ '먹튀 오명' 남긴 텍사스 악몽

두 시즌 연속 최정상급 구위를 과시한 박찬호는 2002시즌을 앞두고 5년간 6500만 달러를 받고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하며 돈 방석에 앉았다.

그러나 텍사스 이적 후 박찬호는 부상과 기나긴 슬럼프로 고전을 했다. 특히, 이적 첫 해 허벅지와 허리 통증에 시달린 그는 9승8패 평균자책점 5.75로 부진한 성적으로 체면을 구겼다.

이후 2003년(1승3패, 평균자책점 7.68), 2004년(4승7패 평균자책점 5.46)으로 부진한 성적을 남긴 박찬호는 2005년 중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되며 악몽과 같았던 텍사스 생활을 청산했다. 박찬호는 텍사스에서 22승23패 평균자책점 5.79를 기록했다.

2005년 텍사스에서 8승(5패)을 따낸 박찬호는 샌디에이고 이적 후 4승을 추가하며 12승을 수확하며 다시 10승 투수 반열에 올랐지만 평균자책점은 5점대를 훌쩍 넘었다.

2006년에는 전반기에만 6승(4패. 평균자책점 4.29)을 따내며 부활하는 듯 했지만 뜻 하지 않는 장출혈로 인해 선수생활의 중대 위기를 맞았다.

2006시즌을 7승으로 마무리한 박찬호는 2007년 자신의 4번째 팀인 뉴욕 메츠에 입단했지만 단 1경기만 등판한 뒤 방출되는 시련을 맛봤고, 이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입단계약을 맺었지만 마이너리그 트리플A에서 공을 던지는 것이 전부였다.

◇ '불펜투수' 박찬호로 부활

그러던 박찬호는 2008년 뜻 밖의 기회를 잡았다. 친정팀 다저스로의 복귀였다.

다저스에서 불펜투수로 활약한 그는 4승4패 평균자책점 3.40으로 부활의 밑거름이 마련했다. 지난 해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해 시즌 중반부터 승리 계투조로 활약하며 3승3패 평균자책점 4.43을 마크하며 팀이 내셔널리그 챔피언에 오르는 데 일조했다.

무엇보다 박찬호는 2008년 자신의 야구인생의 목표였던 월드시리즈 마운드에 등판했다. 아쉽게 뉴욕 양키스에 우승 반지를 내준 박찬호는 당시 월드시리즈에서도 팀 내 핵심 불펜 요원으로 활약한 덕에 '불펜 투수' 박찬호의 가치를 재확인시켰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박찬호는 올해 초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다. 지난 해 이루지 못했던 월드시리즈 반지를 반드시 따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박찬호는 시즌 초부터 계속된 부진으로 8월 방출됐다. 다시 한번 선수 생명의 위기를 맞을 박찬호는 피츠버그의 부름을 받고, 빅리거 생활을 이어갔다.

피츠버그 이적 후 패전 처리조에서 등판해 1승을 챙기기 쉽지 않았지만 막판 연이은 호투로 존 러셀 감독의 눈도장을 받어냈고, 아시아 최다승을 챙기며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 투수로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박찬호는 2010시즌을 마친 뒤 "계속 메이저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 가겠다"고 말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고, 결국 일본프로야구로 눈을 돌려 선수 생활을 이어 가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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