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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괴멸적 패배로 벼랑 끝에 선 '탄금대 전투'

신립 장군
수천 군사 이끌고 결전 시도
왜군에 대패하자 강물 투신
매년 팔천고혼위령제 봉행

  • 웹출고시간2019.02.20 20:34:15
  • 최종수정2019.02.20 17:47:21

탄금대 팔천고혼위령탑.

ⓒ 윤호노기자
[충북일보] 427년 전인 1592년 4월 14일 왜군(일본군)이 조선침략을 강행했다.

부산·동래 등을 함락하며 왜군은 북상했고, 조정에서는 긴급대책을 세우기 위해 동부서주했다.

조선은 그저 몇 십 명만 이끌고 와서 재물이나 조금 약탈하고 자기네 땅으로 되돌아갔던 기존의 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전란에 직면했다.

일단 조정은 경상도 순변사 이일을 파견해보지만 상주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선조 임금은 이에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명장 대우를 받고 있던 신립으로 하여금 왜군을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함과 동시에 상방검을 하사해 신립에게 선조 자신과 같은 권한을 부여했다.

신립(申砬) 장군은 1546년에 태어나 22살에 무과에 급제한 뒤 여진족을 두만강 건너 소굴까지 가서 소탕해 함경북도 병사에 이어 평안병사를 거치면서 그 용맹함을 인정받고 있었다.

탄금대 팔천고혼위령탑.

ⓒ 윤호노기자
신립은 충청도의 군현 병력 약 8천명을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4월 24일 종사관 김여물 등을 이끌고 조령으로 진출했다.

이때 김여물은 조선군의 수가 일본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인 만큼 조령의 협곡을 이용해 기습작전을 할 것을 신립에게 권했다.

신립은 일본군이 보병인데 반해 아군은 기병이므로 기병력을 이용할 수 있는 평지에서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신립이 탄금대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다.

군에서는 최고사령관의 말이 곧 법이다. 신립의 의견대로 조선군은 방어에 유리한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를 결전지로 선택했다.

신립이 전장으로 선택한 탄금대는 논과 밭 등의 장애물이 많아서 기병의 기동력을 활용하는데 제약이 많은 곳이었다.

이 말대로라면 신립은 탄금대를 전장으로 택하면서도 주변 지형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기병에 중점을 뒀던 이유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 신립은 도성에서 모아서 내려간 기병 중심의 8천 병력을 핵심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기병 활용에 제약이 있는 산지(조령)보다는 기병을 활용할 공간이 나오는 벌판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

탄금대 전투.

신립은 기존에 조령에 배치된 병력까지 모두 끌어 모아 결전을 시도했다.

신립군은 일본군과 한양 사이에 존재하는 조선의 유일한 야전군이며, 일본군의 급속 진격에 헝클어진 남도 일대의 지상군을 수습할 권한과 역량이 있는 유일한 지휘부였다.

유일한 야전군. 신립이 어느 한쪽 길에서 방어전을 편다고 해도 다른 길로 한양에 일본군이 들이닥치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단기 결전 시도 자체는 타당성을 지닌다.

일본군은 조령을 넘어 4월 28일 정오 무렵 단월역 앞 마을(현 건국대 글로컬캠퍼스)로 진입했다. 그리고 민간에 불을 빌러 조선 측에 신호를 보냈다.

신립은 즉시 충주성의 수천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로 출격했다.

이날 하늘도 무심하게 기병에게 불리한 비가 내렸다. 일본군은 오다 노부다가가 개발한 3단 철포 사격 방식을 이 전투에서 채용해 말 그래도 기병들을 도륙했다.

조선 기병들이 흘린 피로 탄금대 강물의 색깔은 갈색에 가까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전투가 끝난 뒤 일본군은 조선군 시체들 중 3000구의 목을 베었다.

탄금대 열두대.

ⓒ 윤호노기자
신립은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의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에서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전세가 불리해 패하게 되자 이 강물에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후에 전설로 나중에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을 건져내자 그의 두 눈은 부릅뜬 상태에다가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고 한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성심이 죽어서도 나타난 것이다.

열두대에 있는 신립장군 순국비.

ⓒ 윤호노기자
현재 탄금대를 비롯한 충주지역 곳곳에는 그의 충의심을 기리는 순절비가 남아 있다.

또 일본군에 숨진 팔천병사의 넋을 위로하는 팔천고혼위령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탄금대 전투의 패배와 명장으로 칭송받던 신립의 죽음은 조선 조정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고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에게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탄금대에 신립장군 순절비.

ⓒ 윤호노기자
공포에 휩싸인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할 뜻을 밝히고 조선은 그런 선조를 말리기는 하나 한양을 포기하고 의주까지 몽진한다.

그 시대의 조선은 일본군이 그렇게 강한지 몰랐고, 수도까지 지연전을 펼칠 유연성도 없었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나라의 힘이 약해지면 언제든 외세의 침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은 그날의 슬픈 역사를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그날의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충주 / 윤호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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