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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뒤흔든 충북 민중들의 봉기(蜂起)

동학, 3·1 만세, 4·19, 6월항쟁 중심에 충북인
핵심 사건마다 충북인 등장… 역사의 '중심축'

  • 웹출고시간2019.01.01 20:40:46
  • 최종수정2019.01.01 20:40:46
[충북일보] 2019년 기해년은 3·1운동 100주년이다. 지난 100년을 되돌아보고 미래 1천년을 제대로 준비하자.

역사상 숱한 민란(民亂)과 변란(變亂)을 통해 민중들은 분기탱천(憤氣·天) 했다. 신라 혜공왕(惠恭王) 시절의 도적 봉기, 견훤의 농민군, 고려 무신정권에 대항한 농민과 천민의 봉기, 1175년(고려 명종 5) 석령사(石令史) 봉기, 1176년 명학소(鳴鶴所)의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 봉기 등이 대표적이다.

1862년(조선 철종 13)에도 전국적으로 민중들의 봉기가 있었다. 특히 1894년 농민전쟁은 중앙 봉건권력의 타도를 외쳤다.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추구한 셈이다.

손병희 선생 유허지

◇동학 지도자 손병희 선생

1861년 4월 8일 조선의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손병희 선생이 태어났다.

선생의 아버지는 당시 청주목에서 세금징수를 담당하는 향리였다. 1882년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라는 동학의 교리에 푹 빠졌다. 3년 뒤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가 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북접 소속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다. 1897년 정신적 스승이었던 최시형 선생의 뒤를 이은 제3대 동학 교주가 됐다.

선생은 이후 동학운동의 지도자이자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줬다.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선생은 안경장수로 변장해 중국을 거쳐 1901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교육 사업(보성전문학교·동덕여학단 인수)과 출판사업에 관심을 쏟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선생은 1922년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별세했다. 현재 청주 삼일공원에 충북 출신 민족대표 33인인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와 함께 동상이 설치됐다.

1894~1895년 동학농민운동은 충청도와 전라도를 주요 무대로 했다. 우금치(공주·1894년 11월)를 비롯해 충북 옥천·청산, 청주, 충주 등에 동학과 관련된 수많은 역사적 사실과 유적 등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919년 3월의 청주

1919년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정점은 3·1 만세운동이다. 총과 칼 대신 태극기를 든 민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야말로 전국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3월 2일 청주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 같은 달 10일 청주농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계획됐다. 이어 11일 충주 장날을 맞아 만세운동이 추진됐다. 그러나 실제 만세시위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충북에서 본격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진 것은 3월19일이다. 괴산 장터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의 주도로 전개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이를 시작으로 4월 19일 제천 송학면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도내 전역에서 50회 이상의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괴산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홍명희 선생은 괴산 출신의 소설가이자 언론인, 사회운동가였다.

오산학교와 휘문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0년대 초반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시대일보사 사장으로 재직 중인 1927년에 민족 단일 조직인 신간회 창립에도 관여했다.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했던 시대일보사는 당시 조선민중의 울분을 알린 매체로 평가받고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정춘수 선생. 1873년 2월 12일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3·1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1921년 5월 출옥했다.

1927년 2월 신간회 간사로 선출됐고,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같은 해 9월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났다. 정춘수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됐다.

이로 인해 지난 2010년 3월 정춘수 동상은 철거됐다. 대신 3·1운동을 상징하는 횃불 조형물이 설치됐다.

신홍식 선생 묘소

신홍식 선생.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다. 1919년 2월 평양에서 이승훈 선생을 만나 3·1운동 계획을 들었다. 2월 28일 독립선언식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한 그는 손병희 선생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의 최종 회합에 참석했다.

3월 1일, 선생은 지인들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일제에 피체됐다. 선생은 법정에서도 일제가 제시한 동양평화론의 허구성을 질타하며 독립에 대한 확신을 피력했다. 결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선생의 묘소는 현재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 있다.

4·19혁명 기념탑

◇이승만 무너뜨린 4·19혁명

한학자이자 통일운동가인 임창순 전 성균관대 교수. 1914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일제 때 보은관 선정서숙에서 한학을 익힌 뒤 대구사범대 전임강사를 거쳐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를 지냈다.

성균관대 재직 중이던 1960년 4·19 혁명 때 젊은 학생들의 피를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며 대학교수 시위(4월 26일)를 주도했다. 이후 민족자주통일위원회에서 남북 평화통일을 위한 활동을 한 그는 1963년 지곡서당의 전신인 태동고전연구소를 세워 후학활동을 시작했다. 1964년에는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1970년대 말까지 '주요사찰대상'이었다.

충남 논산 출신의 이민우 전 국회의원. 야당 정치인으로 민주당 구파로 활동했다.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등 '3김'의 그늘에 가려 대권 도전 기회는 잡지 못했다. 하지만, 정치생활기간 중 타협하지 않고 야당인의 외길을 걸어왔다. 1946년 충북신보 영업국장을 거쳐 1948년 청주에서 시의회 부의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0년 4·19 이후 장면 총리 인준 문제를 둘러싸고 민주당 신·구파가 갈등을 빚을 때 구파가 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와 신민당을 창당하자 이에 가담했다. 정치 현장에서 4·19 혁명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그해 5월 27일 재야세력과 통일민주당이 연대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됐다.

앞선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조작·은폐 사실을 폭로했다. 국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됐다.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됐다.

6월 9일 연세대 학생들은 6월 10일로 예정된 국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ㅎ했다.

6월 10일국민대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약 24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했다. 청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충북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국민의 승리다. 6월 항쟁은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종말을 불러왔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해 청주 출신의 박종운씨 일화는 지금까지도 화제다. 긴급수배령이 내려진 박 씨를 보호하기 위해 고문도 마다하지 않은 박종철 군의 죽음이 우리사회에 큰 울림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박 씨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보수진영에서 활동하고 있다.

◇동학~촛불혁명이 준 교훈

2016년 10월 29일 민중들이 서울 광화문 거리를 메웠다. 이들은 그해 박근혜 대통령 하야(11월 11일까지)를 주장했다. 11월 12일부터는 퇴진론(11월 25일까지)으로 바뀌었다. 급기야 11월 26일부터는 탄핵론(2017년 4월 29일)으로 번졌다.

2016년 5월 16일부터 10월 30일까지 청와대 비서실장은 역임한 이원종 전 충북지사. 그는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해 "봉건시대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답변했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이 전 실장은 잘 아는 사람들은 '이 실장이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진짜로 몰랐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최순실 사건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동학운동에서 촛불혁명까지. 민중들의 분노는 왕조 또는 정권의 몰락을 불러왔다. 비폭력 3·1 만세운동은 전 세계에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동학에서 촛불까지 민중들의 분노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계기가 되지 못했다. 또 다른 정치세력의 이득으로 돌아갔다. 민중들의 삶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못했다.

3·1운동 100주년. 횃불과 촛불을 넘어 새로운 국가적 철학을 마련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화합의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 정치공학적 셈법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민본을 실천해야 한다. 역사를 잊는 민족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 김동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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