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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숙

관기초등학교 교장

출근길, 아파트가 즐비한 도시 숲을 빠져나오면 논과 밭 사이로 좁은 샛길이 나온다. 굴다리를 통과하고 파밭을 지나면 나는 자연스럽게 왼쪽 논을 쳐다본다. 오늘은 선배님이 계실까· 바라보지만 좀처럼 만날 수 없다. 며칠 전 마침내 선배님 부부가 모내기 하려고 논에 물을 대고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잠시 멈췄다.

"선생니~~~임, 안녕하셨어요? 건강하시죠? 저예요."

"허허허. 누구여? 잘 지내요. 건강해요."

문을 열고 나가려니 금방 차가 뒤따라와 출발해야만 했다. 아쉬움에 백미러를 보니 선배님이 손을 흔들고 계셨다.

저녁 때 전화가 왔다. 아침에 그냥 보내서 아쉬웠다며 반가워하셨다. 이제 78세가 되신 김경* 선생님은 내가 교직에서 만난 가장 성실하고 열정적인 분이셨다. 선배님이 보여주신 교사로서의 자긍심과 책무성을 지금까지 본보기로 삼고 존경한다. 퇴직 후 한참 동안 못 뵙다가 우연히 이렇게 농사지으시는 들에서 만나게 되었다.

어느 해 미술 전담을 맡으신 선생님이 우리 교실로 찾아오셨다. 미술실기 능력이 부족하니 학원에 다니겠다고 하셨다. 퇴근 후 가정 살림하기도 바쁜 주부가 지친 몸을 이끌고 학원까지 다니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에 만류했다. 표현기법을 배우기 위한 학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초등미술교육의 목표는 작가 양성이 아니라 다양한 미적체험과 표현, 감상을 통해 미술을 향유하는 소비자 교육에 방점이 있다. 미술실기 능력보다는 초등미술지도 방법에 대한 연구가 우선이었다.

학원 대신 미술교육 방법을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그 시절엔 수업과 별도로 방과후에 학생들에게 예체능 특기지도를 했다. 나는 담임교사로 매일 5~6시간 수업을 하고 퇴근 전까지 미술을 맡아 미술부원 10여 명을 지도하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부터 선생님은 몇 달간 우리 반으로 오셨다. 학생들과 함께 그림 공부를 하셨고 옆에서 미술지도 방법도 배우셨다.

선생님의 성실함과 열정은 남달랐다. 교직에 몸담은 지 30년이 된 지금까지 수많은 학생들을 만났지만 김경* 선생님과 같은 학생을 만나본 적이 없다. 배운 것은 집에 가서 잠들기 전까지 몇 번이고 복습하셨다. 명암을 공부하기 위해 사과를 하나 그리면 집에 가서 한 광주리를 그려오셨다. 투자한 시간만큼 그림실력도 금방 늘었다. 지도서로 미술지도 방법을 공부하시니 얼마가지 않아 자신감이 생겼다 하셨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교사가 될까봐 걱정했는데 한시름 놓으셨다는 말에 가슴이 찡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선생님이 늦은 오후에 접착제를 가지고 이 교실 저 교실을 순회하고 계셨다.

"선생님, 뭐 하세요?"

"허허허, 찰흙 코 하고 눈알 붙여요. A/S 해요."

아이들은 말랑말랑한 촉감의 찰흙이나 지점토를 좋아한다. 만들기 시간에는 조물락, 툭툭, 탕탕 신나하며 그럴 듯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완성작은 교실 뒤에 전시하는데 딱 하루만 멀쩡하다. 다음 날 찰흙이 마르면 '움직이는 친구표현하기' 작품은 팔이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자기 얼굴 표현하기' 부조는 눈알이나 코가 어디로 갔는지 얼굴이 해골 같아진다. 선생님은 교실마다 다니며 찰흙 눈알과 코가 사라지기 전에 접착제로 붙여주고 계셨다. 미술수업 후 A/S까지 해주시는 전담선생님을 그 후로 본 적이 없다.

교사가 모든 것을 잘하는 만능일 수는 없다. 부족한 것은 공부하고 모자란 것은 채우며 교사도 성장하며 가르친다. 그렇다 해도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내 수업의 결과까지 A/S 하시던 선생님의 태도는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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